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락(李樂)
2008년 10월 30일에 발표한 포브스 중국부호랭킹에서 롱즈젠은 작년보다 54위로 내려앉았다. 작년에 그는 랭킹9위였다.
이때 66세된 롱즈젠은 이미 이 랭킹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직면한 것은 호주달러파생상품에 투자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거액의 손실이었다.
"붉은 자본가"이자 전국가부주석인 롱이런(榮毅仁)의 외동아들이자, 일찌기 젊어서는 붉은색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몰고 황포강가를 달리고, 청년시대에는 시골로 내려가 노동을 했던 "귀공자"이고, 일찌감치 '시세의 흐름을 아는 자가 준걸이다"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주변사람들이 그는 적절할 때 고개를 숙일줄 안다고 얘기하는 롱즈젠은 언젠가 이 험난한 강물을 건널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롱즈젠은 강력한 추진력으로 위기를 돌파하는데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철완(鐵腕)식의 인물은 아니다. 그래서 10월 23일, 호주달러파생상품투자로 거액의 손실을 보아 중신태부(CITIC Pacific)이 홍콩에서 사면초가에 빠져 있을 때, 롱즈젠은 간단하게 투자자들에게 보고를 한 후, 바로 북경으로 날아왔고, 중신집단(中信集團, CITIC Group)에 지원을 요청했다.
북경장안가 건국문 동쪽에 자리잡은 중신빌딩(CITIC Building)에 66세의 롱즈젠은 중신집단의 주요 고위층을 만났다. 당시 자리를 함께한 중신집단인사에 따르면, 롱즈젠의 표정은 태연자약�고, 조금도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하나의 잔혹한 현실은 바로, 이것은 거의 20년동안 롱즈젠이 처음으로 실패자의 신분으로 이 빌딩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못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추진력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고, 그저 일이 생기면 그 일을 처리하는 식이었다. 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그는 바로 그 일을 한다." 당시 현장에 있던 그는 중신집단에 오랫동안 봉직했고, 롱즈젠과도 교분이 깊었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롱즈젠이 이 빌딩에서 가장 '득의만면'했던 일은 1996년에 발생한다. 그 해의 겨울, 롱즈젠은 홍콩에서 홀로 북경에 온다. 당시 중신집단 총경리를 맡고 있던 왕쥔(王軍)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왕쥔은 중국정상계에 유명한 철완이고, 명장인 왕전(王震)의 아들이다.
강인한 왕쥔과 부드러운 롱즈젠과의 '만남'은 바로 중신태부의 경영진주식부여에 관한 것이었다. 상술한 중신집단인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중신집단내부에서는 롱즈젠의 이번 북경행의 결과에 낙관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롱즈젠이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롱즈젠이 요구하는 바는 이미 북경에 전달되었다. 낮은 가격으로 경영진에게 중신태부의 주식을 양도하는 것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중신집단 내부의 고위층은 모두 성격이 강인한 왕쥔이 롱즈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최종적으로 왕쥔이 양도협의에 서명을 했고, 25%의 지분, 3.3억주를 롱즈젠을 비롯한 경영진에 매각하는데 동의했고, 그중 2.91억주는 롱즈젠이 차지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잘 몰랐다. 왕쥔 총경리가 어떻게 이런 조항을 비준했는지, 나중에 우리가 듣기로 롱즈젠은 많은 고위층관계를 동원해서 '공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택시점등도 아주 교묘했다. 97년 홍콩주권회복의 대세를 탔고, 주식을 경영진에게 넘겨줌으로써, 중강정부가 홍콩에 대하여 신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었으며, 세계규칙을 인정하는 중국정부라는 점을 보였다. 그 결과로 보면, 롱즈젠의 이 조치는 아주 큰 효과를 냈다.
12년후, 북경으로 지원을 요청하러 온 롱즈젠은 중신집단의 고위층을 방문하는 외에 이미 퇴직한 왕쥔과도 만났다. 다만 두 사람의 만남은 중신빌딩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졌고, 그 내용도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롱즈젠의 후반생은 대부대귀(大富大貴)였다. 다만 이것도 그가 '은인자중'하는 개성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미 환갑을 넘긴 이 노인은 그의 청년기에 귀공자의 생활을 지냈고, 그 다음에는 8년간의 고통스러운 하층노동자생활도 보냈다. 롱즈젠의 부드러움 배후에는 실제로 일관된 은인자중이 있다.
"나의 부친에 따르면, 롱즈젠은 당시 상해의 유명한 '공자'였다. 비록 이미 해방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붉은색 컨버터블 스포트가를 몰고, 국제호텔에 드나들며, 각종 구기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학교스타와 같은 인물이었고, 학교를 대표하여 북경으로 야구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 말을 해준 종내흔은 중금(中金)공사에 근무한다. 그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롱씨가족과 교분이 돈독했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롱즈젠은 청소년기에 이렇게 생활한 것은 당시 공사합영후 원래의 공장주는 일부 주식배당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 다만, 이후 정치풍향이 바뀌면서 롱즈젠은 할 수 없이 다른 부잣집 도련님들과 마찬가지로, 우대받는 생활을 포기하고, 가장 하층의 사회노동자가 된다.
1966년, 롱즈젠은 사천 양산의 이족자치주에서 노동을 하고, 발전소의 건설과 전력망을 건설하는데 참여한다. 그가 당시에 했던 일은 설계, 기획도 아니고 가장 하층에서 케이블을 등에 매고, 돌을 다듬는 등의 체력노동이었다. "당시 함께 갔던 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각종 관계를 동원하여 떠나갔다. 그러나 롱즈젠은 계속 견뎠다. 1972년까지." 종내흔의 말이다.
이후, 롱즈젠의 재산증식은 조용한 가운데 완성되었다. 1978년 여름, 간단한 짐과 통행증을 가지고 36세의 롱즈젠은 집안사람들을 떠나, 처자식과 이별하고 홀로 홍콩에 갔다. 그가 처음 벌어들인 돈은 리스크가 없는 것이었다. 롱씨가족이 원래 홍콩에 설립해둔 방직공장의 주식배당금을 모은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많은 리스크없이 이들 주식배당금을 받은 후에 롱즈젠은 아이카전자공장을 차린다. 그 후에 이 공장에서 나온 이윤을 가지고 미국에서 전자계산기소프트웨어보조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만든다. 나중에 이 회사는 순조롭게 상장하고, 롱즈젠의 재산은 다시 증가한다. 최종적으로 그는 이 회사를 팔아서, 자금을 가지고 홍콩으로 되돌아온다. 이후 몇년이 지나지 않아, 롱즈젠은 중신태부에서의 휘황한 생애를 보낸다.
그때의 그는 아마도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는지 모른다. 상계의 험악함은 마침내 그의 환갑이후에 도래한다. 롱즈젠의 성격으로 봐서는 그저 해결하면 그만이다.
"중신태부가 홍콩에서 매번 규모를 확대할 때마다, 모두 당시의 대륙정계기업계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당시 중신의 홍콩에서의 '내지대표', Red Chip회사라는 지위를 충분히 이용했다. 이것은 그를 많이 도와주었다" 전술한 중신집단의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중신태부의 역사에서 성공적인 하나의 전투는 영국계회사인 캐세이 퍼시픽의 구조조정에 참여한 것이었다. 상술인사에 따르면 캐세이 퍼시픽의 자산규모가 비교적 커서 시장에서는 중신태부의 구조조정이 성공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충분한 현금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하여 롱즈젠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지원을 구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각처럼 순조롭지 못했다. 원래, 중신태부는 모회사인 중신집단이 이번 구조조정에 자금지원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다만, 당시의 중신집단은 업무가 신속히 확장되는 단계여서, 거액의 현금지출에는 상당히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롱즈젠은 아주 과감했다. 중신집단이 대출을 신청한 후 중신태부에 자금지원해줄 것을 제안했고, 친히 나서서 정계와 상계를 설득했다.
겨우 5일의 기간동안 관련부서에서는 롱즈젠의 대출요구를 비준했고, 이 대출금을 중신집단에 내려 보냈으며, 캐세이 퍼시픽항공의 구조조정자금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 5일만에 거액의 자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홍콩상계는 놀라마지 않았고, Red Chip기업의 힘을 다시금 느꼈다. 중신태부와 롱즈젠의 홍콩상계에서의 지위는 이번 일전으로 확고하게 되었다.
당시 롱즈젠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거의 6개월을 분석했다. 캐세이 퍼시픽의 영리전망은 좋고, 경영도 정비되었다. 그리고 우수한 경영진이 있었다. 나는 나의 생각을 북경본사에 보고했고, 과연 5일만에 비준을 얻었다." 1987년의 중국에서 8억홍콩달러의 대출금을 내놓게 한 것에서 롱즈젠은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는자원통합을 잘한다는 인상을 주었고, 이후 수십년의 상계생애에서 이 홍정상인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10월 30일에 공포한 포브스의 중국부호방을 보면, 롱즈젠의 현재 사잔은 44.9억인민폐이다. 작년과 비교하면 84%가 날라갔다.
"비록 나는 이번에 손실이 매우 크지만, 롱즈젠은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전술한 중신집단의 인사가 한 말이다. 어쨌든 한때 중국최고부자였고, 정계상계의 인맥관계외에 수중에는 아직도 12%의 중신태부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캐세이 퍼시픽등 우량회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들은 그가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경제 > 중국의 기업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우근생(牛根生)을 망쳤는가? (0) | 2008.12.16 |
---|---|
명청교체기의 진상(晋商) (0) | 2008.12.10 |
왕용칭(王永慶)의 사망과 포모사 플라스틱의 후계자 (0) | 2008.10.17 |
호윤(胡潤): 중국의 10대 민영기업가 (0) | 2008.10.07 |
UT-Starcom을 떠나는 오응(吳鷹) (0) | 2007.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