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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왕조(明王朝): 정신분열 300년

by 중은우시 2009. 7. 29.

글: 오악산인(五岳散人)

 

현재 명나라의 역사를 얘기하자면, 청나라때 공식편찬된 <<명사(明史)>>는 아마도 아주 소수가 보는 것같다. 청나라 초반에 최대의 문자옥(文字獄)을 일으켰던 <<명서집략(明書輯略)>>은 더더구나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김용(金庸)의 소설 <<녹정기(鹿鼎記)>>일 것이다. 가장 인기있는 명나라역사저작은 현재 <<명나라의 그 일들(明朝那些事兒)>>일 것이다. 사료(史料)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사견(史見)은 엉망진창이라는 점은 아무렇게나 뒤적여보아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현재의 독서심리상태에 부합하는 것같다. 심지어 <<논어>>의 가장 유명한 보급작품은 우단(于丹)의 잡설이 아닌가? 한 왕조의 역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게 뭐 대수겠는가?

 

그러나, 명나라역사는 확실히 재미가 있다. 황인우(黃仁宇)의 대역사관에 따르면, 중국의 문화는 몇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주(周)나라에서 진(秦)나라이전까지가 하나의 단계로 볼 수 있고, 진한(秦漢)부터 당송(唐宋)이전까지가 하나의 단계로 볼 수 있으며, 당송부터 명나라이전까지를 하나로 볼 수 있고; 마지막으로는 명나라로 대표되는 명청시대이다. 비록 청나라는 이민족이 중원으로 들어와서 집권한 것이지만, 답습한 것은 모조리 명나라의 제도였다.

 

황인우의 역사관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점이 있다. 그는 명청시기는 중국왕조가 이상하게 성숙된 시기라고 본다. 이러한 성숙은 경제적인 성숙이 아니라, 국가정권통제상에서 그러한 제도하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성숙 및 당시 자급자족으로 쇄국과 정치제도의 후퇴를 맞이한다. 예를 들어, 당송의 역사단계에서는 군권(君權)과 맞서서 균형을 이루던 상권(相權)이 주원장의 손에 의해 그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다. 내각(內閣)은 황제의 비서실이 되어 버린다. 나중에 청나라의 군기처(軍機處)도 그대로 배워서 따라한 것이다. 비서의 업무를 열이면 열 수행했다.

 

이곳에서 말하는 것은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이다. 문화적인 것은 토론하는 것이 비교적 적다. 이외에 <<만명칠십년(晩明七十年)>>이라는 책이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저명한 학자 당덕강(唐德剛)의 <<만청칠십년(晩淸七十年)>>을 본딴 것같지만,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명나라말기의 문화문제이다.

 

명나라의 마지막 70년동안 숭정(崇禎) 황제가 매산(煤山)에서 목매단 것을 제외하면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한때 중흥이 있었고, 그 주요인물이 장거정(張居正)이라는 것이다. 이 말기의 70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비록 중흥부터 시작하더라고, 상대적인 최고조를 지나고 나면, 그 후에 바로 골짜기로 미끄러진다. 당덕강 선생의 <<만청칠십년>>에서 사실 동치중흥(同治中興)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치가 있는 것이다.

 

고대사를 연구하자면, 이러한 중흥이후에 급속히 쇠락하는 단계를 겪게 된다. 많은 왕조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 명청 두왕조는 가장 분명하다. 이 두 왕조는 서로 다른 민족이 통치했지만, 모두 황인우 선생이 말하는 대역사의 동일한 단계에 속한다. 모두 농업문명의 전적제도(典籍制度)가 최고조로 발전한 단계의 산물이다.

 

바로 이런 전적제도가 최고조에 달하므로, 중흥하지만 흥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의 전적과 제도는 명나라에 이르러 큰 변화를 겪는다. 사상적으로는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통지위(正統地位)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된다. 즉, 스스로 유가의 정주학파에 속한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제도측면에서는 주원장이 구제도를 대거 개혁하여, 고도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신하가 나라를 찬탈할 가능성을 뿌리뽑았다. 심지어 외척과 환관과 같은 역대왕조의 암적인 존재조차도, 기본적으로 진정으로 권력을 빼앗을 가능성이 사라졌다. 명나라의 엄당(환관)의 우환이 비록 적지는 않았지만, 황제가 언제든지 권력을 회수할 수 있었다. 엄당은 진정한 권력을 취득할 능력이 없었다. 그저 권력에 빌붙은 자들이었다. 역사가 여기에 이르러, 하나의 왕조가 피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피할 수 있게 되고,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저 한가지 이 성숙한 왕조가 보유하지 못했던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제도의 탄성(신축성)이다. 명나라이전에 정부는 비록 유가를 정통사상으로 하였지만, 유가의 학설은 아주 논리정연하고 잘 정리된 정치철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사람들이 동일한 문구를 가지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1개의 유학을 각자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달랐다. 정주(程朱)의 유학에 대한 해석이 흠정(欽定, 황제가 정한 것)이 된다. 하나의 성숙한 사고의 틀(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을 가지고 유가의 사상을 묶어놓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황권지상의 국가에서, 입국사상은 반드시 불변이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그의 도덕합법성이 존재할 수 있다. 이때, 바로 제도 혹은 사상의 탄성이 뿌리뽑히는 것이다.

 

장거정의 집권과 사후의 처지는 바로 현실정치에서의 통권달변(通權達變)을 설명한다. 어떻게 탄력잃은 틀 속에서 몸부림치는가의 과정을 보여준다. 생전에 어린 임금의 역량을 빌어 개혁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의 이 개혁의 합법성은 전통적인 군권에서 오는 외에 다른 어떤 원천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혀 탄성이 없는 제도는 양극단이 서로 끌어당긴 결과이다. 청나라황제는 스스로 나라를 얻는데 가장 바르고, 역대왕조중 그 어느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고 자랑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만일 나라를 얻는데 바르다는 점을 얘기하자면, 명나라가 얘기하는 것이 보다 자격이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황제위가 제2대로 넘어갔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연왕 주체가 조카의 천하를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이어서 자신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깨끗이 제거해버린다. 충효를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던 시대에 이는 그 이후의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병인(病因)이 된다. 왜냐하면 당시 최대의 이데올로기라면, 황권승계가 가장 크다. 만일 명성조 영락제의 권력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기본신조를 어기는 것이 된다. 여기서부터, 제창되는 것과 실제의 현실이 분열되는 것이다.

 

비록 국가권력의 승계가 정통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는 별론으로 하고, 명나라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가장 기개를 강조한 나라이다. 많은 선비들이 그런 통일적인 이데올로기에 교화되어 강령적인 동물이 되어 버렸다. 머리가 달아오르면, 정치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그들의 책임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관직에 나아가려면 이런 사고방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정에서 제창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정권은 그래도 황제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 선비들을 교육시키는 교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조정에서 이런 괴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조정은 스스로 제창하는 이데올로기로 교육시킨 관료들은 항상 조정의 방침에 반대한다. 비록 정장(廷杖)이라는 천고에 없던 대신을 모욕주는 제도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자기 스스로 표면적으로 요구한 바에 따라 훈련시켰던 관리들이 분명히 이해하도록 만들 수가 없었다. 최소한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왜 얻어맞아야 하는지를 몰랐다

 

정장과 기개는 명나라정치의 양극을 구성한다. 양극의 중간에서 절총하는 것은 후반으로 갈수록 적어진다. 장거정이 개혁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했지만, 그가 장악한 것은 그저 정장과 권변(權變)이었다. 즉, 최종적인 이데올로기를 장악하지 못했다. 그 시대에 이런 정신분열의 증상은 이미 심각해 졌고,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숭정제가 아마도 이런 말을 했던 것같다. 국가에서 선비를 300년이나 길렀다고. 명나라는 확실히 선비를 길렀다. 과거시험과 교육은 아주 완비되어 있었던 제도이다. 다만 이런 정신분열의 증상이 한번 발작하면, 300년간 선비를 기른 것이 결국은 300년간 기개를 꺾은 것으로 바뀌고 만다. 마지막에는 환관만이 숭정제를 따라 죽는다. 숭정제가 마지막으로 대신들이 나를 망쳤다고 하면서 임금은 망국의 임금이 아닌데, 신하가 망국의 신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300년간 기르고도 죽이고, 300년간 때렸는데, 너는 그래도 곁에 누군가가 남아있을 것으로 바란단 말인가? 청나라황제는 아마도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지 않은 것같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선비를 계속하여 노비로 써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원망할 것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