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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옛날 북경의 동부서귀(東富西貴)

by 중은우시 2007. 6. 26.

북경에는 예로부터 "동부서귀(東富西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북경의 동쪽에는 부자들이 살고, 서쪽에는 고관(귀족)들이 산다는 말이다. 북경의 "동부서귀"라는 속담은 역사적으로 북경의 특수한 구역문화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옛날 북경성의 상업경제, 정치문화의 분포에 대한 기본적인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동부서귀"라는 말이 나온 시기와, 가리키는 구역이 어디인지,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예로부터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했었다.

 

첫째 견해는 "내성의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이라는 설이다. "동부서귀"라는 말은 청나라말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가리키는 지역과 의미에 대하여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었다. 현재 알려진 문헌자료를 보면, 최초로 "동부서귀"를 해석한 자료는 바로 청나라말기의 만주족학자인 진균(震鈞)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천지우문(天咫偶聞)>>의 권10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경사(京師, 역시 수도인 북경을 가리킴)에는 속담에 '동부서귀'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귀인들이 주로 서성에 살고, 창고는 모두 동성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풍서우(東風西雨)'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동묘에서 시장을 열때는 바람이 많이 불고, 서묘에서 시장을 열때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즉 부귀한 사람들이 모두 동성에 살기를 좋아하고, 비바람도 역시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진균의 주장에 대하여 약간 더 후기인 청나라말기의 몽고족 관료인 숭이(崇彛)도 역시 유사한 기술을 하고 있다. 그의 <<도함이래조야잡기(道咸以來朝野雜記)>>라는 글에서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경성이 '동부서귀'라고 말하는데 유래가 오래 되었다. 이는 동성에는 큰 집이 많고, 서성에는 왕부가 많다는 의미이다. 실은 그렇지 않다. 동성에 왕공부가 적지 않고, 서성은 현재 길거리가 황량하다" 이 뒤로 숭이는 도광,함풍제이래로 동성에 위치한 27곳과 서성에 위치한 20곳의 청나라관료의 저택을 열거하면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둘째는 "숭문문(崇文門), 선무문(宣武門) 바깥"이라는 설이다. 위에 언급한 진균, 숭이의 견해이외에 "동부서귀"에 대하여 또 다른 견해는 주로 중화민국시대의 3명의 학자들의 필기에서 나타난다. 각각 나돈융(羅惇)의 <<빈퇴수필(賓退隨筆)>>, 하인호(夏仁虎)의 <<구경쇄기(舊京記)>>, 서가(徐珂)의 <<청�류초(淸稗類)>>가 그것이다.

 

<<빈퇴수필>>에는 "도성중에 '동부서귀'라는 속담이 있는데, 관리들은 주로 정양문동쪽과 숭문문바깥에 있고, 화려한 저택들은 경조 즉 선무문밖에 주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구경쇄기>> 권8에서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옛날, 한족관리로서 집을 하사받거나 고위관료들은 모두 외성에 살았는데, 주로 선무문바깥에 살았다. 토착부호는 주로 숭문문밖에 살았다. 그래서 '동부서귀'라는 말이 나았다. 선비들이 글을 지을 때, '선남(宣南, 선무문 남쪽)'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청패류초. 서역류>>에도 유사하게 기재하고 있다.

 

이 세개의 글에서는 '동부서귀'에 대한 해석이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지역각도에서 보면 모두 외성북부의 숭문문바깥과 선무문바깥을 지칭한다고 본다. 인원구성에 있어서는 상업에 종사하는 경영자들과 한족이 주체인 관료들이다. 시대로 보면 모두 청나라때를 의미한다.

 

북경이 신속히 발전하고 확장하고 있으므로, 지금은 '동', '서'를 얘기하면 새롭게 해석할 지도 모르겠다. 즉, 북경의 현재의 배치로 보면, 지리위치적으로 서부는 '석경산구'를 얘기하고, 동부는 '조양구'를 얘기할 것이다. 확실히, 석경산구에는 고위관료, 고위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조양구에는 외국인, 신흥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남빈북천(南貧北賤)이라는 말도 같이 전해온다. 즉, 남쪽에는 가난한 사람이 살고, 북쪽에는 신분이 천한 사람이 산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