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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대청제국의 마지막 총독(總督)들

by 중은우시 2006. 11. 13.

직예(直隸)

 

진기룡(陳夔龍) 귀주 귀양사람. 청나라 광서 진사. 순천부윤, 조운총독, 하남순무, 강서순무, 사천총독, 호광총독,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 역임. 청나라가 망한 후, 상해로 은거함. 장훈의 복벽에 참여하여 필덕원 고문대신을 맡았으나, 실패후 다시 상해로 은거, 1948 93세로 서가. 항주에 장사지냄

 

장진방(張鎭芳) 하남 항성사람. 광서30년진사. 원세개의 큰 형의 내제. 원세계의 4촌형제. 천진도, 장호염운사, 직예안찰사, 하남제법사등의 직위를 맡음. 진기룡이 병으로 물러난 후, 원세개의 추천으로 대리직예총독을 맡음. 민국초에 하남도독 겸 민정장이 됨. 원세계의 황제옹립에 관여. 장훈의 복벽에도 관여함. 내란죄로 무기징역을 받으나, 거금을 내구 풀려남. 천진에서 염업은행 동사장을 맡음. 1933년 사망. 70. 친아들이 요절하여 친동생 장금방의 아들인 장가기(張家騏)가 후사를 이음(장가기는 민국시대의 4대공자의 우두머리임. 서화, 희곡등으로 유명. 나머지 세 사람은 원세개의 이공자 원극문, 공친왕 혁흔의 손자 부동, 동북왕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임)

 

양강(兩江)

 

장인준(張人駿) 직예사람. 진사출신. 산동포정사, 조운총독, 산서순무, 양광총독등을 역임. 1909년 양강총독이 됨. 무창기의폭발후, 장인준은 장훈의 병력에 의지하여 완강하게 저항할 준비를 함. 그러나 동맹회의 강.절연합군의 공격에 강녕을 지키지 못하고, 미국적의 전도사이면서 고루의원의 원장이던 마림이 중간에 나서서 연합군과 협상하며 투항을 준비함. 이후 일본군함을 타고 상해로 도망침. 1927년에 사망. 81. 숙부는 장패륜, 질녀가 장애령임.

 

장훈(張勳): 강서 봉신사람. 어려서 가난함. 군인출신. 공을 세워 강남제독이 됨. 강절연합군이 남경을 함락시키자 서주로 도망침. 민국후에 정무상장군등의 군직을 받음. 그의 부대는 이후 부의를 다시 모시는 복벽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네덜란드대사관으로 도망침. 이후 천진에 은거. 70세로 사망.

 

섬감(陝甘)

 

장경(長庚) : 이얼근각라씨. 만주정황기. 보지현승, 이리장군, 주장대신, 성도장군, 병부상서등의 직을 역임. 섬감총독이 됨. 신해년에 이리장군 지예, 섬서순무 승윤등과 선통제를 서쪽으로 모시려고 하고, 완강하게 항거하나, 실패함. 1915년에 사망.

 

민절(閩浙)

 

송수(松壽) : 만주정백기. 여러 직을 거쳐 민절총독이 됨.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민군이 난을 일으켜 송수에 무기를 내달라고 하나 거절하고, 결전을 벌이나 대패함. 도망치지 않고, 자결함. 청나라조정은 태자소보직을 내림.

 

호광(湖廣)

 

서징(瑞澂): 만주정황기. 대학사 기선(琦善)의 손자. 구강도, 상대도등의 직을 거침. 그는 재택(載澤)의 처제임. 신해혁명후 서징은 성을 버리고 도망침. 먼저 병선에 숨었다가 나중에 상해로 도망침. 상해에 4년간 살다가 사망. 나중에 손문은 무창의 성공은 의외인 점이 있다. 주요 이유는 서징이 도망쳤기 때문이다. 만일 서징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무한신군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자들은 단방에 의하여 사천으로 보내졌기 �문에, 무창에 남아있던 자들은 그저 포병과 공정부대의 일부분에 불과했었다.

 

사천(四川)

 

왕인문(王人文). 운남성 대리사람. 백족(白族).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고, 향시, 전시를 연이어 통과하고 광서13년에 진사가 됨. 귀주, 광동, 섬서등지에서 20여년간 관리를 지냄. 선통3년에 천진변무대신이 되고, 사천총독인 조이손이 동북으로 전근가게 됨에 따라 왕인문이 대리총독을 맡았다. 당시 철로국유조서를 내리면서 호로운동이 벌어지자 왕인문이 백성들의 편에 서서 상소를 올리자 조정은 그를 조이풍으로 교체한다. 그는 북경으로 소환당해 가는 길에 섬서까지 갔을 때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북경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왕인문은 사천으로 돌아가 열렬히 환영받고 나중에 상해로 간다. 민국초에 신해8공신의 하나로 봉해진다. 나중에 천진에 살면서, 북양정부에서 농상총장을 임명받으나, 취임하지 않는다. 일본이 화북을 점령한 후에도 여러 차례 그를 모시려 했으나 계속 거절했다. 1939년 천진에서 병사. 향년85.

 

조이풍(趙爾豊) 한군정남기. 산서정락지현, 영제지현, 사천영녕도, 건창도. 대리사천총독에 오름. 이후 호로운동을 진압함. 무창기의후 성도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대한사천군정부를 세움. 그는 겉으로는 정권을 내놓으면서 암중으로 조종하여 병변을 준비하다가 신임도독 윤창형에게 죽임을 당함.

 

양광(兩廣)

 

장명기(張鳴岐): 산동 무예사람. 거인출신. 섬서순무, 사천총독때 지낭으로 칭해짐. 광서순무등의 직을 지내고 선통2년에 양광총독 겸 광주장군이 되어 광주기의를 진압함. 황화강등72열사를 살해함. 신해혁명때 홍콩, 일본으로 도피함. 원세개의 집권후 북경으로 돌아가 원세개의 고급고문이 됨. 1916년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자, 1등백에 오름. 만년에 천진의 영국조계지역에 살고, 항일전쟁시기에 친일파가 됨. 1945, 70세로 천진에서 병사.

 

운귀(雲貴)

 

이경희(李經羲): 안휘 합비사람. 숙부는 이홍장. 명문출신에 그 자신도 능력이 있어 관직이 순탄했음. 신해혁명때 운귀총독에 이름. 그가 운귀총독으로 있을 때,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여, 조정, 북양, 혁명당세력이 교착하는 운남에서 각파로부터 호감을 얻음. 그리하여 운남중구기의때에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음. 채악이 그를 예를 다하여 보내주었음. 상해에 가서 생활함. 홍헌때 숭산사우의 하나로 봉해짐. 이후 여원홍, 단기서내각에서 국무총리와 재정부장을 지냄. 장훈의 복벽때 위기에 처함 부득이 동교민항육국반정동쪽의 수문으로 도망쳐 기차를타고 상해로 떠남. 1925년 병사. 향년 66. 그의 후손중 유명한 사람은 주미대사 이도예(李道豫)가 있음.

 

동삼성(東三省)

 

조이손(趙爾巽): 한군정남기. 요녕철령출신. 사천총독 조이풍이 친동생임. 진사출신. 어사, 호북향시부고관, 신강포정사, 산서순무, 성경장군, 사천총독등의 직을 지냄. 신해혁명때 동북삼성총독을 지냄. 동북에서도 혁명당인들이 일어나려 하자, 조이손은 보경안민을 이유로 대군을 모집하여 진합함. 중화민국성립후 직위해제당하고 청도에 은거. 1914 3, 조이손은 원세개에 의하여 청사관관장이 됨. 청나라의 유신인 저명한 학자 가소문, 묘전손등 100여명을 모아서 청사(淸史)를 편찬함. 나중에 장훈의 복벽에 참여하나 실패하고, 계속 청사편수작업을 함. 스스로 청조의 밥을 먹고, 청조의 일을 하고, 청조의 사서를 편찬했다고 함. 청사고를 완성한 후 조이손은 북경에서 병사함.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