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사기결혼당한 명나라 공주들

중은우시 2009. 8. 14. 19:56

글: 배옥(裴鈺)

 

명나라때 황실에는 이런 규정이 있었다. 공주의 배우자는 민간의 잘생기고 선량한 남자중에서 고르고, 문무대신의 자제들은 공주를 부인으로 취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원래, 명나라의 황제는 외척의 정치간여를 아주 꺼려했다. 그래서 대신이 자녀의 혼인을 수단으로 하여 조정에 간여하고 심지어 정권을 탈취해갈까 걱정했다. 외척의 정치간여를 철저히 봉쇄할 생각에서, 명황실은 이런 규정을 둔 것이다. 황가와 대신,무장의 집안은 결혼할 수 없다. 그래서 명나라때 황실공주의 시댁은 왕왕 한문(寒門)이었다. 정치적으로 그다지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을 통하여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홍무대제로부터 숭저황제까지 환관의 정치관여는 배제하지 못했고, 어떤 시기는 아주 심각했지만, 외척의 정치간여는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었다.

 

명나라때의 부마는 절대다수가 민간남자이다. 그리고 국가정치에서 지위도 높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자주 딸을 조건이 자기보다 못한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하가(下嫁)"라고 부르는데, 전체 중국역사에서 가장 '하가'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바로 명나라황실의 공주들이다. 황제의 집안에서 태어나지만, 남편은 평민백성이다. 명실황실의 공주도 등급이 있다. 황제의 고모는 "대장공주(大長公主)"이고, 황제의 자매는 "장공주(長公主)"이고, 황제의 딸은 "공주(公主)"이다. 황가 친왕의 딸은 "군주(郡主)"이며, 친왕의 외손녀는 "현주(縣主)"이다. 이들 대장공주, 장공주, 공주, 군주, 현주는 모두 황실의 금지옥엽이고 장상명주이다. 그녀들의 혼인을 황실에서는 당연히 중시했다. 수천수만에서 고르고 골라서 시집을 보냈다.

 

그래서 민간남자들 중에서는 부마가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이는 명나라의 독특한 풍경중 하나이다. 관청과 민간은 떨어져 있고, 황실은 또한 지고무상의 높은 곳에 있으므로, 부마를 이해하고, 부마를 고르는 것이 큰 난제였다. 그 당시 과학적인 감정방법이 없으므로 그저 입소문과 다른 사람의 추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부마의 좋고 나쁨, 고저, 우열은 모두 입에 달렸다. 황제와 가장 가까운 것은 환관이다. 그러다보니 공주의 중매를 서는 것은 대부분 환관이었다. 도덕적으로 괜찮은 환관은 자연히 전심전력을 다하여 공주에게 괜찮은 부마를 골라주려고 노력한다. 그저 이익만 탐하는 소인을 만나면, 그저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하다. 이것은 민간에 사기혼인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많은 민간남자들이 양두구육으로 환관이나 가까운 신하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황실과 사기혼인을 해서 공주를 차지하며, 부귀를 얻으려 했따. 이런 일이 명나라에서는 수두룩하게 일어난다. 이것도 역사적으로 기이한 일중 하나이다.

 

명나라 홍치8년(1495년) 민간에 원상(袁相)이라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내궁태감 이광(李廣)에게 뇌물을 가득 안겼다. 이유는 이광으로 하여금 자신이 공주를 취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명나라황실에서 부마를 고를 때는 환관이나 여관(女官)이 책임졌다. 그래서 이광은 자신의 기회를 이용하여, 홍치황제에게 극력 원상을 추천한다. 그리고 원상이 뛰어나다고 대거 추켜세워주었고, 좋은 말은 다 했다. 홍치황제는 이광을 신임하였으므로, 원상을 사위로 삼는데 동의했다. 원상은 바라던 바를 이루고 준부마가 되엇따. 그의 집안에서는 환호작약했다. 홍치황제는 친히 원상을 만나보았는데, 느낌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서 원상의 부모와 혼인날짜를 약정한다.

 

그런데, 이때 어떤 사람이 고발을 해온다. 이광과 원상이 사기혼인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홍치황제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조사한다. 조사결과, 이광이 원상으로부터 뇌물을 많이 받았다는 것과 항간의 원상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홍치황제는 깨달았다. 그는 대노하였다. 그러나, 원상과 덕청공주의 혼인은 이미 혼인날짜까지 잡았다. 당시의 풍속습관으로는 이미 확정된 일이고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나, 홍치황제가 어찌 딸을 그런 사기꾼에게 시집보내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혼인을 취소시키고, 명을 내려 원상의 부마명호를 폐지한다. 그리도 다시 부마를 골라서 딸을 시집보낸다. 원상의 사기혼인전략은 수포로 돌아간다. 홍치황제는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홍치황제는 덕청공주가 마침 시집가기 전이라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이후의 가정황제보다는 행운아이다.

 

가정6년(1527년), 황실은 영순공주를 위하여 부마를 고른다. 태감, 여관의 극력추천으로 황실은 진쇠(陳釗)라는 남자를 골랐다. 그리고 진씨집안과 결혼일자를 잡는다. 영순공주가 '하가'하려 할 때, 누가 알았으랴. 세간에 '소인'이 있어 황실에 고자질했다. 진쇠의 가족은 대대로 악질이 유전되고 있는데다가, 그의 생모는 재혼하여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당한 대명의 공주를 첩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공주의 시어머니가 첩이라니, 이는 황실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 아니겠는가?

 

가정황제는 이 고발을 받고는 깜짝 놀라서, 조사를 한다. 조사해보니 진쇠의 생모는 과연 첩이었다. 그리하여 가정황제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바로 혼인을 취소한다. 그러나, 공주의 혼인날짜는 이미 전국에 공포했다. 혼인날짜를 늦추려면 이유가 필요했다. 만일 진상을 밝힌다면, 그것은 황제가 사기를 당했고, 부마가 원래는 첩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황실이 백성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황실의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가정황제는 즉시 전국에서 부마를 선발하게 한다. 고르고 골라서, 마침내 사소(謝昭)라는 남자가 선택된다. 이번에는 가정제가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 않고, 친히 부마를 보고서 뽑는다. 그리하여 그는 사소를 만난다. 누가 알았으랴. 가정제는 그를 보자마자 대노했다. 사소는 원래 대머리였던 것이다. 확실히 이 사소는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무슨 수단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잘 속여넘겼다.

 

못생긴 것이 무슨 잘못은 아니다. 그리고 결혼날짜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정황제는 할 수 없이 참고, 딸인 영순공주를 사소에게 시집보낸다. 혼인날에 전국이 난리가 난다. 꽃처럼 예쁜 영순공주가 대머리인 추남에게 시집가는 것이다. 호사가가 있어서, 민요를 만들었는데, <<십호소(十好笑)>>라는 것이다. 당시에 열가지 웃기는 일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중 10번째가 바로 황실이 사소를 부마로 삼은 것이다.

 

공주의 혼인문제에 있어서 가정황제는 장인으로서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사소는 추하게는 생겨도 인품은 괜찮았다. 이것은 어느 정도 가정황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만력황제는 가정제보다 훨씬 머리아팠다.

 

만력10년(1582년), 만력제는 친여동생 영녕공주를 위하여 부마르 골라야 했다. 그 소문이 나자 전국이 진동한다. 민간의 여러 남자들이 모두 욕심을 냈다. 북경성에는 양씨성의 부자가 있었는데, 이를 좋은 기회로 보았다. 그리하여 온갖 수단을 써서, 대태감 풍보(馮保)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리하여 양씨집의 자제인 양방서(梁邦瑞)가 부마후보에 오른다. 돈은 귀신도 부리는 법이다. 여러번의 심사를 거쳐, 양방서는 대태감 풍보의 입김하에 과연 선택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양방서는 일찌감치 병이 깊이 든 상태였다. 병이 뼛속까지 들어간 상태이다.

 

혼인날, 이 양방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혼인현장에서 피를 쏟는다. 그리하여 혼인예복마저도 붉게 물든다. 그러나 양씨집안에서 거액의 뇌물을 받은 태감들은 꼬리가 밟힐 것같자, 급히 머리를 짜낸다. 그리고 결혼일에 붉은 것을 보는 것은 신혼의 경사라고 떠든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도 그냥 떠들썩하게  호응한다. 이렇게 하여 영녕공주는 양씨집안의 대문을 넘는다.

 

양방서는 이미 병이 깊어서, 자연히 남녀간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영녕공주는 그제서야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신혼 1개월만에, 양방서는 병사한다. 영녕공주는 과부로 수년간 지내다가 쓸쓸히 죽는다. 한 나라의 공주이며, 황제의 친여동생이 이런 양두구육의 남자에게 걸려서 참혹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이상의 세 부마는 모두다 말로는 용모가 준수하고, 마음씨가 착하고, 신체가 건강하고, 인품이 뛰어나다는 사람들이 아니었겠는가? 사실은 전혀 달랐다. "양두구육"이었던 것이다. 황실을 속여서 결혼하려했으나 결국 최종관문을 못넘고 응보를 받은 경우도 있고, 어떤 자는 잘 속여넘겨서 공주를 손에 넣었다. 황실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정말 고금의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