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청나라 구문제독(九門提督)이 관장한 아홉개의 문

중은우시 2007. 10. 17. 18:15

 

청나라때 구문제독은 북경성을 지키는 위수사령관격이었다. 그렇다면 구문제독이 관장한 아홉개의 문은 각각 무엇일까? 구문(九門)은 동쪽의 동직문(東直門), 조양문(朝陽門), 서쪽의 서직문(西直門), 부성문(阜成門), 북쪽의 덕승문(德勝門), 안정문(安定門), 남쪽의 숭문문(崇文門), 정양문(正陽門, 前門이라고도 부름)과 선무문(宣武門)이었다. 이를 통칭하여 "내구(內九, 내성의 아홉개 문)"라고 불렀다.

 

예전에 구문제독아문(九門提督衙門, 구문제독의 관청)은 숭문문 안에 있었다. 신해혁명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고, 1924년에는 직권이 경사독찰청(京師督察廳)으로 이관되었다.

 

북경성에는 "내구외칠황성사(內九外七皇城四)"라는 말이 있는데, 내성의 아홉개 문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이 아홉개의 문은 각자 용도가 있었다. 북경토박이의 말로하면, "구문주구거(九門走九車, 아홉개의 문은 각각 아홉개의 마차가 다닌다)" 아래에서 하나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조양문: 양거(糧車, 곡식을 실은 마차)가 다녔다.

 

과거에는 철도가 없어서, 남방에서 나는 양식을 북경까지 운송하려면, 대운하를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통혜하를 거쳐 수로로 북경동쪽의 통주(通州)에 이르게 된다. 양식이 통주에 도착한 후 다시 마차에 실어서 북경성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성안으로 들어갈 때 지나는 문이 바로 조양문인 것이다. 그래서, 조양문의 성문위에는 곡식이 그려져 있다. 양식은 조양문을 들어와, 부근의 양창(糧倉, 양식창고)에 보관하게 된다. 현재 조양문안의 지명을 보아도 "녹미창(祿米倉)", "해운창(海運倉)", "신태창(新太倉)"등 당시 양식창고의 명칭이 남아 있다.

 

숭문문: 주거(酒車, 술을 실은 마차)가 다녔다.

 

숭문문은 합덕문(哈德門)이라고도 부른다. 성바깥은 주도(酒道)이다. 당시 좋은 술은 대부분 하북성 탁주(涿州)에서 운송해왔는데, 그러다보니 북경으로 들어갈 때 지나가는 문이 남쪽의 문이 된다. 술을 운반하는 마차는 먼저 외성의 좌안문(左安門)을 지나, 다시 숭문문으로 와서 세금을 납부한다. 청나라때, 경성에서 술을 팔때 내건 깃발에 "남로소주(南路燒酒)"라고 내걸었는데, 그 의미는 바로 숭문문에서 세금을 낸 술이라는 뜻이다. 즉, 불법밀주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청나라 말기의 양류청 년화를 보면 <<추강만도>>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그린 것이 주점깃발인데, "남로"라고 쓰여 있다. 예전에 숭문문바깥에는 동북방향에 쇠거북(鐵龜)이 하나 있었다. 모습은 아주 질박하였는데, 이것은 호성하의 다리 아래에 있는 해안(海眼, 바다로 통하는 구멍)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북경성의 평안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양문: 용거(龍車, 용 즉 황제를 태운 가마)가 다녔다.

 

정양문은 내성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황제전용이다. 황상은 매년 두 번 정양문을 나서는데, 한번은 겨울에 천단(天壇)에 제사지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번은 경칩때 선농단(先農壇)에 농사지으러 가는 것이다. 이 두번의 출행은 모두 정양문을 지나서 나간다. 정양문은 전문(前門)이라고도 부르는데, 1949년 2월 3일 북경이 해방될 때, 인민해방군은 입성식을 이 곳에서 거행했다. "대전문(大前門)"이라는 담배는 이로 인하여 유명해진다.

 

선무문: 수거(囚車, 죄수를 태운 마차)가 다녔다.

 

형장(刑場)이 선무문 바깥의 채시구(菜市口)에 있었기 때문이다. 범인은 형부의 재판을 받은 후 선무문을 통해서 끌려나와 채시구에서 사형을 당했다. 선무문의 성문위에는 3글자가 새겨져 있다. "후회지(後悔遲, 후회해도 늦었다)" 채시구는 북경에서 아주 복잡한 시장이었다. 남방의 각성에서 온 사람들은 노구교를 지나, 광안문으로 들어와서, 다시 북경의 내성으로 들어가려면 대부분 이 문을 이용했다. 이곳은 예전부터 유명한 사형집행장소였다. 채시구에 고정된 형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채시구의 길북쪽에 있는 상점이나 약방의 입구에 감독관이 탁자를 놓으면 바로 그 곳이 형장이다. 송나라말기 원나라초에 4년간 감금되어 있던 송나라의 문천상(文天祥)은 굴복하지 않아서 결국 채시구에서 사형을 당한다. 그는 형장에서 장엄하게 감독관에게 말했다: "내가 송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이제서야 다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 후에 늠름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무술육군자의 하나인 담사동(譚嗣同)도 이곳에서 이렇게 외쳤다: "도적을 죽이고자 마음먹었으나, 하늘을 되돌리지 못했다. 죽을 장소에서 죽게 되었으니, 통쾌하도다. 통쾌하도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형을 당했다.

 

부성문: 매거(煤車, 석탄을 실은 마차)가 다녔다.

 

북경의 서쪽에 있는 문두구(門頭溝)일대는 석탄이 난다. 북경성에서 쓰는 석탄은 전부 그곳에서 캐서 운반한 것이다. 문두구의 석탄이 북경으로 들어오려면, 가장 가까운 문이 바로 부성문이다. 그래서 부성문의 문위에는 매화(梅花)가 그려져 있는데. 매(梅)와 매(煤, 석탄)의 발음이 같음을 이용해서 이곳이 석탄마차가 지나가는 곳임을 교묘하게 표시한 것이다.

 

서직문: 수거(水車, 물을 실은 마차)가 다녔다.

 

서직문의 성문에는 물의 파문을 그려놓았다. 과거의 황제는 성안의 물을 마시지 않았다. 성안의 물은 쓰기 때문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물을 가져다 마셨다. 옥천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물이 달고 맛있을 것같지 않은가. 건륭황제는 일찌기 북경옥천산의 샘물을 천하제일천이라고 이름하였다. 이것은 전설만은 아니다. 현재 과학이 발달하여 사람들은 이곳의 물을 가져가서 감정해봤는데, 역시 잡성분이 적고, 물이 순수했다고 한다.

 

덕승문: 병거(兵車, 군인을 실은 마차)가 다녔다.

 

북방은 성수(星宿)로 봐서 현무(玄武)에 속한다. 현무는 칼과 병사를 관장한다. 그래서 병사를 내보낼 때는 일반적으로 북문으로 나서게 된다. 그리하여 이름도 덕승문이라고 지었다. 덕승문의 동쪽에는 포(砲)를 설치해 두었는데, 이것은 시간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매일 오시에 덕승문과 선무문은 동시에 화포를 쏘았다. 성내의 백성들은 화포소리를 듣고 시간을 맞추었다. 그러나, 북경성사람들은 "선무오포"라는 말은 하지만 "덕승오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선무문에서 사형집행하는 경우에 오시에 많이 하기 때문에 오시의 대포소리가 나면서 목이 떨어지니 아주 유명해져서 그런 말이 남은 것같다. 덕승문에는 그런 이벤트가 없었다. 덕승문의 옹성안에는 비정(碑亭, 비석을 둘러싼 정자)이 있다. 정자 가운데에는 커다란 석비가 있는데, 건륭제가 62세때 지은 어제시를 새겨두었다.

 

안정문: 분거(糞車, 분뇨를 실은 마차)가 다녔다.

 

북경의 속담에 병사들이 출정할 때는 덕승문으로 나가고, 회군할 때는 안정문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팔기군의 병영이 안정문에 있었으므로 회군할 때 이 곳으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안정문으로 드나든 것은 분뇨차였다. 이전에 지단(地壇) 부근은 유명한 분장(糞場)이었다. 사람들이 안정문을 전투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들어온 곳이라고 하는 것은 우아하게 말한 것뿐이다. 취피(臭皮, 냄새나는 가죽)후통을 수벽(受璧)후통으로, 취피창(臭皮廠)후통을 수비(壽比)후통으로, 우제(牛蹄, 소발굽)후통을 유제(留題)후통으로, 분장대원(糞場大院)을 분장대원(奮章大院)으로 바꾼 것과 같은 것이다.

 

동직문: 전와목재거(塼瓦木材車, 벽돌기와목재를 실은 마차)가 다녔다.

 

과거의 벽돌공장은 모두 동직문바깥에 있었다. 남쪽에서 운송해온 목재도 동직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다. 실제로 동직문은 벽돌, 기와, 목재를 실은 마차가 다녔을 뿐아니라, 각양각색의 마차들이 드나들었다. 즉, 동직문은 백성들의 마차가 드나들던 곳이다. 최초의 동직문대가는 사실 현재의 동직문외소가인데, 전체 거리가 3리정도 된다.이곳에는 석판을 깐 길이 있는데, 모두 150여개의 점포가 있었다. 차, 쌀, 기름, 소금, 장, 식초등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이 곳에서 모두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