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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은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 18.

글: 독차일인(獨此一人)

 

곧 구정이 된다.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어릴 때 TV드라마를 보면 항상 이렇게 묻기를 좋아했다: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가요?" 이걸 알고 나서 드라마를 보면 아주 보기 쉬웠다. 중간에 한두 편을 빼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어쨌든 거기서 착한 사람은 착한 일만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일만 저지르기 때문이다. 이 원칙만 알고나면 드라마의 어느 편부터 보기 시작하더라도, 이해하지못할 이유가 없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이렇게 물었다. 그랬더니 부친이 불만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이나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생각해보니 맞다. 그래서 그 후에는 그렇게 묻지 않게 되었다.

 

아쉽게도 이처럼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분은 여전히 역사연구분야에서 완강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역사연구의 황당한 논리를 주도하고 있다. 중국역사에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만 있다. 이 논리에서 추론해보면,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악에 반대하는 것은 바로 절대적인 선이 된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된다는 것과 유사하다. 소위 태평천국혁명운동의 결론도 이에 다름 아니다. 나는 <<왜 항전사를 학습해야하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대당을 반대한 것이 안사의 난이다, 홍수전(洪秀全)과 양수청(楊秀淸)이 반대한 것은 부패한 대청왕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홍양(洪楊)의 난이 아니라 태평천국혁명운동인 것이다. 청왕조가 나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반대한 것은 좋은 것이다. 이런 황당한 논리는 태평천국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

 

태평천국의 탄생은 청나라말기 서방자본의 침입으로 인하여 국내산업에서 대량의 실업인구가 발생한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 재난과 청나라정부의 부실한 구제조치가 겹치면서, 홍양 두 사람이 기회를 틈타서 일어날 수 있었다. 태평천국사건에 관하여, 당시의 사람들중에는 좋게 말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그에 대해 칭찬이 자자하다. 이런 기괴한 현상은 중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소위 "일체의 역사는 당대사(當代史)"로 보기 때문이다. 좌경사학자들의 사전 속에는 모든 농민반란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태평천국은 당연히 혁명운동이 된다. 그 이치대로라면, 국민당은 자산계급을 대표한다. 홍수전,양수청에게 좋게 얘기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홍수전이 광동사람이고, 손중산(孫中山)과 같은 고향사람이다. 손중산 본인도 그가 혁명을 이끌게 된 것은 홍수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홍수전 본인은 손중산의 선구자인 것이다. 손중산이 무심코 내뱉은 말때문에 홍수전은 국민당에서 인정을 받는다. 국민당내에서도 홍수전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사에게 아부하는 것일 뿐이다. 부하들이 윗사람의 뜻에 따라 연극을 하는 것이니 엄정한 역사학의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근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하나의 정권을 혁명정권으로 보느냐 아니냐는 먼저 토지문제에 대한 태도를 보아야 한다. 하나의 정권이 정상적인지 아닌지를 따지자면, 그들의 지식인에 대한 태도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두가지 표준을 가지고 소위 태평천국을 한번 검토해보자.

 

태평천국은 중국역사상 첫번째의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정권이었다.

 

중국의 현재 중학교과서에서는 태평천국이 중국근대의 첫번째 농민정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태평천국이 중국역사상 첫번째 정교합일의 정권이라는 점이다. 공전(空前)일 뿐아니라 아마도 절후(絶後)일 것이다. 즉,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태평천국의 건국이론기초는 홍수전의 배상제교(拜上帝敎)와 양수청의 천부하범(天父下凡)이다. 홍수전의 이론은 사람은 모두 상제(上帝)가 필요하고, 상제를 신앙해야 한다. 홍수전은 바로 상제의 아들이다. 모두 그를 옹호해야 한다. 양수청은 바로 천부하범(하느님 아버지가 땅에 내려옴)의 화신이다. 매번 양수청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그는 비정상적인 모양을 가정하면서, 바로 천부가 그의 몸에 붙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명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권은 정권과 교권이 합일되어 있다. 종교는 정권을 위하여 이론기초를 제공하고, 정권은 종교에 현실권력이 보장을 제공한다. 중국역사상, 이런 경우는 없었다. 진시황때부터, 중국의 정권은 법가학설, 도가학설, 유가학설을 차례로 정치지도사상으로 삼았다. 한번도 황제본인이 학설창시자인 적은 없었다. 이것이 처음이다. 둘째는, 중국의 봉건정권은 비록 한가지 정치지도사상에 고정되어 있더라도, 이 하나의 사상은 종교의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다른 사상이 민간에 존재하는것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유가, 불가, 도가는 항상 병렬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정권은 다른 사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각한 반지성적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경서(經書)를 훼손시키고, 사람들에게 홍수전이 만든 많은 선전소책자만을 읽도록 강요하였다. 지식인들은 자연히 첫번째 타격대상이 된다. 이런 세뇌행위는 비록 중국역대왕조때에도 명시적으로 혹은 암암리에 존재하여 왔지만, 이처럼 직접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진행한 것은 역시 처음이다. 셋째는 모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은 금욕을 주장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임의로 동거할 수 없었고, 남관(男館)과 여관(女館)으로 나누어 거주시켰다. 태평천국의 군대가 도착하는 곳에서 사병들의 강간행위가 발생하면 즉시 참수했다. 그러나, 고위층에 대하여 여인은 거의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홍수전 본인은 처가 88명이었다. 함풍제보다 70여명이 더 많았다. 여인만 무제한으로 공급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자원 예를 들면 토목공사등도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양수청이 타는 가마는 수교(水轎)이다. 가마의 벽에는 물을 가득 채워서, 여름에 들어가면 아주 시원했다. 상(床)의 사방에는 각종 기진이보를 가득 채웠다. 홍수전이 타는 것은 83명이 드는 가마이다. 함풍제의 가마보다 훨씬 컸다. 홍수전과 부인의 관계도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었다. 노예와 노예주의 관계였다. 그는 이들 노예같은 부인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500수의 시를 썼다. 그걸 한번 읽어보면 관계를 분명히 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태평천국을 숭상하고 있다. 태평천국이 무슨 남녀평등이어서, 봉건사회보다 진보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다른 것은 말하지 않겠다. 단 한마디만 하겠다: 태평천국에서 남녀는 확실히 평등하게 함께 노예가 되었다. 시골무지렁이가 황제가 되면 사실 모두 이렇다. 안믿는다고? 현재 졸부가 된 메이라오반(탄광주)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태평천국의 토지제도를 보자. 이 측면에서도 무슨 혁신은 없다. 그들은 이자성의 "틈왕을 맞이하자, 틈왕이 오면 양식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헛소리뿐인 구호와 마찬가지로, <<천조전무제도>>는 그저 이론에 불과하다. 한번도 현실에서 실행된 적이 없다. 이와 반대로, 진옥성과 이수성은 안휘, 강서 등지에서 대청황조의 세수(稅收)제도와 마찬가지의 제도를 실행했다. 그리고 수도 남경에서 홍수전이 실행한 것은 공유제였다. 사유재산은 허용하지 않았다. 모두 재산을 국가에 바쳐야 하는데, 이 국가는 당연히 홍수전을 말한다. 많은 사학자들이 태평천국의 공유제에 진보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아. 맞다. 사실 중국은 역사상 계속하여 공유제였다. 천하의 재산은 모두 국가의 것이었다.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이 국가는 당연히 황제를 말한다. 태평천국이 토지제도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혁신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농민반란과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운동은 살인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었다. 중국유사이래로, 미친듯한 살륙은 농민반란의 필수과목이다. 태평천국의 살륙에는 민족갈등도 포함되어 있다. 매번 하나의 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그곳의 만주귀족은 반드시 온가족이 참살당했다. 당연히, 청나라입관초기에 만주족들도 많은 한족을 죽였다. 현재 수십만의 만주족을 죽인다고 해도 그다지 과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많은 한족 지식인들도 배상제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태평천국은 수십년간 지속되었는데, 중국에서는 3000여만이 죽었다. 항일전쟁과 비슷한 수준의 인명피해를 보였다.

 

다시 홍수전 본인의 반란 동기를 보자. 그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화가나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어릴때 같이 놀던 풍운산(馮雲山)과 함께 여러 곳에서 사람을 끌어모아, 적합한 시기를 잡아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동기는 천하백성을 고통에서 구해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좋은 생활을 즐기고 황제노릇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가 남경을 수도로 정한 것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태평천국과 대청왕조간의 14년간의 투쟁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전략적 의미에서, 태평천국은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었다. 전략적인 배치라는 것은 아예 말할 것도 없다. 홍수전이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그저 임봉상과 이개방 두 사람으로 하여금 2만명을 이끌고 북상하게 하였을 뿐이다. 이게 장난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나중에 청나라의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에 의하여 남경이 겹겹이 포위된다. 홍수전의 수도는 항항 만청의 창끝에 있었다. 천하를 얻으려면, 사회각계각층의 역량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태평천국이 누구의 지지를 받았는가? 증국번, 이홍장은 지식인의 대표이다. 그들은 태평천국의 반대편에 섰다. 와드(Fredrick Townsend Ward, 華爾)와 고든(Charles.George. Gorden, 戈登)은 서양인의 대표인데, 그들도 반대표를 던졌다. 여기에 태평천국은 천하를 얻기도 전에 자기의 내부인들에게 칼을 들이대어 원기를 크게 상했다.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태평천국이 성공했더라면, 중국은 그저 절름발이 황제를 하나 더 두었을 뿐일 것이다. 태평천국의 구조로 보면, 그 정권은 만청정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몇 단계 수준이 떨어진다. 만청정부의 봉건전제는 2000여년의 발전을 거쳐 자연발육형이다. 태평천국의 봉건전제는 시골무지렁이들이 임시로 만든 것이어서 수준이 형편없었다. 태평천국과 만청정부의 투쟁은 개가 개를 서로 물고 물어뜯는 투쟁일 분이다. 쌍방은 모두 좋은 것들이 아니다.

 

모두 만청정부가 부패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한 마디 물어보자. 만청이 그렇게 부패했다면, 태평천국은 왜 그것을 소멸시키지 못했는가? 답은 오직 하나이다: 태평천국은 더욱 부패했다. 역사는 공평하다. 만일 태평천국운동의 성격을 규정하자면, 나는 한마디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난장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