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청나라의 마지막 3명의 황제는 왜 자식을 두지 못했을까

중은우시 2007. 11. 2. 15:29

글: 미상

 

광서제도 자손이 없고, 그의 전임황제인 동치제도 자손이 없고, 그의 후임황제인 선통제도 자손이 없다.

 

동치제는 19세때 죽었는데, 아들 하나 딸하나 남기지 못했다. 야사에 의하면 황제가 죽었을 때 황후인 아루터씨가 이미 임신했다고 하지만, 믿을만한 사서에서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청나라때, 황자나 황제는 대부분 정식혼인전부터 성생활을 시작하고, 본부인을 맞이하기 전에 이미 자녀를 둔 경우도 많았다. 동치제는 동치11년9월(1872. 10)에 혼인식을 거행하고, 동치13년12월(1875.1)에 사망했다. 결혼후로부터만 따져도 2년3개월이라는 시간이 있는데, 그가 여러 후궁과 생활하면서 골육을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광서제 본인은 만38세까지 살았는데도 아들하나 딸하나 남기지 않았다. 이것도 아주 비정상적이다. 광서제는 황후를 1명 두었는데, 명분을 받은 비만 2명이 있었다. 그 외에도 신변에 많은 묘령의 궁녀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는 광서14년 10월(1988. 11)에 결혼했고, 광서24년8월에 영대에 연금되었다. 근 10년의 시간동안, 비록 정치적으로는 뜻을 펴지 못했고, 기본적으로 허수바비 황제였지만, 성생활에서는 자유스러웠다. 특히 그가 총애하던 진비(珍妃)와의 혼인생활은 아름다웠다고 한다. 광서제가 영대에 연금된 기간동안, 황후인 예허나라씨는 그의 곁을 지켰다. 광서제는 함원전에 머물고 황후는 건너편의 의향전에 거주했다. 예허나라씨는 황후의 자리를 수십년간 지켰는데, 광서제는 그녀에게 거의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녀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학자에 의하면, "승행부(承幸簿)"에는 광서제와 황후간의 성생활기록이 적지만 남아 있다고 한다. 적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 다르다. 비록 황제가 '서태후'의 위세에 겁이 나서 황후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는 했을 가능성이 크기는 하다. 불행한 것은 황후도 황제와의 사이에 아들이건 딸이건 낳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광서제와 그의 후궁들과 서태후는 모두 황자를 원했지만, 결국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애신각라씨 황족의 비극은 이어졌다.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광서제의 후임황제인 선통제 부의는 61세까지 살았지만, 역시 자손이 없었다.

 

어찌하여 세 명의 황제가 연속하여 자식을 두지 못한 것일까? 혹시 기록하는 걸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역사학자들이 그 정도로 소홀했을 리는 없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라는 말이 있다. 중원에 들어온지 200년이 되었고, 유가문화에 깊이 빠진 애신각라씨 황족들은 당연히 후손을 많이 두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것이다. 만일 나중에 어른으로 성장한 황자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릴 때 요절한 사내아이나, 어릴 때 요절한 딸이라도 있었다면 역사가들이 절대 이를 기록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에게 생육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황제라는 지고무상한 존엄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된다. 역사학자들이 이런 일을 소홀히 했다가는 그들이 머리를 몇개 가져도 안될 것이다.

 

동치제(同治帝)-광서제(光緖帝)-선통제(宣統帝). 세 황제는 모두 자손이 없다. 아무래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애신각라씨 황족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대청제국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하여 관련 사서, 전기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연구결과가 나와 있는 것이 없다. 세 명의 황제들은 왜 생육능력을 가지지 못했을까? 청나라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난이도는 높은 편이다. 주로 황제 자신이 일찌기 세상을 떠났고, 그 시대의 어의들도 이에 대하여 감히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아무런 직접적인 의학자료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왜 연속하여 3명의 황제가 모두 자손을 두지 못했는지는 그저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현대의학의 각도에서 이를 분석해보면, 상당히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청나라말기의 3대황제가 연속으로 자손을 두지 못한 것은 만주황족의 혼인풍습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만주황족의 혼인풍속에 따르면, 남편이 죽은 후, 처는 남편의 동생에게 개가할 수 있고, 심지어 친자식이 아닌 아들이나 조카에게도 개가할 수 있다. 이런 원시적인 혼인풍습은 여인을 재산과 교배의 도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청태조 누르하치은 생전에 이런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내가 죽은 후, 나의 여러 어린 자식들과 대복진(大福晋, 복진은 만주어로 부인이라는 의미임)은 큰아들에게 맡긴다(收養). 대복진은 누르하치의 정식 처이고, 큰아들은 아들인 다이산(代善)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누르하치가 말한 "수양"은 자기의 사후에 처와 자식을 대산이 가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청태종시대에 망구얼타이가 죽은 후, 그의 처는 조카인 하오거와 웨투어에게 분배되었다. 누르하치의 10번째 아들인 더거레이가 죽은 후, 그의 처들은 12째아들인 아지거의 처가 되었다. 숙친왕 하오거는 청태종의 장남인데,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14째아들이며, 청태종의 친동생이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도르곤은 하오거의 친숙부가 된다. 그러나, 하오거의 본부인인 보얼지지터씨는 숙부인 도르곤의 처(元妃)의 여동생이다. 조카 하오거가 죽은 후, 그의 처인 보얼지지터씨는 숙부 도르곤의 핍박하에 도르곤의 처가 되었다. 

 

청나라의 개국황제인 청태종과 그의 아들인 순치제의 혼인관계는 모두 전형적인 근친혼에 난륜혼이다. 건주여진의 두목인 누르하치는 여진의 각부락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몽고 커얼친의 밍안(明安)의 딸을 측비로 삼음으로써 누르하치자손과 몽고족간의 혼인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그의 네 아들은 모두 몽고여인을 처로 삼았다. 특히 그의 8째아들 홍타이시(청태종)은 강대한 명나라에 대응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만몽혼인을 추진했다. 청태종이 국호를 '대청'으로 고친 후 책봉한 5명의 후비는 모두 몽고 보얼지지터가문에서 온 여인들이었다. 그중 3명의 예쁜 후비는 배분이 고모와 조카 관계였다.

 

먼저 고모인 보얼지지터씨는 명나라 만력42년(1614년)에 당시 패륵이든 홍타이시에게 시집왔다. 나중에 그녀는 효단문황후로 칭해지며 3명의 딸을 낳았다. 이어서, 천명10년(1625년)에 그녀의 13살된 조카딸이 다시 여전히 패륵이던 홍타이시에게 시집온다. 나중에 그녀는 영복궁장비로 책봉되고, 순치제 푸린과 3명의 딸을 낳는다. 나중에 효장문황후로 칭해진다. 이후 천총8년(1634년)에 그녀의 또 다른 26세된 조카딸이자, 장비의 친언니가 당시 이미 칸의 지위에 오른 청태종에게 시집온다. 그녀는 신비로 책봉되고 두 살 때 요절한 아들을 낳는다.

 

어떤 사람이 낸 통계에 의하면, 청태종의 재위기간동안, 만주귀족과 몽고 커얼친부족과의 사이에 이루어진 혼인이 18번이나 된다고 한다. 청태종의 아들인 순치제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역시 근친혼과 난륜혼을 하게 된다. 효장문황후의 두 조카딸이 모두 순치제에게 시집온다. 한 명은 황후(효혜황후, 나중에 정비로 강등됨), 또 다른 한 명은 숙혜비가 된다. 순치제가 장가든 두 명의 처는 모두 그의 친외삼촌이 낳은 두 딸이었으므로, 그에게는 4촌여동생이 된다. 나중에 효장문황후의 조카손녀딸이 다시 순치제의 처가 되고 효혜장황후가 된다. 이것은 바로, 순치제가 두 명의 사촌여동생을 처로 맞이했을 뿐아니라 5촌조카딸도 처로 맞이했다는 말이 된다. 몽고 커얼친부락의 우두머리인 망구스의 각도에서 보면 혈연으로 볼 때, 그는 딸(효단문황후)를 청태종에게 시집보내고, 두명의 손녀(효장문황후, 신비)도 청태종에게 시집보내고, 다시 두명의 증손녀(정비, 숙혜비)와 1명의 고손녀(효혜장황후)를 청태종의 아들인 순치제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몽고족과의 연맹을 강화하기 위하여, 금나라의 칸, 청나라의 황제, 왕, 패륵등귀족은 몽고여인을 처로 맞이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딸도 몽고왕공귀족에게 시집보냈다. 청나라 초창기에 청나라의 첫번째 황제가 되는 청태종은 장녀부터 사녀까지 몇몇 12,3살된 딸을 모두 몽고 각부락의 왕자, 왕손에게 시집보냈다. 그중 삼녀 고륜단정장공주, 사녀 고륜옹목장공주는 효단, 효장 두 황후의 친가의 자손들에게 시집갔다. 다른 몇몇 딸들은 청태종이 죽은 후에 출가했는데, 대부분이 몽고의 왕족들에게 시집갔다. 청나라정권이 중원을 차지한 후에도 몽고 각 부락과의 정치적 혼인은 계속되었다. 이는 청나라의 기본 국책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근친혼과 난륜혼의 문제가 있었다.

 

청나라정권이 북경을 차지한 후, 중원의 윤리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황실의 근친혼과 난륜혼이 점차 줄어든다. 강희제때에는 수녀(秀女)를 뽑을 때, 수녀중 황후의 족과 가까운 친척관계이거나 집안에 애신각라씨의 여인이 있는 경우에는 먼저 밝히도록 하였다. 가경제때는 수녀를 뽑을 때, 황후, 황귀비, 비빈의 친자매는 뽑지 않는 것으로 하였다. 이런 규정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근친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치지는 일등시위 동국유의 누나인 동가씨를 처로 맞이하였는데, 동가씨가 낳은 셋째 아들이 바로 강희제인 현엽이다. 그녀는 나중에 효강장황후로 칭해진다.나중에 강희제는 동국유의 딸을 처로 삼으니 바로 효의인황후이다. 효의인황후의 여동생도 강희제에게 시집가니, 나중에 돈이황귀비가 되는 여인이다. 이는 바로 강희제가 두 명의 사촌여동생을 처로 맞이했다는 말이 된다. 동국유는 강희에와의 관계에서, 친외삼촌이면서 장인이 된다. 청나라 말기가 되면서, 광서제는 동시에 원래 시랑인 장서의 딸인 타타라씨를 처로 삼는데, 자매 둘을 각각 근빈과 진빈으로 삼는다. 이런 현상은 적지 않았다. 여기서 소개한 것은 그 중의 두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여진(만주족의 전신)이 처음에 흥성할 때는 겨우 3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몽고는 40만철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약소한 만주족이 확장하고 천하를 제패하려면, 만몽혼인을 유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금나라의 칸, 청나라의 황제, 왕, 패륵등 몽고귀족이 몽고여인을 처로 삼고, 자신의 자녀를 몽고족에 시집보낸 것은 이런 필요에 의하여서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근친혼과 난륜혼이 존재하게 되고, 이것이 대대로 이어지다보니, 고모와 조카가 한 사람에 시잡가고, 배분을 확실히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만몽혼인의 결과는 명나라의 멸망과 중원을 차지하는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다. 동시에 근친혼과 난륜혼은 만주황족이 멸족되는 요인으로 남게 된다.

 

청나라 황제를 보면, 전체적으로 뒤로 갈수록 생육능력이 떨어지고, 낳은 자식들중에 요절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개국황제인 홍타이시(청태종)은 51세까지 살았고, 명분을 받은 후비가 15명이었다. 그녀들과의 사이에 11명의 아들, 14명의 딸을 낳았다. 11명의 아들중 16세까지 산 사람이 7명이고, 4명이 요절했다. 14명의 딸 중에서 16세까지 산 사람이 13명이고, 단지 1명만이 15살때 사망했다. 자녀의 요절비율은 20%이다.

 

두번째 황제인 푸린(순치제)는 천연두를 앓아서 죽었는데, 24년에 1달이 모자라게 살았다. 단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분이 있거나 자녀를 낳은 후비가 모두 18명이고, 낳은 자녀의 수량도 적지 않다. 모두 8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낳았다. 아마도 근친혼과 난륜혼으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중 4명의 아들이 요절하고, 6명의 딸 중에서 16살을 넘긴 경우가 4명이다. 다만 그 중에서도 1명만이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모두 시집을 가지 전에 죽었다. 자녀의 요절비율은 43%이다.

 

세번째 황제인 현엽(강희제)는 68세까지 살았다. 불완전하지만 통계에 의하면 생전에 후, 비, 빈이 모두 55명이었다. 모두 35명의 아들과 20명의 딸을 낳았다. 그중 성인이 된 자녀는 아들이 12명, 딸중에 16세를 넘긴 경우가 8명이다. 자녀요절비율은 51%에 달하였다.

 

이어지는 황제들은 생육능력이 점차 떨어진다. 그렇지만 그다지 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네번째 황제인 윤진(옹정제)은 56세까지 살았다. 스스로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어려서부터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즉위후에도 궁녀가 아주 적었다"고 하고 있는데, <<청사고>>의 기록에 의하면 후비가 7명이고 모두10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다섯째 황제인 홍력(건륭제)는 87세까지 살았고, 생전에 책봉한 후, 비, 빈이 31명이다. 모두 17명의 아들과 10명의 딸을 낳았다.

 

여섯째 황제인 우염(가경제)는 59세까지 살았고, 후, 비, 빈 14명을 두었다. 그러나 겨우 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을 뿐이다. 그중 장남은 3개월을 살았고, 이름도 짓기 전에 죽었다. 7명의 딸은 어려서 죽고 출가한 황3녀와 황4녀도 아주 단명했다. 각각 31세와 28세에 죽었다. 자녀의 요절비율은 57%에 달한다.

 

일곱째 황제인 민녕(도광제)는 67세까지 살았고, 후. 비가 20명이다. 모두 9명의 아들을 낳았고, 10명의 딸을 낳았다. 둘째, 셋째아들은 영아때 죽었고, 10명의 딸 중에서 5명만이 성인으로 자랐다. 그중 가장 장수한 사람이 34살까지 살았고, 나머지 4명은 스무남짓이 요절했다. 자녀요절비율은 37%에 달한다. 의학조건으로 보더라도 도광제시대는 청태종시대에 비하여 훨씬 뛰어났다. 게다가 청태종은 자주 자녀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였고 어떤 때는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슨 보건이나 생육조건을 따질 수가 없었다. 도광제 민녕은 달랐다. 후비의 생육, 보건조건과 자녀의 의료조건은 최일류였다. 그렇지만 선조인 청태종과 비교하여 낳은 자녀의 수가 적을 뿐아니라, 자녀의 요절비율도 훨씬 높았다.

 

여덟째 황제인 함풍은 일생동안 풍류를 즐겼다. 후비가 19명이다. 그러나 낳은 자식은 아들 2명에 딸 1명이다. 큰 아들은 태어난 후 이름도 짓기 전에 죽어버렸다. 딸은 20살에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아들이 나중의 동치제이다.

 

함풍제의 생육능력도 그다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를 잇는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는 모두 자녀를 아예 낳지도 못했으니까. 애신각라씨 황족을 대표하는 인물의 생육능력은 그들이 신봉하는 무공과 더불어 철저히 붕괴되었다.

 

광서제를 보면, 허수아비황제로 정치적인 포부를 펼치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심하게 위축되었다. 게다가 근친혼과 난륜혼의 영향이 겹치고, 신체도 �지 않아서, 유정, 두통, 척추골통등 여러 질병을 앓았다. 특히 장기간 앓은 유정병(遺精病)은 생육능력을 상실하게 한 중요한 이유였다. 광서33년(1907년), 즉 광서제가 죽기 1년전에, 그는 일찌기 자기의 병의 근원에 대하여 쓴 적이 있다: "유정의 병은 20년이 되었다. 이전 몇년동안에는 매월 십수회 발병했는데, 최근 몇년에는 매월 2,3차에 불과하다." 이 글을 쓴 것이 35,6세이므로 그는 15,6세때부터 이러한 병을 앓았다는 것이다. 광서제가 이런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을 글로 써서 남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치제와 선통제도 아들이나 딸을 하나도 두지 못했는데, 혹시 이런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문제가 있지는 않았을까?

 

봉건시대에 황제의 후손이 없다는 것은 황족의 불행일 뿐아니라, 전체 국가의 불행이다. 자주 정치적인 재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재의, 영록과 같은 무리들이 광서제의 후손이 없다는 틈을 노리고 서태후와 작당을 하여, 부의를 즉위시키고, 광서를 폐위하려고 하여 정치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세 명의 황제가 모두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것은 청나라의 말세의 징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암담한 분위기 속에서 일찌기 세상을 빛냈던 한 황조는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