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북경문화원
북경은 30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이고, 시기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대략 따지면 약 20여개의 별칭이 있다.
계(薊) :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기원전11세기, 주무왕(周武王)이 상(商)을 무너뜨린 후, 제요(帝堯)의 후손을 계(薊)에 봉하였고, 소공석(召公奭)을 연(燕)에 봉하였다. 또 다른 학설에 의하면 주나라이전에 연나라가 있었는데, 나중에 연이 계를 병합하고, 계성(薊城)을 수도로 삼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북경의 전신이라고 한다.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킨 후, 계현(薊縣)을 설치하니, 그 위치가 지금의 북경성이다.
유주(幽州) : 옛날 구주(九州)의 하나이다. 유주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오는 곳은 <<상서.순전>>이다. "연(燕)을 유주라 한다". 양한, 위, 진, 당나라때 모두 유주를 설치했었다. 그 통치지역은 오늘날의 북경일대이다.
연도(燕都) : 옛날에 연나라의 도성이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전국칠웅 중에 연나라가 있는데, 연산(燕山)에 가까이 있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하며, 그 수도를 "연도"라고 불렀다. 이후 일부 고서적에서는 이를 북경의 별칭으로 썼다. 1980년대에 출판된 북경문사에 관한 간행물이 있는데, 이름이 <<연도>>였다.
일하(日下) : <<진서(晋書)>>에 처음 나타난다. 영천(潁川)은 진나라의 수도인 낙양에 가까이 있어서 옛날에 "일하"라고 불렀다. 나중에 당나라때 시인인 왕발(王勃)이 <<등왕각서>>를 쓸 때, "망장안어일하, 지오회어운간(望長安於日下, 指吳會於雲間)"이라는 문구를 썼는데 바로 이 전고를 이용한 것이다. 이후 "일하"는 나라의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북경의 대명사로 사용된 것은 청나라때 주이존(朱彛尊)이 <<일하구문>>이라고 쓰고, 건륭년간에 책자로 만들어진 <<일하구문고>>등에서 이다.
유도(幽都) : 당나라때 일찌기 유도현(幽都縣)을 설치한 바 있다. 요나라때에는 유도부(幽都府)를 설치한 적이 있는데, 통치지역이 현재의 북경일대이다.
연경(燕京) : 당숙종 건원2년(759년), 사사명은 스스로를 연제(燕帝)라 칭하고, 범양(范陽)을 연경으로 하였다.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연경은 폐지된다. 나중에 북경의 정식명칭은 여러차례 변동이 있었는데, 연경이라는 명칭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최근 백년동안 "연경"은 북경을 가리키는 가장 상용의 별칭이 되었고, 심지어 일부기업의 명칭, 제품의 명칭에까지 이 두 글자는 사용되고 있다.
춘명(春明) : 당나라때부터 기원한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의 정문(正門, 동문임)의 이름은 춘명문(春明門)이었다. 옛 사람들은 동쪽이 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춘명"이라는 단어를 수도의 별칭으로 사용했다. 북경이 수도가 된 후, "춘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청나라때의 손승택의 저서에 <<춘명몽여록>>이 있는데, 그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경성(京城) : 당나라 천보원년(742년)이전에 수도 장안을 경성이라고 불렀다. 이후 경성은 널리 수도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북경이 수도가 된 이후 여러번 경성으로 불린다. 오늘날까지도 북경의 별칭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대명사이다.
남경(南京) : 요나라 회동원년(938년), 원래의 유주는 유도부로 승격되고, 남경으로 불리운다. 연경이라고도 불렀다. 이리하여 요나라의 배도(陪都)가 된다. 당시 요나라의 수도는 상경(上京, 지금의 내몽고 파림좌기 남부)이었다.
연산(燕山) : 북송선화4년(1123년), 송, 금이 연합하여 요나라를 토벌하고, 연경을 점령한다. 송, 금의 화의후, 연경은 북송에 속하고, 연산부(燕山府)를 둔다. 그리하여 연경을 연산이라고도 부른다.
중도(中都) : 북송선화6년(1125년) 금나라가 남침하여, 송나라의 연산부를 점령한다. 금정원원년(1153년)금나라는 연경으로 천도하고, 중도라고 개칭한다. 다스리는 지역은 오늘날 북경의 서남일대이다.
대흥(大興) : 금나라는 연경을 중도로 개칭하는 동시에 대흥부(大興府)를 설치한다. 다스리는 지역은 오늘날 북경의 동남부인데, 지금의 동성구, 숭문구, 조양구 및 대흥구의 동부를 포함한다.
대도(大都) : 원나라때는 금나라의 이궁(離宮, 지금의 북해공원)이었던 자리를 중심으로 새로 성을 쌓는다. 지원9년(1272년)에 대도로 개칭한다. 속칭 원대도(元大都)이다.
한팔리(汗八里) : 원나라때 몽고인들은 대도를 한팔리(칸빠리)라고 불렀다. 몽고어의 뜻은 "칸의 성"이라는 뜻이다. 즉, 칸이 거주하는 도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원나라때 북경을 수도로 정한 후 한팔리라고 부른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에서 대도를 한팔리라고 불렀다.
북평(北平) : 명나라 홍무원년(1368년), 주원장이 원을 멸망시킨 후 북방을 평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원대도를 북평으로 개칭한다.
북경(北京) : 명나라 영락원년(1403년), 명성조 주체(영락제)는 황위를 획득한 후, 그가 연왕으로 있을 때의 봉지인 북평부를 순천부(順天府)로 개칭하고, 북경성(北京城)을 건설하고, 도성을 옮길 준비를 한다. 이때 북경으로 정식 명명된 후 이 이름은 지금까지 600년의 역사를 지니게 된다.
경사(京師) : 명나라 영락18년(1420년) 북경으로 천도한다. 그러면서 경사로 개칭한다. 이후 청나라때까지 이 이름을 쓴다. 경사라는 단어는 <<시경. 대아. 공류>>에 나온다. "경사지야, 어시처처(京師之野, 於時處處)" 나중에 국가의 수도를 경사로 부르게 된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섬서의 봉상(鳳翔)에서는 산을 경(京)이라 부르고, 물을 사(師)라고 부르는데, 주문왕과 주무왕이 이 곳에 도읍을 하였으므로 통칭하여 경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경사는 국가의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북경도 국가의 수도가 된 후에 경사로 불리게 된다.
완평(宛平) : 북경토박이들이 북경을 부르는 칭호인데, 사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명청시기에 완평현이 다스리는 지역은 지금의 북경의 일부분이다. 대체로는 현재의 북경서남부인데, 지금의 서성구, 선무구, 해전구등 일부분과 석경산구, 문두구구와 대흥구의 서부지역이다.
경조(京兆) : 중화민국2년(1913년) 순천부를 폐지하고, 다음 해 경조지방(京兆地方)을 두고, 중앙에 직속시킨다. 그 범위는 지금의 북경 대부분 지역이다. 민국17년에는 경조지방을 폐지하고, 북경을 북평이라고 개칭한다.
북경은 역사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명칭들 이외에도, 진한시대에 북경은 광양군(廣陽郡)의 치소였다; 수나라 대업연간에는 탁군(涿郡)의 치소였다; 당나라 천보연간에는 범양군(范陽郡)의 치소였다; 요나라때는 석진부(析津府)의 치소였다; 명청시대에는 순천부(順天府)의 치소였다. 그리하여, 광양, 탁군, 범양, 석진과 순천부도 북경의 별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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