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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탕수잠(湯壽潛) : 청말의 입헌파의 영수인물

by 중은우시 2006. 12. 19.

작자: 부국용(傅國涌)

  

탕수잠(1856-1917)은 청나라 말기 입헌파의 영수인물이다. 도로권, 철도건설로 일대에 이름을 날렸다. 민국초기에 그는 제1기 절강도독이 되었고, 남경임시정부의 제1기 교통총장을 지냈다. 그를 본 사람의 눈에 그는 아주 검소한 사람이었다. 포천소는 탕수잠과 우연히 만났던 얘기를 적고 있다.: "나는 비록 자주 이등열차를 탔지만, 어떤 때에는 삼등열차에 가서 보곤 했다. 그날 탕수잠 선생이 많은 장사꾼 조무래기들틈에 앉아 있었고, 구석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신해혁명때 그는 절강도독인데, 어찌 이렇게 쪼그리고 있단 말인가? 다행히 나는 그를 알아보았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중에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들은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이상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조취인(曹聚仁)은 부친이 가장 존경하는 큰 인물이 탕수잠이라고 말했다. 개략 1915년전후에 항주의 길에서 만났는데, 탕수잠은 토포로 만든 단과를 입고, 농사꾼 모자를 쓰고, 한쌍의 포혜를 신고, 종이우산 한자루를 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100% 농사꾼"이었다. "그의 시문은 모두 뛰어났다. 유신지사였다. 실재적으로 사회건설업무를 했던 사람이다. 신해혁명때 백성들이 항주에서 일어났을 때, 만주군대의 만주장군은 탕수잠을 지정하여 항주로 와달라고 했고, 그들은 비로소 투항했다.이로 인하여 그는 상해에서 항주로 돌아왔고, 절강총독을 맡았다. 나중에 교통부장이 되었다. 그 때도 그 모습이었다. 그 후에 철로국 독판을 맡았다. 그때도 그 모습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번은 그가 송강에서 배를 타고 상해 용화로 공사를 순시하러 갔다. 배안에서 한 상인이 그의 모습을 보고는 그가 자기의 은자를 훔치려는 것으로 의심해서 차갑게 그에게 비웃는 말을 던졌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맞이하는 것은 바로 이 농사꾼 모습의 독판이었다는 것을. 그 갑부는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탕수잠은 그저 웃어 넘겼고, 추궁하지 않았다. 조취인은 이것은 그저 검소하다는 것만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탕수잠은 계몽시대에 먼저 깨달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억지로 꾸미지 않고,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했다" 그의 부친이 탕수잠을 존경한 이유도 바로 이런 것때문이었다.

 

1914년 원세개가 호항철도를 국유로 하였을 때, 탕수잠이 1905년부터 독판으로 철로일을 하면서 한푼의 급여도 받지 않은 것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에게 20만위안을 보상금으로 주려고 했으나, 탕수잠은 사양하고 돌려보냈다. 다시 그의 집으로 돈을 보냈으나, 그는 여전히 거절했고, 결국 전부 절강교육회에 기부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이 돈으로 항주에는 절강성 최초의 공공도서관이 1931년에 완공되었고 1932년에 정식 개방되었다.  채원배는 친필로 글을 써주었다. 사실 탕수잠은 당시에 채무에 시달리고 있어서 돈이 많이 필요했었다. 1915년 항주의 지방법원에서는 그의 채무분쟁이 심리중이었다.

 

원세개가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탕수잠은 병중에서도 한마디를 내뱉었다: "원세개가 죽을 날이 머지 않았구나". 그는 원씨의 황제즉위에 반대했고, 채악이 의거를 일으키자, 전보를 보내서 지지했다. 그는 일생동안 관직을 가볍게 여겼다. 1917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관리가 되지 말라고 경계했다.

 

1856년 회계 산음 천락향(지금의 소산)에서 태어남.

1890년 <<위언>>4권을 써서, 변법을 주장함. 강남무술유신의 대표적 인물로 등장

1892년 진사, 한림원의 서길사가 됨

1893년 국사관 협수가 됨

1895년 금화 여정서원 산장이 됨

1899년 호주 남심심계서원 산장이 됨

1904년 상해용문서원 원장이 됨

1905년 청나라 조정은 4품 경직을 주고, 전절철로총리를 맡겨, 호항용철로건설사업을 맡김.

1906년 장건과 예비입헌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고, 청말입헌파의 영수가 됨 "남탕북장"의 남탕임.

1907년 학부 자의관이 됨

1910년 성선회와 원세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파직됨

1911년 신해혁명후 절강도독이 됨.

1912년 1월 남경임시정부의 교통총장(부임은 하지 않음)이 됨

1915년 귀향

1917년 6월 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