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악남(岳南)
명십삼릉은 북경의 북쪽에 있는 창평형(昌平縣) 내의 천수산(天壽山) 남쪽 자락에 있다. 북경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능의 면적은 12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며, 빙둘러 명나라때의 13명의 황제가 잠들어 있어 통칭하여 십삼릉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중국의 황제능묘중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명십삼릉의 첫번째 능은 명성조(明成祖) 영락제(永樂帝)의 장릉(長陵)이다. 이 황제는 비록 명나라때 아주 유명하였지만, 봉건적인 황위계승원칙을 무너뜨렸던 인물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황제에 오른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천하를 빼앗았었다. 원래, 명나라의 개국황제인 주원장(朱元璋)의 황태자(皇太子)인 주표(朱標)가 요절했으므로, 부득이 황태손(皇太孫)인 주윤문이 합법적인 후계자가 되었고, 다른 아들들은 각지의 왕으로 봉했다. 태조 주원장이 사망한 후, 황태손인 주윤문이 즉위하니 바로 건문제(建文帝)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고, 북평(북경)을 지키던 연왕 주체가 "청군측(淸君側, 황제 곁의 소인배를 척결한다)"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건문제는 패배하고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연왕은 승리자의 신분으로 황제에 올랐으니, 그가 명나라역사에 이름을 떨친 영락제이다.
정상적인 국가제도와 군신간의 윤리원칙에 따르면, 연왕이 제후된 입장에서 중앙정권에 반항한 것은 대역무도한 일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합법적인 제도하의 건문황제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연왕의 군대에 적극 저항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들은 명나라의 충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문제가 몰락하자, 연왕이 이끄는 측근들이 조정을 장악했고, 연왕은 황제에 올랐다. 이로써 국면은 급전직하로 바뀌게 된다. 명나라는 명나라지만, 연왕의 명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고, 더 이상 건문제의 명나라가 아니었다. 건문제를 모시던 충신들은 자연히 모두 쫓겨나게 되고, 졸지에 명나라에 반항한 '간악'한 인물로 전락한다. 영락제는 부친인 주원장의 성격과 수법을 물려받아 사람을 많이 죽였다. 혈통론에 근거하여 직접 저항에 참가했던 남자들은 혹은 박피(剝皮, 껍질을 벗기다)를 당하고, 혹은 유작(油炸, 기름에 튀기다)을 당하거나, 수자(水煮, 물에 삶다)를 하였으니, 전체 남경성이 울음과 통곡으로 가득찼다. 이와 동시에 반대파의 처자, 자매, 며느리 심지어 외조카, 외조카며느리까지 모조리 기원에 보내어 기녀를 삼았다. 심지어 56세된 할머니까지도 이렇게 했다.
이상의 참혹한 광경이 남경에서 발생했고, 북경에서도 이어졌다. 영락제가 황제가 된 이후, 남경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명나라때 남경고궁의 광장이나, 가까이는 조정의 회랑, 멀리는 우화대에 이르기까지 피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것은 새로 황제가 된 주체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천도를 결심하게 된다. 첫째는 보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보지 않으면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심리도 있을 것이고, 둘째는 원래 주체가 연왕으로써 북경을 여러해 지켜왔으므로 북경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전략요충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수도를 북경으로 옮겨온 것이다. 영락4년(1406년) 북경쪽의 신하들이 명을 받아 장인, 민공을 백만이상을 동원하여 정식으로 북경궁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요즘 관광객들이 북경에 오면 볼 수 있는 고궁, 천단, 태묘(노동인민문화궁)등의 규모가 큰 건축물은 바로 이때부터 차례로 건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영락제가 의식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러한 결단은 객관적으로 후세인들에게 진귀한 물질적인 문화유산을 남기는 결과를 낳았다.
영락5년, 황후인 서씨(徐氏, 개국명장인 서달의 딸)가 사망했다. 주체는 깊이 고려한 다음 남경에 능을 만들어 안장하지 않고, 예부상서와 '강서파(江西派)' 풍수대가인 요균경(廖均卿)등을 북경으로 보내어 '길지'를 찾게 한다. 사람이 죽은 후에 좋은 땅을 찾아 매장하기 위하여, 이 방면의 전문가를 불러 풍수를 살피게 하는 것은 중국에서 일찌감치 성행하였었다. 고대서적인 <<의례(儀禮)>>에 의하면, 장례를 지낼 따는 풍수를 살펴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지에도 두텁고 얇은 것이 있으며, 물에도 깊고 얕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토지가 매장할만한 곳인지를 살펴본 후에 써야 한다" 이 문구로 보면, 당시에 풍수를 보는 것은 주로 지하수의 위치, 지기, 토질등 자연조건이었으며 이는 관목, 시신이 오랜 기간 잘 보존될 수 있는 곳인지를 따지는 것이었고, 후손이 복을 받는지여부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었다. 진한(秦漢)이후에 감여(堪輿), 상택(相宅)이 유행하면서 많은 미신적인 요소가 끼어들게 되었다. 이런 미신적인 색채가 가중되면서, 풍수설을 믿는 사람들은 묘지를 선정하는 좋고 나쁨, 길함과 흉함이 직접 현실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묘지의 풍수가 좋으면 자손후대들이 좋은 운세를 받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악운이 낀다고 믿었고, 심하면 집안과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때 풍수학의 전체적인 이론틀이 형성되었으며, 5대요소가 중요시 되었는데, 바로 용(龍), 혈(穴), 사(沙), 수(水), 향(向)이 그것이다. 이것은 용법, 혈법, 사법, 수법, 향법이라고 불렀다. 각 법들은 모두 자신의 기능과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사법은 매장한 혈을 둘러싼 여러 산을 말하는데, 용이 내려오는 주산에 예속되어, 군신지도(君臣之道)에 비유했다. "사는 신의 도리이다. 머리를 늘으뜨리고 낮게 가야 한다. 멀리는 성곽이고 가까이는 안기이다." 다섯 요소중에서 수법도 아주 중요했다. 그리하여 "이수증혈(以水證穴)", "이사증혈(以沙證穴)", "인형멱혈(因形覓穴)"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의 방대한 풍수가들 중에서 곽박(郭璞)이라는 유명한 인물이 있다. 그는 경전적인 <<장서(葬書)>>라는 책을 썼는데, 책안에서 풍수에 대하여 신비를 더해주었다. 책에서는 "삼년심룡, 십년점혈(三年尋龍, 十年點穴, 삼년이 걸려 용을 찾아내고, 십년이 걸려 혈을 찾아낸다. 여기서 용은 형국을 말하고 혈은 묘지의 구체적인 매장장소를 말한다)"이라는 말이 있다. 이로써 묘자리를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묘사했다. 그리고 "혈이라는 것은 산과 물이 서로 만나고, 음과 양이 서로 융합하며, 정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고도 썼다. 그리고 묘혈이 되려면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등의 조건을 갖추어야만 최고의 길지가 된다고 했다. 곽박이 말하는 것은 신비롭고 현묘한 내용이 많아 일반인들이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일부 과학적인 요소도 있어 모조리 미신이라고 하여 버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곽박의 책에서 일부 신비로운 요소들을 버리고 전체적인 면에서 본다면 사실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침산면수(枕山面水), 즉, 뒤로는 산봉우리가 있고, 앞으로는 평야가 펼쳐진 시야가 탁트인 곳이 좋다는 것이다. 이 조건은 말하기는 쉽지만, 진정으로 해내기는 쉽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영락제의 명을 받아 서황후를 위하여 '길지'를 찾아나선 요균경등의 사람들은 북경의 사방을 2년간 속속들이 찾아다녔서야 겨우 후보지 몇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강서의 요씨집안은 중국역사상 유명한 풍수가족이다. 조상때로부터 전래되어 내려오기를 천년이다. 이들의 명망은 실로 적지 않았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당대의 풍수가인 요균경등이 제일 먼저 찾아낸 장소는 도가영(屠家營)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의 성이 주(朱, zhu)씨여서 돼지를 가리키는 저(猪, zhu)와 발음이 같았다. 황제는 돼지가 일단 도가영(屠家營, 도가는 도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에 들어간다면 목을 내밀고 칼을 받아야 하므로 별로 좋을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동의하지 않았다. 또다른 후보지는 창평의 서남쪽에 있는 양산각(羊山脚)의 아래였다. 양(羊)과 돼지(猪)는 서로 편안하게 살수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그 뒤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 '낭아욕(狼兒峪)' 이었다. 돼지의 곁에 이리(狼)가 있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곳도 채택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북경서쪽의 연가대(燕家臺)였다. 영락제는 연가(燕家, yanjia)의 발음이 안가(晏駕, yanjia, 황제가 사망하다)와 발음이 같다고 하여 역시 채택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요균경이 북경서쪽의 담자사(潭柘寺)의 지형을 그려서 영락제에게 보여주었는데, 영락제는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산들 사이의 땅이 좁아서 후손이 발전할 여지가 없다고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락7년이 되어서야 요균경등은 다시 북경 창평현의 황토령(黃土嶺) 아래에서 좋은 자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영락제가 친히 와보고는 마음에 들어서 바로 결정해 버린다. 그리고 황토령(黃土嶺)을 만수산(萬壽山)이라고 개명하고, 만수산의 아래에 능묘를 조성하니 이것이 바로 장릉이다. 이후 자손들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황제위에 오르면 모두 이 곳에 능을 지었다. 숭정제까지 모두 13개의 황제릉이 건설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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