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의 질녀(姪女, 조카딸)이고, 유명한 여간첩 천도방자(川島芳子)의 친여동생이다.
십칠거거(十七格格)
1918년, 김묵옥은 당시 일본조계지역인 여순에서 태어났다. 이 때 그녀의 부친인 청나라의 8대세습친왕중의 하나인 십대 숙친왕인 애신각라.선기(善耆)는 이미 동북쪽으로 도망쳐온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선기는 21명의 아들과 17명의 딸을 두었다. 그는 가장 어린 거거(格格, 만주족의 귀족딸)는 이름은 현기(顯琦)라고 지었으며, 다른 이름으로 김묵옥이라고 지었다. 1922년, 김묵옥의 부모는 차례로 사망했고, 그녀는 그녀의 어린 언니와 함께 셋째언니에 의하여 길러졌다. 여순항구의 건너편에 지어진 호화로운 집에서 그녀는 걱정없지만 적막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비록 도망쳐다니기는 했지만, 왕실의 생활과 방식은 오랜동안 바뀌지 않았고, 왕부의 모든 법도에 대하여 김목옥의 오빠, 언니들은 무조건 준수했다. 그러나, 오빠, 언니들의 입장에서 막내인 김묵옥은 다른 형제언니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렸다. 그래서 그녀는 교만하고 선량하나 반역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다른 언니들은 섰을 때나 앉았을 때나 법도에 따라서 하였지만,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했고, 조그만치의 법도도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언니들은 그녀를 "혁명아"라고 불렀다. 일본유학때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볼 때, 다른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고 웃지 않는데, 그녀는 재미있는 광경이 나오면 크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그녀의 조카들과 언니들은 그녀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언니 천도방자
천도방자를 얘기하면 제일 먼저 그녀를 민족반역자, 간첩, 역사의 죄인등의 단어를 생각한다. 그러나, 김묵옥의 생각에는 그녀는 여전히 자기의 언니이고, 이런 관계로 인하여 그녀의 일생에 여러가지 악운을 끼쳤지만, 그녀의 기억속에 천도방자는 예쁘고 친절한 언니이다.
김묵옥과 천도방자(김벽휘)의 모친은 모두 선기의 네번째 측비이다. 김묵옥은 어려서부터 자기에게는 총명하고 예쁜 언니가 일본에 보내어졌다는 것을 들었다. 1927년, 정치혼인의 수단으로 김벽휘는 일본양부의 명을 받아 여순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몽고 파포차포장군의 아들인 간주이차포와 결혼한다. 당시 9살이던 김묵옥은 처음으로 이 언니를 보았다. 비록 함께 생활해보지는 않았지만, 천도방자는 자기보다 십여세 어린 여동생을 매우 아꼈다. 천도방자의 결혼후 한동안 지금의 장춘에서 거주했고, 당시 김묵옥은 장춘의 신경고등여고에 다녔다. 천도방자는 할일이 없을 때면 여동생을 데리고 교외로 놀러갔고, 공을 차거나 춤을 추었고, 김묵옥에게 화장하는 법과 옷입는 법을 가르켰다.
집안의 오빠들은 금방 이 일을 발견했다. 김묵옥과 천도방자의 접촉이 많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오빠들은 1934년 김묵옥과 그녀의 작은 언니를 동경으로 보냈다. 김묵옥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천도방자와 헤어질 때, 천도방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었다.
말썽꾸러기 학생
1934년, 김묵옥은 그녀의 작은 언니와 함께 일본황족학원인 동경여자학습원 고등부에서 배웠다. 이 일본황족귀족학교안에서, 김묵옥은 청왕조의 황실종친과 일본황실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생활했다. 그 중에는 현재 일본천황의 고모와 많은 일본 대형재벌집단의 후예들도 있었다. 그러나 천성이 활발하고 반역적인 김묵옥은 이 복잡한 황실예절학교안에서 여전히 개구장이 근성을 고치지 못했고, 학교안에서 뭔가를 금지하면 그녀는 꼭 하곤 하였다. 선생들이 골치아파하는 말썽꾼이었다.
한번은, 김묵옥이 책에서 나폴레옹이 깃털펜으로 글을 쓰는 장면을 보았다. 그래서 스스로 깃털펜을 만들려고 했다. 당시 학교에는 작은 동물원이 있었는데, 안에는 공작을 한 쌍 기르고 있었다. 그녀는 공작털을 뽑아서 펜으로 하려고 했다. "비스듬히 자르고, 다시 구멍을 내면, 바로 펜이 될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 점심때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동물원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 새장속에 손을 뻗어, 정말로 공작털을 뽑아냈다. 결과적으로 수업에 들어갔을 때 깃털이 선생에게 발각되었다. 수업이 끝난 후 혼이 났다. 그녀는 빨리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교사실에 들어가기 전에 손수건을 물로 적셔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선생이 어느 정도 말을 했을 때, 그녀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렸다. 자연히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직업여성
김묵옥은 동경여자학습원을 졸업한 후, 동경여자대학에서 영문을 배웠다. 1941년, 진주만기습사건이 폭발했다. 일본의 모든 외국인 교사는 고국으로 돌아갔고, 일본 국내의 물자도 갈수록 부족했다.
1942년말, 김묵옥은 북경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북경에서 장기거주한 것이다. 이때부터 88세까지, 김목옥은 그 때는 질식할 것같았다고 말한다.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할 것이 없어서, 답답해 죽을 뻔했다. 왕부정을 하루에 몇번을 왔다갔다 했다" 그녀는 스스로 사방을 돌아다니며 취재하는 여기자가 되고 싶었다. 아니면 가수나 배우가 되고 싶었다. 왕부의 어르신들은 그녀의 생각을 듣고는 놀라자빠졌다. 왕부의 거거가 어찌 얼굴을 드러내고 직업을 가진 여성이 될 수 있는가? 나중에 그녀는 가족들을 속이고 직업을 찾아냈다. 한 일본인이 연 종방회사는 그녀를 고문으로 초청했다. 월급도 많았고, 근무할 필요도 없었다. "하루는 내가 회사를 가는데, 모두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사람들이 예방주사를 맞으러 가는 줄 알았다. 당시에는 자주 각종 예방주사를 맞았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하면서 '주사맞으러 갑니까'라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웃으며 '김소저. 지금 5시입니다. 우리 퇴근합니다'". 그 때의 사진에서 그녀는 진짜 직업여성같았다. 아주 유행이던 파마머리에, 눈썹은 가늘고, 치파오를 입고 있으며 약간 뚱뚱했다. 아주 기분좋은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리도 다른 한 장의 사진은 19세 생일때의 것이다. 치파오를 입고, 남자같이 머리를 짧게 깍은 모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이렇게 짧게 깍은 것은 놀기 편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 때 그녀는 말타기와 테니스를 종아했는데, 그 때 아주 유행하던 것이었다.
중책을 맡다.
1948년가을, 국민당이 곧 망할 것으로 보였다. 일부 사회의 명사들과 청나라의 귀족들은 북경성을 떠나기 시작했다. 큰오빠는 급히 일본 처를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그후, 다시 물건을 수습해서 홍콩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김묵옥은 오빠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여러해동안의 전란을 겪은 후에 그녀는 북경이 나중에 어떻게 변하는지를 꼭 보고 싶었다. 마침내, 오빠는 갔다.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100위안의 돈과 큰오빠의 네 아이, 둘째 오빠의 두 아이와 큰 오빠의 늙은 보모와 보모의 딸이었다. 아홉 식구 집안 살림을 맡는 중책이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사회경험도 없는 그녀에게 떨어졌다.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김묵옥은 손만 내밀면 옷과 밥을 누가 내주는 생활을 해왔다. 돈에 대한 개념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녀는 집안의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피아노, 카페트, 쇼파, 가죽옷, 유성기등등. 시장가격을 몰랐으므로, 옷 한무더기를 한 벌값도 안되는 가격에 팔았다. 옛날의 십칠거거는 해군병사들에게 옷을 뜨게질해주었다. 삼일에 한 벌을 뜨개질 했지만, 아홉 식구들의 찬거리를 사는데도 부족했다. 그녀는 세탁소도 열었고, 아주 좋은 비누를 썼다. 비누를 사는 가격보다 세탁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적었다. 장부정리하는 것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골목입구의 늙은할미에게 그녀는 들어가자마자 물어보았다. "돈은 언제 주는 건가요?" 이런 어려운 세월이 얼마 계속되지 않았다. 북경이 해방된 것이다. 해방후의 신중국은 모두 새로웠다. 김묵옥은 보통공민의 평상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공민 김묵옥
1952년, 이미 일본에 도착한 오빠는 김묵옥과 6명의 아이에게 생활비를 부쳐왔다. 김목옥은 이 얼마안되는 돈으로 식당을 열어서 급한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여러번 생각한 후에, 김묵옥은 자기 집안에 서양음식점을 열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고쳐서 사천음식점을 열었다. 북경에는 당시에 40만명의 사천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천음식점을 바로 인기를 끌었다. 비록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먹고 입는 것에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1954년, 한 화사(畵社)의 사장이 소개해서 김묵옥은 그녀의 첫번째 남편인 마만리(馬萬里)를 만난다. 마만리는 당시 중국내에 이름을 떨치던 화조화가(花鳥畵家)였다. 그는 두번 결혼했었는데, 첫번째 부인은 난산으로 죽었고, 두번째 부인은 불화로 이혼했었다. 당시 그는 북경의 큰 딸 집에 있었는데, 딸의 집이 작아서 잠잘 곳도 없었으므로 그림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시 마만리는 약간 정신이상이 있어 몇번 자살을 생각했다. 이런 상황을 알고는 김묵옥은 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그녀는 마만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화실을 만들어주고 그에게 편안하게 그림을 그리도록 해주었고, 그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다. 나중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결혼식 날에, 치파오를 빌려오고, 청첩장은 마만리가 자기 손으로 썼다. 1956년 6월, 사람의 소개를 받아 김묵옥은 북경편역사에 들어가면서 식당을 그만둔다. 정식으로 국가공무원이 되어서 매월 60위안의 봉급을 받았다.
폭풍우가 다가오다.
김묵옥의 인생에 폭풍우가 진짜 밀려온 것은 1958년이다. 몰락한 왕부출신의 언니 천도방자의 명성으로 인하여 그녀는 당연히 혁명군중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1958년 2월 1일, 구정이 지난지 5일이 되지 않아서, 김묵옥은 집에서 끌려간다. 이때부터 그녀는 15년간 감옥에서 생활한다. 마만리가 연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녀는 스스로 그와의 혼인을 해제한다.
1973년, 김묵옥의 형기가 만료되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한참 생각해본 후에, 오빠의 아이들은 김묵옥이 키우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처럼 힘든 시기에 사람들마다 출신이 복잡하고 해외관계가 있는 사람은 꺼려했다. 그녀는 다시는 아이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겨울 55세의 김묵옥은 천진차전농장으로 간다. 거기서 그녀는 7년간 농장노동자로 지낸다. 15년의 감옥생활과 7년의 농장생활에서 그녀는 계급의 그늘과 출신문제를 벗어나, 매일 죽어라 일을 했고, 이때부터 척추뼈가 상했다. 감옥에서 요통이 무척 심했고, 그녀가 견디기 힘들었을 때는 담배를 피웠다. 나중에는 하루에 한갑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1974년, 집단숙사에 더 이상 살지 않기 위하여, 그녀는 농장의 흙전문가 시유위(施有爲)와 두번째 결혼을 한다. 농장의 당시 규정으로는 결혼을 해야만 따로 방을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이 늙은 부부는 농장에서 그들에게 분배해준 작은 집에서 닭과 오리를 키웠다. 청빈하지만 달콤한 전원생활을 보낸다.
1980년, 척추골이 괴사하여 김묵옥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노동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농장에서 기술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급여는 한달에 19위안 2마오였다. 이것은 담배를 살 돈으로도 부족했다. 게다가, 남편은 상해의 모친에게 돈을 부쳐주어야 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다.
생활이 점점 빈곤해지자, 생전 처음으로 김묵옥은 사람을 찾아가서 부탁하게 된다. 그녀의 성격으로는 죽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1979년, 그녀는 처음으로 부탁편지를 쓴다. 수신인은 등소평이었다.
서신에서, 김묵옥은 자기를 봉건몰락대귀족이라고 쓰고, 그녀는 명예회복을 원하지도 않고 그저 일자리를 원한다고 썼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서신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저는 지금 이미 육체노동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식노동은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일을 주십시오" 금방 그녀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유관기관은 김묵옥을 북경문사관의 관원으로 안배한 것이다. 그리고 집안 사람 전부를 북경으로 옮겼다. 정책에 따라, 그녀는 집을 분배받았다. 그녀의 유일한 유감은 자식이 없는 것이다.
감옥에 있을 때, 김묵옥은 학교를 열려고 생각했다. 1992년초, 김묵옥은 남편과 집안에 모아놓은 돈을 다 꺼내서, 서탁, 교재와 완구를 샀고, "애심아동일어반"을 열었다. "애심"은 애신각라의 애신을 은유한 것이다. 그녀가 애신각라의 성을 지닌 만주황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년에 아동의 일어능력을 배양하고 자기의 사랑을 아무 조건없이 주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 '반'을 학교로 만들기 위하여 1993년부터, 김묵옥은 일본과 북경을 여러 차례 왔다갔다하며, 동창, 친구, 친척등 일체의 관계를 동원하여 사방에서 강연을 하여 결국 학교를 만들 비용을 모았다. 1996년 5월, 하북성 랑방시 개발구의 애심일어배훈학교는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관련기관에 따르면, 이 학교는 당시 국내에서 민간이 연 설비가 가장 잘 갖추어진 일어전문학교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다.
비록 88세이지만, 김묵옥은 몸을 잘 유지했다. 봉황TV의 <<노예유약>>에 출연한 그녀는 하얀색 옷을 입었으며, 손가락은 소녀처럼 길었다. 손톱에는 정성스럽게 투명한 매니큐어를 발랐다. 담배를 피우는 자세는 아주 우아하였다. 노예가 그녀에게 심리연령을 묻자, 그녀는 "나의 마음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 나는 젊은이와 함께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어찌 심리연령뿐이겠는가. 노인의 생활습관도 마치 전위적인 예술청년과 유사했다. 양생지도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아침 6,7시가 되어서 잠들고 오후 2,3시에 일어난다. 원인은 테니스, 농고, 골프등의 경기가 모두 밤에 나오기 때문에 경기를 보기 좋아하는 그녀는 밤에 경기를 보고 낮에 자는 것이다.
영화부귀를 경험하고, 민초의 생활도 맛본 그녀는 자기의 인생에서 일반 사람들이 아주 견디기 힘들었을 일을 그녀는 아주 가볍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마치 그저 지난 재미있는 일을 기억하듯이. 그녀의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아마도 그녀가 장수한 이유일 것이다. "희노애락의 네 글자에서, 그 애라든지 노라든지 하는 것은 네 마음 속 한켠에 놓아두어라. 그러나, 희와 락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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