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옥새와 관련하여 전국각지에서 사기사건이 연속하여 발생하고 있다. 1864년 7월 18일 청나라 군대는 태평천국의 도성 천경(강소성 남경시)을 함락시켰고, 대량의 태평천국과 관련한 문헌은 전란중에 불에 타버렸다. 천왕 홍수전의 천왕옥새는 이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
중국역사박물관안에 진열된 '천왕옥새'는 무수한 전란을 거쳐 기적적으로 보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천왕옥새'를 둘러싼 진위문제는 사학계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최고지도자였다. 역대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도 무상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을 원했다. 그러나, 역대제왕들과 달랐던 점은, 천왕홍수전은 금(金), 옥(玉), 목(木)으로 된 세 개의 서로 다른 천왕옥새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홍수전의 금인(金印)은 백여냥이 되는 황금으로 만든 것인데 위에 "태평천국만세금새(太平天國萬歲金璽)라고 여덟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사방에는 정교한 도안과 꽃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금인의 지위는 천왕의 세 개의 옥새중에서 가장 높았고 평상시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1864년 7월, 천경성이 함락될 때, 태평천국의 장사들은 금새를 지니고 포위를 뚫으려 애썼다. 강서에 있던 간왕(干王) 홍인헌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망돌파에 실패하고, 금새는 상군(湘軍)의 두목이자 청나라조정의 양강총독이었던 증국번의 손에 들어간다.
천왕의 금새를 손에 넣자, 증국번은 귀한 보물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여, 즉시 금새를 사람을 시켜 북경으로 보낸다. 그리고 양궁 황태후와 동치제에게 보고한다. 이후 금새는 자금성의 군기처에 보관되어 왔다. 군기처는 방비가 엄밀하여 친왕이나 귀족들 또는 대신들도 군기처에 근무하지 않으면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1년후에 이 금새는 기적처럼 실종되어, 전체 청나라 조정은 한 번 진통을 겪는다.
양궁황태후는 즉시 수석군기대신인 공친왕 혁흔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조사하게 한다. 2개월여의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전혀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혁흔은 북경성내의 금은장신구를 다루는 점포, 골동품상을 뒤졌는데, 마침내 동사(東四) 부근의 한 장신구점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원래 군기장경(軍機章京)인 사롱아(薩隆兒)가 금인을 훔쳐내서, 장신구점에 녹여서 금조(金條) 10개로 녹여달라고 하였고, 하나당 무게가 11냥이었다. 조사가 끝났을 때는 이미 2개의 금조는 사롱아에 의하여 팔려버렸고, 나머지 8개는 청나라 조정이 회수하였다. 진귀한 태평천국의 천왕금새는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천왕 홍수전의 목새는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천왕 홍수전의 목새는 3촌(寸)으로 네모났으며, 사방에 용무늬를 새겼다고 한다. 중간에는 "지준(旨準)"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목새의 도장면은 도안내용은 금새와 비슷했고, 도장문구도 통속적이며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고, 장중하고 대범했다.
목새는 천왕 홍수전이 일상적으로 신하들의 상소문을 결재할 때 쓰였다. 현존하는 태평천국의 정식반포한 문헌인 <<천조서(天條書)>>, <<예제(禮制)>>등의 십여종의 문서의 첫번째 페이지에, 모두 이 목새의 "지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그러나 목새의 원본은 1864년 천경함락후 계속하여 행방을 알 수 없다.
1975년이 되어서, 남경 첨원로(瞻園路) 173번지에 거주하는 주민이 옛 집을 수리하다가, 지붕천장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나무도장을 발견한다. 1982년 문화재조사시 주민은 목새를 정부에 기증했다. 중국의 저명한 사학가인 나이강 선생의 감정을 거쳐 이 목새가 바로 100여년간 잃어버렸던 홍수전의 목새라고 확인하였다.
나이강 선생의 조사와 추단에 따르면, 목새를 발견한 원래의 남경 첨원로 173번지는 일찌기 태평천국의 관료기구인 "책서아(柵書衙)"의 소재지이다. 이 목새는 아마도 1864년 천경 함락시에 당시 책서아의 관리가 청나라군대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붕의 천정에 숨겨두어서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본다. 지금 이 도장은 남경태평천국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얘기할 것이 옥새이다. 이 옥새는 청백옥으로 만들었고, 옥새의 손잡이의 양측은 모두 단봉조양(丹鳳朝陽)의 무늬를 하고 있으며, 옥새의 사방은 용두마리, 봉두마리가 새겨져 있다. 길이와 넓이는 모두 20센티미터이며, 청나라때 황제의 어느 옥새보다 크다.
"태평옥새"의 도장에는 11구 44개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인문(印文)은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장기간 태평천국사를 연구한 사람들 사이에는 세 가지 견해로 나뉘며, 아직도 정설이 정립되지 않았다.
첫째, 사흥요(謝興堯) 선생은 <<태평천국사회정치사상>>이라는 책에서 고증하여 말하기를 "태평옥새"의 글은 천지회의 "요평(腰平)"을 본떠 만든 것이다. "요평"의 격식에 따르면 도장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태평옥새, 천부상제, 은화집목, 천왕홍일, 천형기독, 구세유주, 주왕흥독, 팔세만세, 진주귀복, 영정건곤, 영석천록"
둘째, 나이강(羅爾綱) 선생은 만일 이렇게 읽으면 태평천국의 존비차서(尊卑次序)와 맞지 않는다고 본다. '천왕홍일'을 '천형기독'보다 위에 놓으면, 천부(天父), 천형(天兄), 천왕(天王)의 서열을 뒤집는 것이 된다고 본다. 홍수전이 옥새에서 공공연히 자신을 천형 그리스도보다 위에 놓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셋째, 홍콩중문대학 간교수는 천부, 천형, 천왕의 순서에 주의하여 그가 채택한 방식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식이다. 다만, 왜 "은화집녹"이라는 문구를 "팔위만세"보다 뒤에 집어넣었는지는 간선생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천왕 홍수전의 옥새는 읽은 순서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이 옥새에 대하여는 계속하여 학자들이 증국번의 위조품으로 의심하여 왔다. 주요한 이유는 이렇다.
첫째, 옥새의 크기와 관련자료에서 기재한 '팔촌견방(八寸見方)'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육촌견방밖에 되지 않는다.
둘째, 천왕 홍수전은 태평천국을 상제천국으로 개명하여 조서를 반포하였데, 이 때 도장도 모두 이에 맞추어 수정하라고 하였는데, 이 옥새는 여전히 '태평옥새'라는 글자로 되어 있어서, 천왕의 조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셋째, 천왕 홍수전의 금새와 '지준'인은 옥새의 변방에 있는 도안은 용의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꼬리가 위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옥새는 정반대로 용의 머리가 위를 향하고, 꼬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다.
넷째, 금새의 '천(天)'자는 모두 엄격히 천왕조서의 피휘(避諱) 규정에 따라 만들었고, 윗면의 횡획은 아래보다 길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옥새의 "천(天)" 자는 글자가 비교적 난잡하게 쓰여져 있고, 어떤 "천(天)"자는 윗쪽 획이 아랫쪽 획보다 짧다.
저명한 사학자 나이강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당시 태평천국은 청나라 군대와 격렬하게 전투하는 과정에서 옥새의 인기(印記)가 너무 쉽게 위조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천왕의 옥새를 찍은 조서나 다른 왕의 명령의 경우에 도장을 찍는 동시에 비밀암호를 추가하였고, 당사자들이 친필로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암호는 친필은 위조가 도장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수성의 자술서에서도 "투항십요"중의 하나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중당(증국번)에게 요구하여 글을 내릴 때에는 나에게 주어서 나의 글을 쓴 후에 가도록 하였다. 글만 있으면 도장은 믿지 않는다. 지금 도장을 쓰는 자는 내 군영에 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이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중당에 위조하여 그들을 유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천조에서 글에 도작을 찍을 때는 나의 친필과 비밀번호가 없으면 장수들이 따르지 않았다" 이수성의 말에 비추어보면, 태평천국의 내부에 특히 군대에서는 문건이 오고갈 때, 친서밀호(親書密號, 친히 글을 쓰고 비밀번호를 쓴다)가 문건에 찍은 도장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천왕옥새'의 진실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청나라군대가 천경을 함락시킬 때, 일찌기 성내에서 대규모의 도살이 이루어지고 천왕부를 불에 태웠는데, '천왕옥새'가 이러한 과정에서 훼손되었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성을 의심하는 측에서도 유력한 증거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천왕옥새'는 확실히 이전의 전통적인 옥새와는 다르다. 그것은 옥새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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