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경 홍콩에서 찍었다는 사진
무원현 홍관촌에 남아 있는 첨세채 집의 문: 3미터가 넘는다.
글: 추효(鄒曉) 강남도시보 기자
청나라때 사람이 쓴 <<야우추등록(夜雨秋燈錄)>> 권4의 <<장인(長人, 키다리)>>편에 보면, 강서성 무원현(婺原縣) 사람인 첨새채는 먹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는데, 형제 두 사람이 모두 키가 장여(丈餘)에 달하였다고 적은 바 있다.
최근에, 청나라 도광제때 강서 무원사람인 "세계최고키다리"라는 첨세채에 관한 글과 보도가 인터넷상에 수도없이 넘쳐나고 있다. 동시에 첨세채가 1880년 홍콩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고, 무원현박물관에는 첨세채가 신었던 거대한 신발이 보관되어 있다고도 한다.
사실이 그러할까?
무원현 절원향(浙源鄕) 홍관촌(虹關村)에는 "장인항(長人巷)"이라는 골목이 있다. 마을의 노인인 첨조춘(詹竈春)은 <<홍계첨씨종보(鴻溪詹氏宗譜)>>를 꺼내놓았다. 거기에는 키다리 첨세채가 1841년에 출생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노인 첨경덕(詹慶德)은 낡은 옛날 집 한 채를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키다리 첨세채가 살던 집이라고 하였다. 집에 들어가서 문을 보니 3미터정도의 높이가 되었다. 노인에 따르면, 이 기괴하게 높은 문을 지나서 들어가면 바로 첨세채의 침실이라고 한다. 첨세채의 침실을 열쇠로 잠겨 있는데, 현재 주인이 이미 도시로 일을 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첨경덕의 회고에 의하면, 유년시절, 그의 부친은 첨세채에 관한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초기에 키다리 첨세채의 옛집의 건물앞에는 키다리 첨세채가 앉아있는 큰 폭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사진은 "문화대혁명"때 훼손되고 말았다.
인터넷매체에 의하면 "키다리의 신발 한쌍이 무원현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길이가 1자가 넘는다"고 되어 있다. 이 큰 신발을 구경하기 위하여 무원현박물관을 가보았다.
박물관장인 첨상생(詹詳生)은 무원현의 키다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박물관에는 키다리 첨세채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큰 신발에 관한 소문에 대하여는 아주 화를 냈다: '박물관에는 큰 신발이라는게 아예 없습니다. 매체는 한번도 박물관에 전화해서 확인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현의 현지판공실(縣誌辦公室)로 가볼 것을 권했다. 현지판공실에서 일하는 정지광에 의하면, "키다리 첨세채에 대한 문자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물품은 우리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정지광은 <<무원현지>>를 내놓았는데, 거기에는 "청나라 도광연간에 홍관사람 첨진중(詹眞重), 자는 형균(衡均)이 출생한지 한달도 되기 전에 6살어리이 정도였고, 체중이 30근이되었다. 성년이 된 후에 키가 8척에 달하였다. 그의 아들 첨세종(詹世鍾)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키가컸고, 팔 힘이 대단했다. 하남을 놀러갔을 때, 군대에서 특별채용하여 썼다. 그리고 6품의 관직을 내렸다. 그의 넷째아들 첨세채의 키는 1장여가 되었다."
무원현박물관에는 첨세채에 관한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세계최고키다리"라는 첨세채의 사진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인터넷의 정보에 의하면 "사진은 1880년경 홍콩에서 찍은 것이며, 흑백사진이고 전체적으로 빛이 없고, 손으로 만져보면 요철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홍관촌의 주민인 첨조춘에 의하면 어릴 때 그도 첨세채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진은 "문화대혁명"때 훼손되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첨세채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데, 인터넷에서 첨세채의 사진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첨세채의 부친인 첨진중은 두 명의 처를 취했다. 키다리 첨세채는 첨진중과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모두 4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인 첨세종과 넷째인 첨세채는 모두 키가 1장여가 되었다. 가장 컸던 넷째 첨세채는 3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첨경덕에 따르면, 어릴 때 부친이 얘기한 바에 의하면, 첨세채가 한두살때 모친이 그를 데리고 정월의 대보름묘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첨세채가 배가 고파서 젖을 먹고 싶어했다. 모친의 앞에 서서 젖을 먹는데, 옆에서 극을 보던 마을사람들이 보게 되었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모두 키다리를 질책하면서 모친만큼 키도 되는데, 아직 젖을 먹느냐 부끄럼도 없느냐고 말했다. 모친은 이 말을 듣고 주민들에게 아이가 아직 두 살이 안되었으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키다리 첨세채는 1880년경 홍콩에서 찍었다는 사진을 보면 청나라관복을 입고 있다. 신장은 크다. 그러나, 기록상 그가 청나라의 관리를 지냈다는 말은 없다. 청나라사람인 선정의 <<야우추등록>>에 의하면, 하루는 서양사람이 첨세채를 보고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많은 돈을 주고 그에게 관복을 입게 한 후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돈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는 관복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이 있어서, 일반백성은 관복을 함부로 입을 수 없었다. 더구나 관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당시 첨세채는 셋째형인 첨세전과 함께 상해에서 휘묵(徽墨, 안휘의 먹)을 만들어 파는 먹제조장인이었다. 영국인이 그를 보고는 많은 돈을 들여 사버렸다. 그리고는 그를 데리고 영국으로 갔다. 이리하여 첨세채는 영국국적을 얻게 되었고, 영국여자를 마누라로 삼았다.
홍관촌에 있는 <<홍계첨시종보>>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첨)세채. 어릴 때 이름은 오구(五九). 자는 옥헌(玉軒). 1841년 12월 20일 신시생. 대영제국사람을 처로 취하다. 아들은 택순(澤純). 1876년 9월 17일생."
첨경덕에 의하면 첨세채의 처가 마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키기도 했었다고 하나.
키다리 첨세채는 영국여자와 결혼한 후, 첨택순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키다리의 아들인 첨택순은 부친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지 않았는지 키가 크지 않았다. 첨택순은 영국의 주상해영사관에서 일을 했다. 첨택순은 부친의 고향이 무원현 절원향 홍관촌이라는 것을 들어, 한번은 고향을 찾아가서 친척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그의 한 백부는 먹을 만드는 사업으로 돈을 많이 모았는데, 첨택순이 재산분할해달라고 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이 첨세채의 가족임을 부인했다고 한다. 첨택순은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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