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중은우시 2013. 4. 13. 21:35

글: 김만루

 

송교인이 암살된 후 크고 작은 관련인물들은 기이한 사망을 맞이했다. "송교인암살사건"은 마치 신비한 저주와 같다. 모든 사람이 벗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기이한 사건의 배후에는 어떤 관련과 이익이 흐르고 있을까?

 

"송교인사건"에 관하여 방회비사성격의 또 다른 해석이 있다. 당시 원세개가 홍술조를 상해에 파견했을 때, 그는 가장 먼저 청방의 우두머리 이징오를 찾아간다. 이징오의 수하에 두명의 제자가 있었다. 하나가 응계형이고 다른 하나가 막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장종창이었다. 그후 이징오는 경력이 더 많고 더 믿을 수 있는 응계형을 홍술조에게 소개한다.

 

국민당이 국회선거에서 승리한 후, 이징오는 송교인과 진기미의 권력다툼으로 모순이 격화되자, 그는 송교인암살을 통하여 진기미와 거래하고자 한다. 그후 그는 진기미에게 가서 가슴을 두들기며 그가 "송을 죽이고, 진을 옹립하겠다'고 보증한다. 조건은 오십만원과 권총 한자루이다. 진기미는 이징오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돈과 권총을 즉시 보내준다. 사건이 발생한 후, 진기미는 먼저 부하를 풀어서 권총을 회수한다. 그후에 응계형을 붙잡아 사건을 해결한다. 이징오는 이를 보고 일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바로 사람을 보내어 무사영을 죽여 살인멸구한다. 3년후, 이징오는 또 다른 제자 장종창을 보내어 진기미를 암살한다. 당시의 복수를 한 셈이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지리멸렬하기는 하지만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하나는 무사영은 이사영이 보낸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종창이 진기미를 죽인 것은 이징오가 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송교인이 암살된 것은 이징오와 진기미가 한 거래이고, 원인은 국민당내부의 권력투쟁이라는 것이다.

 

하늘 아래에 새로운 일은 없다. 권력투쟁은 역대왕조에 모두 존재했다. 혁명진영내에서도 피할 수 없었다. 일찌기 동맹회시기에, 혁명당 내부에는 화흥회, 광복회와 광동파의 세 파가 있었다. 그동안 이익분쟁 정견차이등으로 여러번 손중산과의 충돌이 발생하고, 결국 광복회는 동맹회에서 분열되어 나간다. 사실상 신해혁명이전의 중부동맹회 즉 장강장하류의 혁명당인은 손중산, 황흥등이 양광일대에 전력을 기울이는데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결과이다.

 

혁명성공후, 동맹회의 확대로 규모가 더욱 큰 국민당이 된다. 일부 새로 가입한 구성원은 더더욱 어룡혼잡, 니사구하였다. 원래의 혁명중견세력인 동맹회도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진다. 온건파는 송교인등을 중심으로 하였고, 선거와 국회를 투쟁도구로 하여, 원세개를 대표로 하는 북양군정실력파와 구관료를 견제하자는 것이다; 급진파는 대계도, 하해명등으로, 그들은 원세개와 타협에 반대하고 계속혁명을 주장했다. 이파에는 손중산, 진기미등이 숨은 우두머리였다.

 

청황제 퇴위후, 국내의 인심은 안정된다. 급진파는 점차 시장을 잃는다. 송교인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민당인이 국회선거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리하여 모두 주목하는 촛점이 된ㄷ나. 일부 합리적인 자리를 얻지 못한 국민당인은 응계형과 같이 혁명에 투기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회당분자들이 이씨었다. 이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해할만했다.

 

진기미를 예로 들어보자. 상해혁명후, 진기미는 무명의 혁명당인에서 일거에 호군도독의 지위로 올라선다. 일시에 풍운을 질타하고 풍광이 무한했다. 그러나 남북의화의 최종실현과 남경임시정부의 취소로 진기미의 위치는 큰 도전을 받는다. 먼저 강소도독 정덕전은 게속하여 성내정령통일을 핑계로 호군도독부의 폐지를 요구한다. 이어서 원세개는 당소의내각조직때 진기미를 공상총장에 앉힌다. 실제로 이는 조호이산이다. 혁명당으로 하여금 본거지를 내놓게 하는 것이다.

 

원세개의 뜻에 대하여, 진기미와 다른 혁명당인들은 꿀먹은 벙어리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다 알았다. 그러므로, 진기미는 각종 이유를 대며 부임하지 않았다. 원세개는 계속 재촉했다. 진기미는 차장 왕정정에게 북경으로 가서 부의 일을 대리처리하도록 하고, 그 자신은 계속 상해에 머물렀다. 1912년 7월 31일, 각방의 압력하에, 진기미는 어쩔 수 없이 호군도독부를 취소하고, 상해는 다시 강소에서 관할한다. 이때, 당소의내각은 이미 무너졌고, 공상총장에서는 이미 면직되었다. 진기미는 아무런 관직도 없이 가벼운 몸이 된다. 이것으로 한때 풍광이 있고 야심이 있던 그에게 현실의 거대한 차이와 심리적인 낙막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정세고앞에서, 원세개는 아주 원만했다. 진기미가 호군도독부를 사임하기 하루 전날, 원세개는 3만원의 여비를 주어 진기미로 하여금 미국으로 출국하여 공상업무를 시찰하게 한다. 그 뜻은 그들 달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기미는 돈을 받은 후 출국하지 않는다. 먼저 고향을 한바퀴 돌아보고, 그 후에 황흥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원세개를 만난다. 그러나, 이전에 손중산이 이미 원세개와 한번 만났기 때문에, 황흥, 진기미의 이번 북행은 어느 정도 분위기가 식어 있었다.

 

북경을 한바퀴 돌아보았지만, 진기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다. 이 점은 손중산, 황흥에 대한 대우와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손중산은 원세개를 방문한 후, 전국철로총공사 독판의 자리를 받아, 교통부에서 매월 판공비 3만냥을 받았고, 일체의 행정인사권한을 받는다. 북경정부도 간섭할 수 없었다. 황흥은 북경에 온 후, 한월천철로독판에 임명되고, 매월경비로 수천원을 받는다. 대우는 내각총리보다 나았다.

 

진기미는 3만원의 출국시찰비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옛날의 지방실력파인 진기미는 자연히 불만이 컸을 것이다. 그해 9월 13일, 혁명당인 우우임이 말한다. 진기미는 지금 상해에서 심심하게 지낸다.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손님들도 많이 만나지 않는다. 그를 공격하는 사람은 그가 하루종일 무슨 청화방, 평안리와 같은 류의 오락장소에서 논다고 하는데, 기실 그런 일은 없었다. 우우임은 약간 탄식하며 옛날의 호군도독이 지금은 이렇게 되었으니 가련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일찌기 임시대총통을 맡았던 손중산과 육군총장을 맡았던 황흥은 진기미의 상황과 약간 유사했다. 원세개가 주재하는 정권하에서, 이미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그들이 혁명시기에 주장한 일부 사항은 대체로 시장을 잃어버렸다. 이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송교인을 대표로 하는 원세개의 체제내에서 합법적인 투쟁을 하자는 사람들이다. 당시에는 관리를 하고 싶은 사람은 관리가 되고, 의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의원이 되었다. 이들은 잘나갔다.

 

모두 알다시피, 송교인은 동맹회 초기에 손중산과 의견이 달랐다. 개인기질이든 행위방식이든 두 사람은 모두 비교적 차이가 컸다. 피차간의 교류도 많지 않았다. 신해혁명때, 송교인은 계속하여 책임내각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손중산은 처음에 총통제를 주장하다가, 각성대표회의에서 청황제퇴위를 결의한 후 원세개가 임시대총총을 맡은 후에는 손중산도 내각제를 주장한다.그리고 이를 <임시약법>에 써넣었다.  나중에 천도문제에서, 손중산, 황흥은 남경을 수도로 삼자고 주장하고, 송교인은 원세개의 입장에서 북경을 수도로 삼는 것을 지지한다. 양자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송교인의 방식에 대하여 일부 혁명당인들 특히 급진파는 불만이 컸다. 특히 국민당을 만든 후, 외부에 손중산, 황흥이 허수아비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송교인은 나중에 부득이 신문에 공개서신을 발표해야 했다. 자신은 비록 손중산, 황흥과 정견이 다르지만, 피차간에 나라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손, 황 두 분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손중산, 황흥이 공직을 사임한 후, 태도가 한때 소극적으로 바뀐다. 예를 들어,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개조하는데 있어서, 손중산, 황흥은 기본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전권을 송교인에게 위탁하여 혼자서 처리하게 한다. 이는 어느 정도 송교인이 빠르게 굴기할 수 있는 기회였다. 비록 손중산, 황흥이 여전히 공인된 혁명당 영수이지만, 국민당에서 그들은 단지 명의상의 당수였고, 진정한 지도자는 실제로 송교인이었다.

 

바로 송교인이 정교하게 기획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국민당은 압도적으로 제1차 국회선거에서 승리한다. 송교인이 곧 내각총리가 되고 새로 떠오르는 정치스타가 될 것이 보이자, 손중산, 황흥등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어쨌든 송교인은 당시 겨우 서른몇살이었다. 너무 젊었다.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개조할 때 손중산은 일찌기 송교인에게 말한다. 현재 누구를 대총통으로 추대하든, 모두 단기간내에 중국을 크게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정치적으로만 접근하면, 반드시 갈수록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원세개가 10년간 총통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는 실업건설에 주력할 것이다. 십만리의 철로같은 것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국가가 희망이 있다. 그 말에 숨은 뜻은 그는 송교인이 주창하는 정당정치, 정당내각제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개인관계로 보면, 황흥과 송교인은 같은 고향이고, 모두 화흥회의 골간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친밀했다.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동맹회가 성립된 후, 혁명당 내부에서 몇번의 분열풍파가 있었다. 황흥은 대국을 고려하여 부득이 손중산의 권위와 영수지위를 옹호했다. 게다가 그 자신은 특별히 정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민국초기의 시기에 그는 주로 손중산을 따라갔다.

 

손중산, 황흥과 비교하자면, 진기미는 달랐다. 그는 심기가 깊었다. 그리고 권력욕 점유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호군도독의 위치를 빼앗고 온갖 방법을 써서 다른 경쟁상대방을 암살하거나 내쫓은 것으로도 이는 증명된다. 그리고 진기미는 진정 실권을 가져본 사람이다. 이것은 손중산, 황흥이 처음부터 엉망인 상태로 권력을 물려받은 것과 차이가 있다. 권력의 재미를 맛본 사람이 일단 권력을 잃으면 어떤 맛일까. 아마도 맛본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1913년 2월 15일, 선거가 끝났을 때, 송교인은 각지에서 연설을 한 후에 상해로 간다. 바로 5일전에, 손중산은 마군무, 하천형, 대계도 등 혁명당 급진파를 데리고 일본방문에 나선다. 이에 대하여 응계형은 밀함으로 조병균에게 보고하면서 이를 "고인심치"라고 말한다. 그 뜻은 묘하다. 도대체 '고인심치'가 무슨 뜻인가. 무슨 고인이 어떤 뛰어난 수완을 쓴단 말인가. 무엇이 높다는 것인가. 이것은 응계형도 제래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통상적인 이치로 보면, 국민당의 선거승리 및 조각을 해야하는 상황하에서, 손, 황, 송은 국민당 최고지도자로서 명의상의 당수이든 실제 지도자이든, 당연히 상해에서 같이 만나, 금후의 대책을 잘 협의했어야 한다.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떻게 당내정책과 조각후의 인사배치를 할 것인지 등등. 이것은 모두 급히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왜 손중산은 조금 더 송교인을 기다리지 않고, 급히 일본으로 떠나서 급박하지도 않은 방문을 해야했을까? 만일 정말 응계형이 말한대로, '고인'이 손중산의 배후에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라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진기미인가. 그는 이미 무엇을 도모하고 있어서 일부러 손중산이 혐의를 받지 않도록 한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수수께끼이다.

 

원로혁명당인 담인봉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의 부하인 진유룡은 일찌기 북경에서 돈을 받은 공진회 회장 응계형, 부회장 장요경과 함께 중서여관에 머물렀다. 진유룡은 두 사람이 중앙에서 거액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 위험인물이 직접 정부와 교섭하다니 분명히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겠다고 생각한다. 돌아온 후 이 일을 담인봉에게 보고한다. 담인봉은 송교인을 만난 후, 그에게 도광양회하고 안전에 주의하라고 말한다. 송교인은 말한다. 경계하는 일은 이전에도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배궁사영이다 걱정할 것 없다.

 

사실상 송교인의 북상전에, 이미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느낀 사람은 담인봉 한 사람이 아니었다. <민립보>의 기자 서혈아는 곧 북상하는 송교인과 헤어질 때, 그에게 안전에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도중에 불측의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송교인은 웃으며 대답한다. 괜찮다. 나의 이번 길은 전국을 통일하고 남북을 조화시키는 일이다. 정정당당한 일인데 뭐가 두렵겠는가. 국가의 일에는 위험이 있어도 전력으로 해야 한다.

 

송교인이 사망한 당일, <신보>도 이렇게 보도한다. 송교인의 북상전에 이미 연이어 친구들이 서신을 보냈다. 그가 남경에 있을 때 누군가 그의 뒤에 잠복해서 따라가는데 암살하려는 의도이다. 송교인으로 하여금 가는 길에 조심하고 방비하라고 한다. 그러나 송교인은 말을 들은 후 이렇게 말한다. 현재 진행하는 것은 햇볕아래에서의 정치ㅜ쟁이다 몰래 하고,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유언비어이다. 믿을 게 못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언비어가 사실이 되었다.

 

암살당일 저녁, 송교인이 기차역에서 기차에 오르기 전에, 곁에는 보디가드가 하나도 없었다. 국민당에서는 아무런 방비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흉수가 암살한 후 아무렇지 않게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평상시에 자리를 지키던 경찰도, 이때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궤이했다. 상해의 한 영문신문의 편집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암살현장을 가보았는데, 흉수는 도망치고 없었다. 이는 기괴한 일이다."

 

어찌되었건, 국민당인의 중요지도자인데, 그리고 곧 내각총리를 맡을 사람인데, 출행때 아무런 방호가 없었다는 것은 신해혁명시 손중산이 받았던 대우와 너무나 차이가 크다. 이것은 비애이다. 그리고 비애의 배후에는 또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왜 진기미는 손중산에게 호위대를 파견하여 엄밀히 보호하면서, 송교인에 대하여는 이렇게 냉담하고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까?

 

더욱 기괴한 것은 '송교인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손중산등의 태도가 급격히 바뀐다는 것이다. 전해 8월, 손중산이 원세개와 만난 후 원세개를 극력 칭찬했다.'웅재대략'이라고. 당금세상에 대체할 사람이 없다고. 그리고 국민당인들에게 합작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한다. 다만, '송교인사건'이 발생한 후, 손중산은 즉시 일본방문을 중단하고 상해로 돌아온다. 그리고 회의를 소집하여 '송교인암살사건'이후의 대책을 논의한다. 회의에서 손중산은 원세개는 이미 구할 약이 없으니, 무력으로 반원을 하는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

 

반원의 각분야에서의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당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절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송교인암살사건"의 발전 및 '선후대차관'의 격렬한 충돌과 더불어, 원세개와 혁명당진영의 충돌은 날로 격렬해졌다. 결국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1913년 6월, 원세개는 이열균, 호한민, 백문울등 3명의 국민당적 도독의 직위를 해임한다. 송교인의 사망사건은 결국 새로운 내전에 도화선이 된다. 이때는 신해혁명으로부터 1년반이 겨우 지난 때였다.

 

1913년 7월 12일, 이열균은 강서 호구에서 '토원'을 선언한다; 3일후, 황흥은 남경으로 가서 상소토원군을 성립시킨다, 강소도독 정덕전은 상해로 도망온다. 이어서, 백문울, 진기미, 진형명은 안휘, 상해, 광동에서 연이어 독립을 선포한다. 혁명당은 북양정권과 어사망파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후, 주서는 절강에서 손도인은 복건에서, 담연개는 호남에서 독립을 연이어 선포한다. 형세는 한때 남방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남방 각성의 독립소식이 전해지자, 원세개도 아예 가면을 벗어버린다. 그는 기세등등하게 담화를 발표한다: "나는 현재 확실히 알았다. 손문 이들은 이렇게 해도 교란시키고 저렇게 해도 교란시키는 자들이다. 교란시키는 것 이외에 그들은 아무런 다른 재주도 없다. 잘 들어라. 손문은 나와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나 원세개는 다른 사람이 교란시키도록 놔두지 않겠다. 그 손문이 만일 총과 포를 들고 나온다면 나는 병력을 보내어 토벌하겠다. 절대로 그들에게 여지를 두지 않겠다." 총통부 비서장 양사이는 말한다: "대총통,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직접적이지 않습니까." 원세개는 바로 말한다.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한 말은 내가 책임진다." 그후 원세개는 육군총장 단기서에게 전시내각을 구성하게 하고, 무력으로 혁명당인의 '반란'을 진압할 준비를 한다.

 

전쟁은 군인들이 말한다. 북양군이 대거 남하하면서, 강서, 안휘, 상해, 강소의 토원군은 연이어 패배한다. 담연개, 주서등은 바람부는대로 키를 돌린다. 속속 독립취소를 선포하고, 북경정부에 귀순한다. 형세는 다시 신속히 역전된다. 패국이 확정되자, 손중산, 황흥, 이열군등은 속속 일본으로 망명한다. "이차혁명"은 혁명당인의 완패로 끝난다.

 

"이차혁명"은 늦게 이루어진 결전이다. 국민당내에 급진파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거동이 사회각계의 보편적인 반감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반원'을 핑계로 하여, 실제로 권력을 쟁취하려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혁명을 명목으로 온 백성을 볼모로 잡았다고 욕했다. 소위 '이차혁명'은 전혀 혁명이라 할만한 것이 못된다. 그들이 보기에, '이차혁명'은 강희연간의 '삼번의 난'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실패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사실상, 혁명당 급진파들이 일으킨 이번 혁명은 그들에게 점수를 따게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원세개의 권위를 수립하게 만들고, 전국을 통일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군사적으로 압도적 승리를 거둔 후, 원세개는 여전히 국회에서 합법적인 항쟁을 진행하는 국민당 온건파를 수습한다. 그러나, 수습하기 전에, 원세개는 그들에게 한가지 일을 하게 한다. 그것은 바로 정식 대총통을 선거하는 것이다.

 

1917년 10월 6일, 759명의 국회의원은 선거현장에 모인다. 중화민국의 초대 정식 대총통을 선거하는 것이다. 선거진행과정에서, 회의장에 돌연 수천명의 '공민단'이라는 깃발을 든 사복경찰이 뛰어든다. 그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회의장에 걸어들어와 만일 원세개를 정식 대총통으로 뽑지 않으면, 의원들은 국회대문을 나설 생각을 말라고 한다.10월 10일, 즉 신해혁명 1주년때, 원세개는 마침내 원하는대로 정식대총통에 당선되고 태화전에서 성대한 취임식을 거행한다.

 

이 때, 원세개는 국민당과 국회를 상대하여 착수했다. 10월 31일, 제헌위원회는 이미 헌법초안의 삼독절차를 마치고 국회에 제출하여 공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즉시 일부 국민당의원이 "난당" 이열균등과 밀접하게 왕래했다는 이유를 들어, 군경에게 밤을 세워 국민당의원의 증서를 회수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정족수 부족으로 회의를 소집할 수 없게 된다. 그후, 원세개는 아예 국민당을 금지하고 국회를 해산해버린다. 이때부터 칭제를 향하여 가게 된다.

 

이제 송교인이 주도한 민국초기의 헌정시험은 철저히 끝난다. 그가 혼자서 만들어낸 국민당도 역사의 옛명사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송교인을 모살한 사람이 바로 헌정을 모살했고, 신민국을 모살했다. 이 역사의 교훈은 참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