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영봉(劉永峰)
태평천국의 여병은 외롭게 천왕부(天王府)를 지켰으며, 역사상 가장 무정한 희생자가 되었다. 1864년, 천경성이 함락되며, 대규모의 청나라병사들이 천왕부로 밀려올 때, 이들 여병은 스스로 불을 붙여 자살했다.
1856년 9월의 어느 날, 3천명의 정예사병은 천왕 홍수전의 거처를 포위했다. 이 부대의 지휘고는 "북왕" 위창휘였다. 하늘이 점점 밝아오며, 3천병사는 궁문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더불어 일군의 부녀들이 손에 대도장모(大刀長矛)를 쥐고 고함을 지르며 천왕부에서 밀고나왔다.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3천의 병사들과 생사의 결전을 벌였다. 이들은 천왕부를 수비하던 천왕부의 광서(廣西) 부녀들이었다. 홍수전의 최초의 여신도들이고, 태평천국 최초의 여병들이었다.
태평천국의 전성기에 이들 정치, 군사, 종교의 여러색채를 지닌 정권은 일찌기 10여만의 여병을 보유하였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여성군사조직이었다.
여영(女營)의 흥기
태평천국 여병의 탄생은 1851년 1월 11일부터이다. 이날, 홍수전은 의거를 일으키면서, 다섯조의 군기(軍紀)를 발표하는데, 그중 두번째 조항이 "별남행여행(別男行女行, 남자와 여자를 따로 나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여영(女營)이 설립된다. 이것이 태평천국여병의 최초기록이다.
이는 중국역사상 고증가능한 첫번째 여병조직이다. 그렇다면, 여병은 왜 빈곤하고 몽매한 광서 자형산에서 탄생하였을까? 이당시 이미 4만여명으로 늘어난 태평천국의 무리중에서 그녀들은 또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1844년, 풍운산(馮雲山)이 광서 북부로 온다. 그는 이미 "유교교리와 영향의 중심에서 먼 곳, 인구가 조밀한 도시에서 먼 곳, 가장 비옥한 농토와 권세있는 지주에서 먼 곳"으로 간 것이다. 깊은 산 속에서 생활하는 탄노(炭佬), 광공, 농민, 촌부들이 가장 먼저 홍수전과 풍운산의 배상제교 신자가 된다.
이들 무리중에는 대량의 여신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이 무장세력을 이끌고 청나라조정에 무장항쟁을 시작할 때, 그녀들은 중국역사상 들어본 적이 없는 신분 - 여병의 신분을 갖는다. 이들은 대부분 객가(客家)의 여인들이다. 전족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들은 전투에서 용맹함이 남자들에게 못지 않았다. 일찌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은 객가부녀들에게 쓴 맛을 본 적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 용맹한 객가부녀들을 "대각만파(大脚蠻婆)"라고 불렀다.
광서32년(1906년) <<조국부녀계위인전>>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 가운에 <<홍선교소전(洪宣嬌小傳)>>이라는 것이 있다. 비록 소설의 성격이 강했지만, 그 가운데 우리는 당시 '대각만파'의 용맹함을 느낄 수 있다. 그 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홍선교라는 여인은 군대내에서 소왕낭(蕭王娘, 소왕의 부인), 천왕자(天王姉, 천왕의 누나)이라고 불리웠다. 그녀는 서왕 소조귀의 처이다. 나이는 서른이 되지 않았고, 미녀였으며, 아주 용감했다. 여병 수백명이 싸움을 잘하여 공을 많이 세웠다. 소왕낭과 여병은 모두 광서출신이고, 홍수전교를 깊이 받들었으며, 매번 싸울 때마다 천제에 절을 했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출전해서, 쌍도를 휘두렀으며, 칼끝은 흰눈이 내리는 듯했다. 붉은 말을 타고, 안장에는 흰색 으로 둘렀으며, 몸은 희고, 옷과 치마는 푸르고 흰색이었다. 전장터에서는 맨팔을 휘두르며, 여군을 지휘했다. 옷에서 패옥소리가 나니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과 같았다. 전쟁이 한창때에 이르면 소왕낭은 겉옷을 벗고 말을 몰아서 청나라군대로 뛰어들었다. 안에는 행황색 비단옷을 입고, 칼솜씨가 뛰어났으며, 옷색깔이 은은히 드러나 군대가 놀라서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여, 태평천국의 부녀는 외부에 하나의 신선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당시, 일부 외국인들은 그녀들이 말을 타거나 행군하는데, 대범하게 도로를 가는 것을 보고, "이는 사상유례없던 새로운 현상이다. 우리로 하여금 국내의 생활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만일 이번 혁명으로 지금까지 부녀는 집밖나들이를 할 수 없다는 구습을 깨트릴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신현상의 출현은 태평천국이 제창한 '남녀평등'의 교의와도 관계가 있다. 홍수전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모두 평등하다" "천하의 많은 남자들은 모두 형제이고, 천하의 모든 여자들은 모두 자매이다. 어찌 이쪽 저쪽을 가를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태평천국의 참신한 새로운 사회모습속에서 모든 것은 구생활과 결별하였고, 이전에 가정과 남자들의 노예로 살던 부녀들이 남자와 함께 행군하고 싸우는 여병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전에 여자들이 노예처럼 일하던 가정제도도 태평천국의 율령으로 분쇄되었다.
그리하여, 금전(金田)부터, 태평천국에는 남녀를 격리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홍수전은 "남자는 남행이 있고, 여자는 여행이 있다. 서로 섞여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바로 이것때문에 영안성에서 홍수전은 모세의 "십계"를 본떠서, 천조(天條)를 반포한 바 있다. 그는, "남자와 여자가 간음하는 자는 변괴(變怪)라고 하며, 천조를 가장 크게 범한 것이다" "사음(邪淫)이 악의 우두머리이다. 변괴로 요괴게 되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그러나, 홍수전은 새로운 천국사회를 창조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군법으로 묶어놓은 각종 규율과 계율은 태평천국영수들의 황음한 생활과 서로 배치되지 않고 병존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홍수전은 금전을 떠날 때 16명의 비(妃)가 있었다; 1년후에 영안을 떠날 때에는 그의 비빈이 이미 36명에 달하였다.
여관(女館)설립
청교도와 같은 금욕제도, 남녀분영정책 내지 홍수전의 "천국"을 위하여 설계한 모든 규칙은 이 혼동되고 모순된 단체내에서 존재할 뿐아니라 태평군이 지나간 도시에도 존재했다.
1852년 5월, 그들은 이강을 건너, 고운하를 따라 전주(全州)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장강유역에 진입하게 된다; 이해 6월 12일, 사의도의 패전을 겪은 후, 그들은 광서로 나가 호남 도주를 점령한다. 상남(호남남부)에서, 그들은 개략 5만의 신병을 모집한다. 그들은 예외없이 남녀분영제도를 따른다. 이는 금전, 영안의 연장선이다. 1853년 1월 12일, 그들은 장강의 중요도시 무창(武昌)을 점령한다.
태평군이 무창에 도착할 때, 청나라조정의 아문을 무너지고, 함풍의 연호도 태평천국의 이름으로 대체된다. 국호의 변화와 비교하여, 사회제도의 변혁은 더욱 급진적이었다.
홍수전이 개혁은 무창에서뿐아니라, 태평천국의 부녀제도에도 변화가 있게 된다. 이 곳에서, 전기의 여영은 여관으로 변경된다. 천국의 여병은 신앙상의 추종자들 뿐아니라, 무력으로 정복당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무한삼진은 혼란에 빠졌고, 태평군은 무창성에 진입힌 후 여관을 설치하고, 성안의 부녀는 모두 무창화항의 여관으로 들어가게 했다. 늦게 들어가는 자는 채찍과 몽둥이로 몰아서 집어넣었다.
동시에, 남녀격리의 제도도 엄격히 집행된다. 남편이 처를 만나거나 아들이 모친을 만나는 것도 그저 문에 서서 할 수밖에 없었고, 몇 걸음 떨어져서 진행했고, 목소리를 높여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원래의 재산제도, 옛날의 가정제도와 온정이 흐르던 인륜의 정과 같이 구사회제도를 지탱해주던 것들은 모두 차가운 쇳덩어리같은 군사통치하에서 모조리 와해되고 파괴되어버린다.
무창뿐만이 아니었다. 이해 3월 20일, 태평군이 남경성을 점령한 후, 더욱 큰 규모로 여관을 만든다. 계속 따라온 수천의 광서부녀, 수천의 호남부녀, 그리고 억지로 끌려온 3만의 호북부녀에 새로 정복한 10만의 남경부녀까지 하나하나 여관을 형성했다. 금전부터 무한까지, "대각만파"는 천국여병의 주체가 된다. 무한에서 남경까지 이들 무리는 계속 새로 가입되어 섞이게 되면서 등급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광서에서 온 "대각만파"는 가장 경력이 많고, 가장 충성심이 강한 '옛형제"였다. 그리하여 여관내의 여관(女官)이 된다. 그녀들의 아래에는 자원하고 믿을만한 호남부녀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대량의 끌려온 호남, 강남부녀가 있었다.
나중에 홍수전이 규정을 하나 만드는데 태평천국이 공식적으로 이런 등급제도를 묵인한 것을 드러내준다. 1854년 여름수확기에 홍수전, 양수청은 호북, 호남, 안휘의 각지로 식량을 조달하러 떠났던 대군이 돌아온다. 돌아온 사람들이 보고하기를 "태평군이 가는 곳에는 미곡이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홍수전, 양수청은 여관에서 광동광서, 호남여자는 1인당 쌀 6냥, 호북과 다른 성의 여자에게는 쌀 3냥을 배급하도록 한다.
왜 태평천국에서 한편으로 "사람은 평등하다" 천하의 여자는 모두 자매이다라는 교의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각지의 여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일찌감치 전주를 점령한 기간동안 풍운산의 전사로 그들은 전주의 성을 모조리 도륙했고, 수만의 남녀를 다 죽여 버렸다. 그런데, 무창, 남경을 점령한 후에, 그들은 성내의 만주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러한 처참한 살륙을 전개한 배후에는 어떤 성격적인 비극이 숨어있는 것일까?
홍수전은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는 동시에, 구세계와는 일도양단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태평천국에서 남녀분관제도, "성고(聖庫)"제도, <<천조전무제도>> 내지 전족금지, 축첩금지, 축비(蓄婢)금지, 아편금지등 각종 규정은 모두 세상을 뒤바꾸겠다는 색체를 띄고 있다. 이와 동시에 '우리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다'라는 인간관계가 나타나게 된다.
태평천국에서 세계는 신도와 요얼(妖孼)의 둘로 구분했고, 중간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을 따르지 않고 옛날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유교의 유민들은 그들이 보기에 모두 "요(妖)"였다. 혁명자들의 내부에서는 '형제'이고 '자매'와 같지만, "요"는 무시해도 되고 살륙해도 되는 대상이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무한에서 수천의 동자들이 칼을 들고 수십만의 무한남자를 핍박하여 배에 오르게 하였고, 수천명의 "대각만파"도 집을 불지르고, 사람을 화형시키는등의 방식으로 핍박하여 수만의 무한여성을 끌고 왔다. 이들의 핍박은 황소, 이사성과 달랐다. 그들에게 잡혀온 사람들도 선명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들은 마찬가지로 칼과 창을 휘두르며 남경으로 뛰어들었다.
분관(分館) 다툼
의문의 여지없이 남녀분관을 비롯한 각종의 조치는 모두 유례없는 신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냐는 점이다. 일찌기 천경에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가 양수청에게 언제나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을 것인지를 물었다. 양수청은 이렇게 말했다: "천경을 차지하고 정권을 잡으면 이 금령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태평군이 금릉으로 들어올 때, 양수청은 이전의 이 약속을 잊은 것같다. 그리하여 여관설립의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광서의거에 가담했던 무리들 중에서 불만이 터져나왔고, 의론이 분분했다.
불만은 광서의 구부대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여관에서 지위가 비천한 호북, 강남부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계속되는 제약과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면서, '천국'은 그녀들에게는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은 악몽이었다. 성안에 붙잡혀 있는 남녀들 중에서 언제든지 도망치려고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당시에는 홍수전의 아들인 유천왕(幼天王)조차고 모친이나 자매들과 만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홍수전이 조정일을 보러 나간 틈을 타서 몰래 모친과 자매들과 만나볼 수 있었다. 천왕의 아들도 이러할진대, 전체 천경은 당연히 어느 한곳 가정의 행복이나 온난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천국"의 우두머리들은 널리 비빈을 뽑고 처첩의 수가 넘쳤다. 황당한 것은 홍수전은 일찌기, <<다처조(多妻詔)>>를 내려서, 천국의 주민, 해외의 번중은 모두 처가 많은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서로 규정하기를 "동왕서왕은 각각 11명을 취하고, 남왕부터 예왕까지는 각가가 6명씩 취하고, 고급관리는 3명, 중급은 2명, 저급은 1명을 취하며, 홍수전은 88명을 두었다.
이렇게 하여 남녀분리제도는 태평천국의 사업이 전성기일 때 아주 난감한 지경에 처한다. 그리하여 1855년, 천경에 들어간지 1년반이 지나서, 홍수전은 마침내 여관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와 함께 이루어진 것은 남녀결혼을 허용하는 조서였고, 매관(媒館)을 두어 책임지게 했다. 여관을 해산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들 부녀들을 태평천국의 크고작은 관리들에게 하사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수비병사와 후궁들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천여명의 광서여병으로 하여금 천왕부를 지키게 하였다.
이때, 홍수전의 궁전은 아주 호화스러웠다. 나이강의 <<태평천국사>>에는 이렇게 천조궁전을 묘사하고 있다: "천조궁전....사면이 황색담장이고, 높이는 2장정도이며, 두께는 4척이고, 내외 이중으로 되어 있다. 바깥은 태양성(太陽城)이라고 부르고, 안은 금룡성(金龍城)이라고 불렀다. 태양성은 남쪽으로 문이 있는데, 진신영광문(眞神榮光門)이라고 불렀다. 문안의 좌우에는 고취정(鼓吹亭)이 있었는데, 높이가 담장 밖에까지 보였고, 유리기와를 덮었다. 네 기둥은 오색룡이 웅크리고, 머리를 들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1856년 9월, 남경의 여름기운이 사라질 때, 위창휘는 겹겹이 이 아름다운 천왕부를 포위했다.
소멸
여병들이 미친듯이 방어하는 것은 그녀들의 신앙이 아직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여관제도가 사라지면서 이들 마지막 천국여병은 더 이상 신규병력이 들어오지 않는 고인 물과 같았다.
나중에 그녀들은 고독하게 천왕부를 지켰다. 정복, 도살, 내분을 거친 후에도, 그녀들은 여전히 천국의 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무정한 역사의 희생자가 된다. 1864년에 청나라병사들이 천왕부로 밀려올 때, 이들 여병들은 종교적인 열광으로 스스로 불을 붙여 자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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