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 인새(印璽)의 향방

중은우시 2009. 7. 10. 01:20

글: 위목색자(韋木色子)

 

태평천국시기에 천왕 홍수전(洪秀全)은 3개의 인새(印璽, 도장)를 새겼다: 금새(金璽), 옥새(玉璽), 목새(木璽). 이는 무상의 권위를 상징했다. 그중 금새, 옥새는 중요한 조서를 내릴 때 찍었고, 가볍게 사용되지 않았다.

 

금새(金璽): 이미 훼손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홍수전의 금새는 무게가 100여냥에 이르는 황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위에는 "태평천국만세금새(太平天國萬歲金璽)"라는 8개의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방에는 각종의 정교한 도안과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금새의 지위는 천왕의 세 도장중에서도 가장 높은 권위를 자랑했음을 알 수 있다.

 

1864년 7월, 천경(남경)이 함락될 때, 태평천국의 군인들은 금새를 휴대하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강서의 간왕 홍인헌에게 건네주고자 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망을 뚫지못하고, 금새는 결국 상군(湘軍)의 우두머리이며 당시 청나라조정의 양강총독의 지위에 있던 증국번의 손에 들어간다.

 

천왕의 금새를 얻자, 증국번은 무가지보를 얻은 것처럼 여겼고, 즉시 금새를 사람을 시켜 북경으로 보낸다. 양궁황태후와 동치제에게 보낸 것이다. 이후, 금새는 자금성의 군기처에 보관되어 있었다. 군기처의 수비는 삼엄했고, 친왕 귀족이거나 대신이거나를 불문하고 군기처에 재직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문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1년후, 이 금새는 기적처럼 사라진다. 전체 청나라조정은 깜짝 놀라게 된다.

 

양궁황태후(서태후와 동태후)는 즉시 수석군기대신이며 공친왕인 혁흔을 보내어 이 사건을 처리하게 한다. 2개월간이나 대대적으로 조사했지만 전혀 단서를 잡지 못했다. 결국, 혁흔은 사람을 북경성안의 각 악세사리점포, 골동품점포등에 보내어 조사를 하게 한다. 마침내 동사(東四) 부근의 한 악세사리점포에서 단서를 찾아낸다: 원래 군기장경 살륭아(薩隆阿)가 금새를 훔쳐내어, 악세사리점포에 부탁하여 금새를 녹여 금조(金條) 10개로 만들게 하였는데, 금조 1개는 무게가 약 11냥이었다. 이를 찾아냈을 때, 이미 2개의 금조는 살륭아가 써버렸다. 나머지 8개는 청나라조정에서 몰수했다. 일찌기 진귀한 보물이었던 태평천국의 금새는 이렇게 사라졌다.

 

그리하여 금새의 모양이 어떠했는지, 도장의 글씨는 어떠했는지는 이제 알 도리가 없어졌다.

 

옥새(玉璽): 중국역사박물관에 보관중

 

이 "옥새"는 청백옥(靑白玉)으로 만들었다. 인새의 인뉴(印紐) 양측에는 모두 정교한 단봉조양(丹鳳朝陽, 붉은 봉황이 태양을 바라보다)의 도안이 새겨져 있다. 옥새의 사방에는 쌍룡쌍봉(雙龍雙鳳)이 새겨져 있으며, 옥새면의 가로세로는 각각 20센티미터이다. 청나라황제의 그 어느 옥새보다도 크다.

 

"태평천보(太平天寶)"의 위에는 상서롭고 이로움을 표시하는 말 11구 44자가 새겨져 있다. 이 도장의 글은 어떻게 잃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오랫동안 태평천국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3가지 이상의 읽는 방법을 내놓고 있는데, 아직 그 어느 것도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사흥요(謝興堯) 선생은 일찌기 <<태평천국의 사회정치사상>>이라는 책에서 고증을 통하여 "태평천보"의 도장글은 천지회의 "요평(腰平)"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요평"의 격식에 따르면, 도장글을 읽는 방법은 "태평천보, 천부상제, 은화집목, 천왕홍일, 천형기독, 구세유주, 주왕흥독, 팔위만세, 진주귀복, 영정건곤, 영석천록(太平天寶, 天父上帝, 恩和輯睦, 天王洪日, 天兄基督, 救世幼主, 主王興篤, 八位萬歲, 眞主貴福, 永定乾坤, 永錫天祿)"

 

나이강(羅爾綱) 선생은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읽으면, 태평천국의 존비차서(尊卑次序)가 불합리하다고 본다. "천왕홍일"을 "천형기독"의 왼쪽에 두었는데, 이는 '천부' '천형' '천왕'의 위계순서를 어긴 것이라고 본다. 홍수전이 옥새에서 자신을 공공연히 '천형'의 위에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리고 본다.

 

홍콩중문대학의 간(簡) 교수는 '천부', '천형', '천왕'의 위계순서에 착안하여, 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왜 "은화집목"을 "팔위만세"의 뒤에 두는지에 대하여는 간선생도 해석을 하지 않았다. 천왕 홍수전의 옥새의 글을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이 옥새에 대하여 지금까지 학자들은 증국번의 위조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주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옥새의 크기가 관련사료에 기재된 "팔촌견방(八寸見方)"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육촌견방" 밖에 되지 않는다. 둘째, 천왕 홍수전은 친히 태평천국이라는 국명을 상제천국(上帝天國)으로 바꾸었고, 정식으로 명을 내려 도장들을 모두 조서의 내용에 따라 바꾸도록 지시했는데, 이 옥새는 여전히 '태평옥새'라는 명칭을 쓰고 있어서, 천왕의 조서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셋째, 천왕 홍수전의 금새와 "지준(旨準)"인은 모두 도장의 옆면 도안에 있는 용이 머리는 아래를 향하고, 꼬리는 위로 향했다. 그러나, 이 옥새는 완전히 반대로 용의 머리가 위를 향하고, 꼬리는 아래를 향하고 있다. 넷째, 금새의 "천(天)"자는 모두 엄격하게 천왕조서에서의 피휘규정에 따라, 위쪽의 횡획이 아래의 횡핵보다 길다. 그런데, 이 옥새의 "천"자는 글자가 어지럽다. 어떤 '천'자는 위획이 아래획보다 확실히 짧다.

 

중국의 저명한 사학자인 나이강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당시 태평군이 청나라군과 격렬하게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옥새의 인기(印記)는 손쉽게 적군에 의하여 위조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천왕의 새인을 찍는 조서이건 아니면 다른 여러 왕들의 명령이건 모두 새인을 찍는 동시에 또 다른 기밀암호를 추가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반드시 친필로 쓸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암호와 필적은 도장보다는 위조하기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이수성(李秀成)이 그의 자술서인 "초항십요(招降十要)"에서 제7조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중당(증국번)께서 글을 하나 나에게 써달라. 그리하여 내 글과 함께 보내십시오. 글에 도장을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도장을 찍은 것은 우리 군영에서 여러 장수들이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중당이 스스로 위조하여 그들을 유인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천조에서 문서를 작성해서 도장을 찍을 때 내가 친필로 써서 암호를 적지 않으면, 장수들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수성의 말에 따르면, 태평천국의 내부, 특히 군대에서는 왕래문건의 경우에 '친필과 암호'가 문건에 찍는 도장보다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왕인새"의 진실성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의심을 사왔다. 하물며 청나라군대가 천경을 함락시킬 때, 성내에서 대거 약탈과 도살이 있었고, 천왕부를 불에 태워버렸다. 그러므로, "천왕옥새"가 전쟁의 불길 속에서 훼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하는 측에서는 유력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천왕옥새"는 확실히 전통옥새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도장역사상 획기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목새(木璽): 남경태평천국역사박물관에 보관중

 

목새는 삼촌견방(三寸見方)이며, 4면에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중간에는 "지준(旨準)"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목새의 도장면의 도안내용은 금새와 비슷하고, 도장글은 아주 통속적이고 알아보기 쉬우면서 장중하다. 태평천국역사전문가인 나이강 선생은 진품으로 감정했다.

 

목새는 천왕 홍수전이 일상적으로 올린 글을 비준할 때 쓰던 것이다. 현존하는 태평천국에서 정식으로 반포한 문헌인 <<천조서(天條書)>>, <<예제(禮制)>>등 10여종의 글의 첫머리에 모두 이 목새의 '지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그러나 목새원본은 1864년 천경함락후에 지금까지 행방불명이었다. 1975년에 남경 첨원로 173호에 거주하는 주민이 옛집을 보수하다가 지붕천장의 천화판 옆에서 거의 먼지를 뒤집어써서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목새를 발견한다. 1982년 문화재일제조사때 주민은 그 목새를 내놓는다. 나중에 저명한 사학자 나이강 선생의 감정을 거쳐, 이 목새는 100여년전에 잃어버린 천왕 홍수전의 목새라고 인정된다.

 

나이강 선생이 추가로 조사하여 추단한 바에 따르면, 목새를 발견한 남경 첨원로 173호는 일찌기 태평천국후기의 관청인 "산서아(刪書衙)"의 소재지였다. 이 목새는 아마도 1864년 천경이 함락될 때, "산서아"의 관리가 청나라군대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부러 천정의 천화판위에 숨겨두었고, 그 바람에 후세에 남아있게 된 것일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