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복녕객(福寧客)
벽양후(辟陽侯) 심이기는 유방과 같은 고향사람이고, 얼굴과 눈이 청수하고, 말재주가 뛰어났다. 유방이 거병한 후, 집안을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자, 심이기를 '사인(舍人)'으로 삼아 집안일을 대신 처리하게 하였다. 여후는 심이기와 밤낮으로 모여서 얘기하여, 그 모습이 마치 가족같았고 점점 서로 눈이 맞았다. 당시 태공은 이미 연로하고, 자녀는 모두 어렸다. 그래서 그들 둘은 사통하면서 노인과 아이들을 속일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이 몰래 만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게다가 유방은 서쪽으로 가서 오가는 길이 너무 멀었고, 서신왕래도 점점 드물어진다. 두 사람은 서로 정이 점점 깊어갔고 마치 부부와 같이 주야로 서로 붙어있었다. 나중에 유방의 가족이 항우에게 붙잡혀 초나라군영에서 몸이 인질이 되었을 때도 심이기와 여후는 여전히 같이 자고 같이 먹었다. 그래도 전혀 들키지 않는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은 외도의 고수들이다. 유방이 황제를 칭하고, 여후가 종용하여, 심이기는 벽양후가 된다. 심이기는 여후에게 감사하여 그 이후 침대위에서 더욱 성의를 다한다.
이상의 내용은 역사소설이다. 사실이 그러한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여후와 심이기가 환난을 같이 겪은 사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무살도 되지 않은 여치(呂雉, 여후)가 41세가량의 사수정장에게 시집간 후, 1년후에 딸을 낳고, 3년후에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7년후 유방이 집을 떠나서 거병하여 진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그는 한번 떠나자 7년간 돌아오지 않는다. 젊은 여치는 오랫동안 독수공방의 고통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여치의 이 독수공방의 생활에 누군가 끼어든 적이 없을까?
<사기.역생육가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여후는 벽양후를 아주 총애했다. 누군가 혜제의 앞에서 심이기를 폄훼하는 말을 하자, 혜제는 그 말을 다 들은 후 아주 진노한다. 그리고 즉시 심이기를 감옥에 가두고, 심이기를 죽이려고 한다. 여후는 심이기가 아들에게 붙잡힌 것을 알고 구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점(漸)하여 앞에 나서서 심이기를 구해달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대신들은 평소에 심이기의 발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죽여서 마음 속의 원한을 풀고자 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벽양후가 바로 심이기이다. 심이기는 원래 유방의 부하이나 유방이 거병한 후 심이기는 유방의 둘째형 유중과 함께 유방부친의 곁에 남아서 유태공을 모신다. 여치와 태공은 같이 생활했고 심이기와도 내왕이 있었다. 태공, 여후가 항우에게 인질로 잡힐 때, 심이기는 '사인'(시종)의 신분으로 여후를 따라 2년4개월간의 인질생활을 함께 보낸다. 그러므로 심이기와 여후간에는 환난지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기.여태후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여후는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우승상 왕릉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왕릉을 어린 황제의 태부(太傅)로 승진시키고, 왕릉의 상권(相權)을 박탈한다. 왕릉은 여후가 자신을 겉으로는 승진시켰지만 실제로는 권한을 박탈여 그가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병가를 핑계로 집으로 가서 쉰다.여후는 여씨들을 왕으로 봉하는데 동의한 좌승상 진평을 우승상으로 승진시키고, 벽양후 심이기로 하여금 좌승상을 맡게 한다. 심이기는 비록 좌승상이 되었지만, 조정업무를 처리하지 않았다. 그저 태후의 궁중일만을 책임졌다. 직책이 낭중령(郎中令)과 비슷했다. 다만, 심이기는 태후의 총애를 받아 실제로 조정을 장악했고, 공경대신들은 그를 통하여 일처리를 했다.
위의 기록은 여후와 심이기가 사적인 관계가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게 한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견해: 이 기록은 심이기와 여후가 확실히 사사로운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심이기를 중국고대십대남총(男寵)의 하나로 열거한다.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 한혜제는 심이기가 모후의 총신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심이기를 죽이려고 했을까? 둘, 여후는 왜 "점(漸)"했을까? 왜 앞에 나서서 구해주지 못했을까?
혜제가 심이기를 죽이려 한 것은 심이기가 모후와 사통했기 때문이다. 한혜제는 자신의 모후를 처리할 수 없어서 그저 모든 원한을 심이기에게 풀었다. 당사자중 하나인 여태후는 비록 아들로부터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이런 숨은 사정은 황제인 아들이 처리한데 여후를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다. "여태후점(呂太后漸), 불가이언(不可以言)"의 여덟글자는 아주 정확하게 이때의 여후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둘째 견해: 유후는 그저 심이기를 총애했을 뿐, 두 사람이 사적인 애매한 관계는 아니라고 본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하나, 누구도 태후와 심이기의 사적인 관계를 가지고 심이기를 고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을 이유로 심이기를 고발하는 것은 증거확보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사실로 밝혀지면 황실의 체면은 뭐가 되는가? 둘, 심이기가 고발당한 것은 또 다른 죽을 죄를 졌기 때문이다. 죄가 크므로 사면할 수가 없었다; 여태후가 직접 나서서 그를 구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여태후점,불가이언'한 것이다. 다만 이런 '점'은 두 사람이 사적인 애매한 관계여서가 아니라, 심이기와 환난지교로 어려울 때 같이 견딘 적이 있는데, 이런 중형을 받는데도 구해줄 수 없어서 스스로 점(漸)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셋, 대신들이 심이기를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인데, 이 문구는 역으로 심이기와 여후간에 사적인 애매한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일 심이기가 태후와 사통했다면 그 죄는 죽을 죄가 아니고, 만일 그런 일있다고 하더라도 신하는 위존자휘(爲尊者諱) 해야 하는 것이지 공공연히 주살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수수께끼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한혜제가 왜 진노하여 심이기를 죽이고자 했을까?
둘, 여태후는 왜 "점, 불가이언"했을까?
심이기는 진나라에 항거하는 투쟁과정에서 장기간 태공을 모시고, 여후와도 장기간 접촉했다. 초한전쟁에서 여후와는 환난지교가 있다. 그러므로, 여후의 신임을 깊이 받았다. 위에서 본 것처럼 여태후가 왕릉을 파면하고 심이기를 좌승상에 삼은 것을 보더라도 그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다.
태후의 총애를 받은 심이기는 꼬리를 말고 조용히 살지 않았고, 총애를 믿교 교만방자해져서 권력을 농단하고 법을 어겼다. 그래서 죽을 죄를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혜제는 분명 진노하고 그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태후가 "점, 불가이언" 한 것은 주로 심이기의 죄가 엄중하여 태후가 구하고 싶어도 구해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억지로 간여한다면, 아마도 태후의 명망에 손상이 갔을 것이다.
심이기가 평소에 발호하여 여러 조정대신에게 미움을 산다. 그리하여, 심이기가 한혜제에 의하여 하옥되고 사형에 처해질 때, 대신들은 모두 심이기가 마땅히 받아야할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고, 아무도 나서서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한혜제의 조정에서 특색은 한혜제와 여후가 모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혜제는 황제이고, 대신을 처벌하는 것은 그의 직책이다; 태후는 직접 조정에 관여할 수 없고, 그저 아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일처리를 해야 했다. 이 일은 바로 아들이 진노하여 직접 처리한 일이다. 여후가 조정을 혼자서 장악한 것은 한혜제가 죽은 후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불만을 태후에게 고하지 않더라도, 혜제에게도 고하지 않았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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