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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후계자의 "연막탄" 글: 두정(杜政)​중국지도자 시진핑은 나이가 이미 71세이고, 최근 들어 수시로 그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돈다. 비록 그가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라도 쉽게 하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지만, 사람들은 자주 그의 후계자가 누구일지에 대하여 연구한다. 최근 들어 70후관리가 장관/성장급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시진핑의 '후계자'에 대한 논의를 불러왔다.​중국에서 선전업무를 담당해왔던 관찰가가 해외매체에 쓴 글에 따르면, 시진핑은 만일 여건이 허락되면 아직 2기를 더 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70후 즉 이제 막 저장성대리성장이 된 중앙후보위원 류제(劉捷)가 정치국상위에 들어갈 가능성, 즉 시진핑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 다만 필자가 보기에는 너무 성급한 판단인 것같다.​"전국최연소.. 2025. 1. 6.
왜 동치제(同治帝)를 청나라황제중 가장 무능하다고 말하는가 글: 안금(安錦)​함풍11년, 내우외환을 겪은 후의 함풍제 애신각라 혁저(奕詝)가 승덕 피서산장에서 병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금성이외에서 병사한 두번째 황제가 된다(북경으로 들어오기 전의 누르하치나 홍타이시는 제외).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애신각라 재순(載順)은 자연스럽게 황위를 승계한다. 먼저 숙순(肅順)등 찬양정무팔대신(贊襄政務八大臣)이 정한 새 연호는 "기상(祺祥)"이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등과 손을 잡고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팔대신을 주살하고 정권을 탈취한 후 연호를 "동치(同治)"로 바꾼다.​이때부터 양궁태후(兩宮太后)(즉, 동태후 자안태후와 서태후 자희태후)가 수렴청정하고, 공친왕 혁흔이 정부수뇌인 의정왕이 된다.​'학습지진아' 황제​동치제 재순은 이런.. 2025. 1. 6.
중국의 외자철수와 취업률하락에 관하여 글: 왕혁(王赫)​외자철수는 중국의 취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의 최근 경제센서스(기준시간은 2023년말)에 따르면, 2018년말에서 2023년말까지 5년동안, 중국의 외자기업취업자수는 2,824.2만명에서 2,040.9만명으로 783.3만명이 감소하여 감소폭이 27.7%에 이른다(그중, 홍콩,마카오,타이완에서 투자한 외자기업의 취업자수는 940.8만명에서 726.5만명으로 감소했고, 외상투자공업기업(제조업)의 취업자수는 965.3만명에서 726.4만명으로 감소하여, 각각 214.3만명과 238.9만명이 감소했다)​또 다른 중국국가통계국이 최근 발표한 에 따르면, 2023년 외자기업의 고용인수는 15%가 감소하여, 988만명이 되었다. 이는 1990년 처음 이 수치를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 2025. 1. 6.
중국의 "백년민운(百年民運)"은 왜 항상 실패했는가? 글: 시화(施化)​'백년민운'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백년이 넘는다. 중국민운(민주화운동)의 비조는 손중산이다. 1925년 3월 12일 사망했고, 2025년까지 꼬박 100년이 된다. 그리고 거의 모든 그의 뒤를 잇는 민운인사들은 모두 손중산선생의 의발을 이었다. 비교적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왕빙장(王炳章) 박사가 있다. 그는 평생 감옥에 갇혀 있었고, 이미 수감된지 22년이 되었다. 비록 작년 세계인권조직 Freedom House에서 연도자유상을 수여했지만, 그의 사업은 지속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제목으로 "백년민운은 실패했다"고 말하더라도 별다른 이견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진다. 손중산 선생의 신해혁명은 성공하지 않았느냐고? 그것을 성공한 한차례의 민운으로 볼 수.. 2025. 1. 5.
항전시기 중국공산당은 전쟁경비를 어떻게 마련했을까? 글: 초재사숭(招財史崇)​1935년 가을 섬북의 오기진(吳起鎭)​한 무리의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사람들이 피로한 발걸음으로 힘들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나고 있었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피난하는 피난민들처럼 보였고, 보무당당한 군대로 보이지는 않았다.​그러나, 이런 무리가 얼마 후 중국혁명의 대들보가 된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왜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로 이곳에 왔는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들이 어떻게 하여 나중에 그렇게 굴기하게 되었을까이다.​이 이야기는 여러해가 지난 이후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1949년 북경​모택동은 천안문성루에 올라, 전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고 선포한다.​아래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2024. 12. 31.
위,촉,오 삼국의 최고부자는....? 글: 억범역사설(憶帆歷史說)​동한말기, 군웅이 할거하면서, 천하를 삼분했다. 이 금전과 권력이 교차하는 난세에 각로의 제후의 배후에는 모두 중요한 '자금줄'이 있었다. 위나라의 조홍(曹洪)은 만관(萬貫)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 부가적국(富可敵國)이어서 조조조차도 감탄했다고 한다: "나의 집안재산이 어찌 자렴(子廉)만 하겠는가?" 강동의 노숙(魯肅)은 여러 개의 천곡양창(千斛糧倉)을 가지고 있었고, 사병이 백명을 넘었다. 손권이 가장 의지하던 부상(富商)이었다. 촉한은 원래 최고부자인 미축(麋竺)이 유비를 따라다니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한때 '동객만인(僮客萬人), 자산거억(貲産鉅億)"의 부호가 결국 몰락하게 되었을까?​난세상고(亂世商賈) 권세지쟁(權勢之爭)​동한말기, 정치는 부패했고.. 2024.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