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중은우시 2009. 7. 23. 17:49

글: 복정민(卜正民)

 

사람들이활동을 할 때면 서로간에 연락을 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이전의 기나긴 역사시간동안 중국은 서신(書信)의 세계였다. 사람들은 서신을 통하여 서로간에 안부를 묻고, 장사를 하며, 새로운 사상과 계속 변화하는 관념을 교류했다. 서신은 오늘날의 학술간행물과 같은 역할을 했다. 당시 사람들의 서신왕래는 아주 빈번했다. 명나라때 학자이자 지도전문가인 나홍선(羅洪先, 1504-1564)은 그와 왕기(王畿, 1498-1583)간의 장기간의 통신왕래에 대하여, "구년간 서찰왕복이 대단했다"고 표현했다. 명나라후기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은 서신왕래의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킨다. 첫째는 명사들이 그들의 서신을 출판해서, 새로운 사상과 관념을 교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상업적인 우편서비스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서신은 도대체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아주 적다. 어떤 때는 집안노비가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거리의 사람들에게 사람을 일부러 보내어 서신을 전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원거리의 서신은 모두 그 방향으로 가는 여행자에게 부탁해서 보냈다. 당연히 가장 좋기는 친구이고, 전문적으로 서신을 운반하는 사람을 보내지는 않는다. 약간의 비용을 들여서 서신을 왕래하는 상인이나 공무를 집행하는 하급관리, 역졸 혹은 관청의 심부름꾼들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규정에 따르면, 관청의 심부름꾼이나 역졸은 사인의 서신을 휴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대운하에서 관청에서 사용하는 배에도 약간의 개인물품을 끼워넣어서 운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청의 역참제도도 마찬가지로 개인서신을 운반해주었다. 아래의 두 가지 예에서 보듯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서신이 목적지까지 도달하도록 확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예는 작자의 가족이 보존하고 있는 편지의 원본에서 찾았다.

 

장신원(庄臣元)은 절강 북부의 상업도시 남심진의 한 강남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1603년 그는 40일의 여정을 거쳐 북경으로 가 진사시험에 참가한다. 다음 해에 그는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을 얻는다. 오래지 않아 모친이 사망하여 고향으로 가서 시묘를 한다. 그의 내용이 잡다한 글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거기에는 1603년 여름에서 1605년 여름까지 북경에 있는 동안 아들에게 보낸 서신이 있다.

 

이들 서신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서신의 왕래는 장씨가 바라는 것처럼 시간에 맞추어 수신인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장원신이 북경에서 보낸 첫번째 서신은 1603년 육월 십오일에 썼다. 서신에서 그는 숭문문밖에 있는 아미타불사에 머무른다고 썼고, 답신은 오충건의 집에 있는 장집사에게 보내어 전해달라고 하라고 했다. 구월 십사일의 서신에서는 그가 이미 팔월 이십육일에 아들이 칠월 이십이일에 보낸 서신(서신이 북경에 도착하는데 36일이 걸렸다)을 받았다고 말한다. 곧이어 십월 십사일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아들에게 이미 장집사에게 부탁하여 구월 십사일의 서신을 보냈는데, 받아봤는지를 물어본다. 그해 겨울, 서신의 왕래속도는 돌연 느려진다. 오랫동안 장원신은 집에서 온 서신을 받아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세 통을 한꺼번에 받는다. 이 세통은 각각 구월 십구일, 십일월 십일과 십이월 이십칠일에 쓴 것이었다. 이후 속도는 다시 느려진다. 그가 1604년 육월 이일의 서신에서는 걱정스럽게 묻는다. 왜 십이월 이십칠일의 서신이후에 다시는 집안에서 오는 서신을 받아보지 못하느냐고. 11일후, 그는 다시 한번 집에 보내는 서신에서, 그의 네 명의 고향사람들은 모두 서신을 받아보았는데, 그 혼자만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집안에 보낸 서신은 육월 이십사일에 북경으로 오는 친구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이것은 오월 이십구일(29일의 시간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이 장집사는 보기에 오충건의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의 업무는 주인(혹은 주인과 같은 고향사람)을 위하여 서신왕래를 담당하는 것같다. 아마도 서신은 장집사가 여행하는 상인들에게 부탁하여 보냈던 것같다. 비록 이 점을 장씨가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원신은 장집사 이외에 다른 서신왕래경로를 알아본 적이 있고, 그중 최소 한번은 그의 동료의 노비를 통하여 고향에 보낸 적이 있다. 서신을 보내준 사람과는 북경에 돌아온 후 장원신이 3 내지 5전의 은자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이것은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는 또한 여러번 당부한다. 서신을 절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가져가게 하지는 말라고. 유감스러운 것은 장씨는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인지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저 우연히 만나는 사람을 말하는가? 여행하는 상인을 말하는가? 관청심부름꾼을 말하는가? 아니면 상업적인 서신전달꾼을 말하는가?

 

더욱 유명한 서광계(徐光啓, 1562-1633)는 북경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가 상해의 집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는 명나라때 통신업이 좀 더 발달했다는 상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위에서 장원신은 매 서신의 날짜를 가지고 서신의 수발상황을 파악했다. 그와는 달리, 서광계와 아들은 모든 서신을 연도별로 일련번호를 매겨서 언제든지 어느 서신을 받았고, 어느 서신을 못받았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그는 1607년 봄에 집에 보낸 서신에서, "이십삼호도 도착했다. 작년에는 이십칠호만 못받았다." 1615년(혹은 아마도 1616년) 여름에 그는 이렇게 썼다: "작년의 서신과 금년 사호이전의 서신은 모두 북경에 도착했다. 다만 삼월이후는 받지 못했다." 1616년 십일월 이십일, 그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관인의 집안사람이 돌아가는데 십구호 서신을 보냈으니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서신전달을 부탁받은 사람에 대하여 그는 그저 친구의 노비라고만 적었다. 장원신처럼 전문적으로 서신수발을 처리해주는 집사가 없었으므로, 그는 운에 따라 누군가 마침 남방으로 가면 대신 가지고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광계의 서신은 장원신의 것처럼 규칙적이지 않았고, 시간도 정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서광계는 1616년 육월 이십칠일의 서신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시때때로 글을 써서 보내달라."

 

서신에서 서광계는 또한 물품을 같이 보낸다고 언급하고 있다. 서신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는 아들이 상해의 농장에서 부쳐주는 양식과 기타 물품으로 생활했다. 일찌기 1606년 가을에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내년봄에도 배로 쌀과 잡곡을 부쳐달라" 1617년봄에 그는 다시 재촉한다: "집안에서 물길로 보낸 것이 어떤 것이냐? 누구에게 맡겼느냐?" 그는 선박운송이 안전한지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어서 이렇게 쓴다: "어떻게 전부 써보내지 않느냐. 탄식할 만하다" 이러하기는 했지만, 선박운송으로 상해에서 북경으로 양식을 보내서 일가족이 생활하는데는 충분했다. 그리고 북경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쌌다. 비록 몇냥의은자로 운송을 부탁해야 했지만.

 

서씨는 여러번 상업채널을 통하여 돈을 부친 것을 언급했다. 이것은 그가 은가격파동에 민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611년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회표(會票)도 역시 도착했다. 은가격이 좋지 않아서 아직 가서 찾지 않았다." 이를 보면 1616에 화폐시장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서신에서 이렇게도 적었다: "오늘 표를 되돌려보냈다. 찾아서 석교백의 집안에 써라" 명나라때 원거리 화폐송금비용은 거리의 원근에 따라 결정되었다.  몇전에서 몇냥까지 서로 달랐다. 명나라후기에 화폐송금서비스는 북경과 강남의 도시간에 존재했다. 그리고 다른 곳도 포함될 것이다.

 

1660년대가 되어서, 북경에서 개인우편을 보내는 첫번째 상업기구가 전문적인 호칭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보방(報坊)"이다. 이는 신문발행기구이다. 곧이어 분명히 상업적인 신문출판과 상업적인 서신전달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보방은 신문을 편집할 뿐아니라, 이들 신문을 각 성으로 보내어 판매까지 했기 때문이다. 서신의 전달과 신문의 정기발행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후 전문적으로 우편을 처리하는 "표호(票號)"가 나타난다. 이전에도 상업적 우편서비스는 일찌감치 있었던 것같다. 그러나 모두 다른 상업서비스의 부속서비스였다.

 

번화한 강남지역에, 상업적 우편서비스가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1660년대이다. 1663년 항주에서 출판된 우수서신집에는 출판상의 원고모집공고가 들어 있다: "독자들이 서신집 속집을 출판하고자 하는 모 서방에 잘 쓴 서신들을 보내주기 바람"이라고 되어 있다. 나중에 이 서신속집은 1667-1668년간에 순조롭게 출판된다. 1668년의 속집에서는 한 여화가가 한 여성 시집편집인에게 보낸 서신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공동의 취미를 가지고 시작을 서로 부쳐주자고 한다. 1672년에 출판된 시가집의 서언에는 유사하게 우편으로 모은 원고들이다. 편집자는 두번째 시가집을 출판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독자들에게 그들의 시원고를 태주의 그의 집으로 보내주거나 혹은 양주, 북경, 남경의 4개 주소중 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6년후, 두번째 시가집이 출판된다. 또 다른 출판은 1689년 상업적인 여성시가집중에서 편집자들이 6곳의 먼 성지역의 작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들이 먼 곳에서 시원고를 출판사로 보내준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강남의 상업우편네트워크는 서신전달뿐아니라, 소포도 처리했다. 양주에 사는 한 1588년(만력16년)의 진사는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절강(아마도 항주일 것이다)의 한 친구가 한 상자의 가득한 글을 보내와서 대신 보관해달라고 했다. 그는 상자를 구석에 놓아두었다. 상자안에 담겨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절강의 친구가 10년후에 세상을 떠난 후에 양주에 살던 그는 책상자를 선박운송을 통하여 죽은 사람의 아들에게 부쳤다. 죽은 자의 아들이 상자를 열어보니, 상자 바닥에 500냥의 은자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기작가는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항주로 부쳤는지는 적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와 그의 독자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던 것같다. 그들은 분명히 상자를 어떻게 양주에서 항주로 선박을 통해 보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오늘날의 우리만 제대로 몰라서 궁금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