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후)

여록(呂祿)은 여후(呂后)의 유언중 어떤 것을 따르지 않아 전패하게 되었는가?

중은우시 2018. 5. 15. 17:28

글: 찰감(察鑒)


기원전180년 7월, 여치(呂稚, 여후)의 병이 위중해진다. 그녀는 죽기전에 여씨친족들을 불러모아서 유언을 남긴다: "예전에 한고조(유방)께서 천하를 평정할 때, 일찌기 여러 대신들과 약조한 바 있다: '유씨성이 아니면서 왕에 봉해지는 자가 있으면 천하인이 함께 그를 죽여버릴 것이다'. 현재 여씨성의 사람들중에 왕에 봉해진 사람들이 있고, 많은 대신들은 불만을 품고 있다. 내가 곧 세상을 떠날 것인데, 황제의 나이가 어리니,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너희는 반드시 병권을 확실히 잡고 황궁을 잘 보위해라. 자리를 떠나 장례에 참석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매복에 당하지 말라." 태후 여치가 죽은 후 1개월도 지나지 않아, 북군(北軍)을 장악하고 있던 여록은 머리가 달아나고, 여씨는 모조리 도륙된다. 여록의 최후를 보면, 여후가 제대로 된 사람에게 후사를 맡기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록은 그 유언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유언을 집행할 능력이 없었다.


여록은 이 위기의 근원을 "여씨봉왕(呂氏封王)"으로 보았다. 즉 여록 본인에 있어서 그는 반드시 병권을 장악해야겠다든지, 반드시 왕이 되어야겠다든지 하는 야심이 없었다. 비록 <사기>에서, 여록을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 반란을 꾀했다"라고 하였지만, 동시에 태사공이 묘사한 여록의 세부사항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록은 착실한 사람이다. 그저 편안하고 부귀한 생활만 누리면 되었고, 만족했다. 그는 여러 대신과 제후왕들과 무력으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인 역상(酈商)이 그에게 병권을 내놓으면 여러 대신들이 여씨일족을 살려주고 부귀를 보장할 것이라고 말하자, 여록은 마음이 동한다. 여록은 이 평화협정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여러 친구들과 상의할 때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갈려서 서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친구들중에서 반대하는 사람은 병권과 왕위에 미련을 두어서가 아니라, 병권을 내놓은 후에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이를 보면, 여씨일족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 반란을 꾀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만일 여러 여씨일족이 평화협정에 대하여 반신반의했다면, 경험이 풍부한 여수(呂嬃, 여치의 여동생)는 병권을 내놓은 후에는 여씨일족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여록이 찾아와서 평화협정을 보고할 때, 가장 여수를 절망하게 한 것은 눈앞의 이 북군을 장악한 조왕 여록이 이렇게 천진해서가 아니라, 곧 다가올 격랑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왕 여록이 떠난 후, 그녀는 집안의 금은보화를 모조리 대청에 쌓아놓고 하인들에게 나눠준다. 어쨌든 모두 지켜낼 수 없는 것들이니까.


여록은 왜 여씨가 왕에 봉해졌는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같았다. 이는 그저 여후가 친정사람들을 위하여 해준 특별한 복지혜택으로만 여겼다. 여록은 여씨봉왕이 왜 효혜제가 건재할 때 발생하지 않았는지 주의하지 않은 것같았다. 그저 편안한 생활이 그로 하여금 여씨봉왕의 진상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게 만든 것같다. 그 유언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내용이 있다 바로 황제가 어리다는 말이다. 여씨봉왕의 유일한 책임은 바로 호혜제의 자손이 순조롭게 성년까지 성장하게 만드는데 있다. 이것은 여씨일족이 편안하게 물러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치는 한고조의 유훈까지 어겨가면서, 그녀의 친정사람들을 겉을 보기에는 영화부귀를 누리는 불구덩이로 밀어넣은 것이다. 누가 여치가 나이들어 아들을 잃고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절망을 이해할 것인가. 누가 한 모친이 아들의 황위를 위하여 여러해동안 분전하였으나 성공한 후에 수단의 잔학함으로 아들을 붕괴로 몰아넣은 복잡한 심경을 이해할 것인가.


그저 깊은 산속에 숨어있는 장량(張良)만이 여후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년에 여치를 위하여 한 가지 계책을 내놓는다. 여씨를 무장시키는 것이다. 이 계책은 나이어린 장벽강(張辟强)의 입을 통해서 여러 대신에게 제기된다.


이 계책의 배후에 있는 논리는 아주 명확하다: 만일 황제의 명분으로 황위를 노리는 다른 황자를 억누를 수 있다면(가능성이 극히 낮다), 여씨까 왕에 봉해져서 주살된다고 하더라도, 황제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황제가 여씨봉왕으로 다른 황자들에게 황위를 찬탈당한다면, 여씨를 왕에 봉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도의와 관련없은 역량의 다툼이다. 그렇다면 왜 여씨를 무장시켜야 하는가? 만일 성공한다면?


아쉽게도, 그 중심에 서 있는 조왕 여록은 그의 역할과 지고 있는 책임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같다. 이는 기실 그의 안목과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는 다른 여씨일족과 마찬가지로, 여치라는 큰 나무의 그늘아래에서 시원하게 지내며 안락하게 부귀영화를 누릴 줄만 알았다. 그가 어찌 생각했으랴. 북군의 병권을 포기한 후, 누군가 핑계를 찾아 어린 황제를 죽여버릴 줄을. 이 모든 사항을 분명히 보고 또한 결과를 좌우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로지 진평이었다.


장벽강이 여러 대신들에게 말할 때, 진평은 그것이 옛파트너 장량의 솜씨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때는 아무도 여후와 장량의 조합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진평에게 필요한 것은 느긋한 인내심이다. 그리고 주발에게 적당히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씨봉왕의 화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때,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왕릉은 결사반대하지만, 진평과 주발은 극력 지지했던 것이다. 여러해동안 은인자중한 후에 장량과 여후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대국을 좌지우지할 시기가 이제 성숙되었다.


안정된 생활을 꿈꾸었으나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올랐던 여록은 친구의 배신과 진평의 계략으로 한걸음 한걸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그래서 여씨를 왕에 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