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호림익(胡林翼) : 상군(湘軍)의 대표인물

중은우시 2006. 10. 20. 14:40

상군(湘軍)을 얘기하면, 증국번(曾國藩)과 좌종당(左宗堂)의 두 사람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상군에서 경력이나 자격이나 실제 공헌을 놓고 보자면 당연히 익양 사람 호림익이 첫머리에 올라야 한다. 우선 경력을 보자면, 호림익이 귀주에서 병사를 이끌고 비적토벌(태평천국토벌)에 나섰을 때, 증국번은 북경에서 쉬고 있었고, 좌종당은 산림에 은거하여 있었다. 다음으로 자격을 보더라도, 증국번은 수효(守孝)의 몸으로 조직을 모았고, 좌종당은 사야(師爺)의 신분으로 군사에 참여했을 때, 호림익은 이미 봉강대리(封疆大吏)로서 호북성의 군사와 정치를 담당하는 신분이었다. 공헌으로 놓고 보더라도, 함풍말기에 장강의 상류하류의 군사배치, 전후방의 물자공급, 군대와 지방정부와의 관계처리등은 모두 호림익이 담당하였다. 증국번은 일찌기 상소문에서 "호림익의 재주는 신보다 10배는 뛰어납니다"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세월이 흐르면서 호림익의 랭킹이 상군의 세번째 인물로 바뀐 것일까?

 

여기에는 아마도 두 가지 원인이 있는 듯하다. 하나는 그가 너무 빨리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함풍11년 병으로 죽었는데, 50세가 되지 않았다.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3년후에 태평천국이 남경에서 망하는 것을 볼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가장 높은 평가나 상을 받지는 못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젊었을 때 행동이 바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의 행동때문에도 그는 역사적인 공적을 평가받을 때 아무래도 감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25세때 호림익은 진사가 되었고, 한림이 되었다. 소년급제하였으므로 앞날이 밝았다. 한림원에서는 일은 적고, 부인도 곁에 있지 않았으므로, 당시에 그가 북경에서 풍류를 즐긴 것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대청률>>의 규정에 따르면 관리가 매음을 하는 것은 장 60대를 맞아야 하는 큰 죄이고, 강급이나 파면의 처분까지 받아야 하는 것이다. 관리가 매음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어느 날, 호림익은 돌요인 주수창(周壽昌)과 함께 저녁에 창기를 찾았는데, 방졸이 나타났다. 주수창은 귀가 밝아 바깥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즉시 주방으로 달려가서 일꾼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난관을 넘겼다. 그러나, 호림익은 술에서 덜깨어 사태를 알고난 후에 침대밑으로 숨어들어갔다. 방졸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그를 찾아내었고, 신분을 대조한 후에 관리라는 것을 알았다. 호림익은 스스로 한림이라는 것을 부인하였지만, 그의 화려한 옷으로 인하여 뭐라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호림익은 저녁내내 굴욕을 참으면서 끝까지 한림임을 실토하지 않아서, 겨우겨우 그의 비위를 한림원에 통보하지 않는 선에서 끝낼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호림익은 주수창과 절교한다.

 

"동표공도(同표共賭)"는 친구간의 우의를 표현하는 말인데, 호림익과 주수창은 동표는 하였지만, 위기에 처했을 때 주수창은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는 주수창과 절교하였을 뿐아니라, 이후에 병사를 뽑을 때도 고향을 물어서, 주수창의 고향인 선화사람은 "뺀질뺀질하다"며 뽑지를 않았다. 선화(善化)는 바로 현재의 장사(長沙)이다.

 

이것은 호림익의 젊었을 때의 모습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특별히 상군내의 지위를 평가할 때 고려할 것같지는 않는데, 실제로는 고려가 되었던 것이다.

 

함풍시기에 호림익은 승진하여 호북순무가 되었다. 임명되어 일을 시작한 후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것은 바로 호광총독인 관문(官文)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호림익과 관문 간에는 두가지 면에서 서로 맞지 않았다. 첫째는 만주족과 한족이라는 민족차이였다. 둘째는 총독과 순무라는 같은 도시(武昌)내에서 어쩔 수 없이 부딪치는 행정적인 갈등이었다. 자금성에는 이런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성에 파견내보내는 만주족 관리들에게 내리는 글인데, 개략적으로 "한족은 우리와 동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쉽게 큰 권력을 내주어서는 안된다. 그저 일이나 시키고 뛰어다니는 역할을 하게 하면 된다" 관문은 이러한 교훈을 새겨서 호림익등 한족관리들을 그다지 신임하지 않았다. 총독과 순무가 같은 도시내에서 서로 인정하지 않고, 보이게 보이지 않게 갈등이 있던 것은 청나라 지방정치의 고질이었다. 직급으로 따지면 총독이 순무보다 높았다. 권한으로 따지면 두 사람은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총독에게는 순무를 견제하는 기능이 없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게 되면 할 수 없이 황제에게 가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풀어놓는 지방제도는 불합리하였지만, 중앙집권의 필요에는 맞았고, 지방에 강력한 지도자가 출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전에 한족 총독인 오문용이 만주족 순무인 숭륜의 핍박하에 군수물자없이 전투를 벌이다가 황주에서 사망한 사례도 있었다.

 

호림익은 비상수단을 써서 이를 해결했다. 호림익의 비상수단은 "이익양보"와 "화친"이다. 이익양보는 이해하기 쉽다. 즉 관문과 그 일파의 불법적인 수입을 눈감아주는 것이다. 예전부터 있던 것은 그대로 가져가게 하고, 예전에 없던 것은 방법을 강구해서 더 주면 된다. 이외에 관문이 더 이상 간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호림익은 "첩"을 공략한다. 관문은 그의 소첩을 매우 총애하였다. 하루는 이 첩의 생일에 널리 초청장을 보내어서 잔치를 베풀었다. 동료들이 총독의 부인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예에 부합하지만, 첩의 생일을 축하하고 예물을 보내는 것은 예에 맞지 않았다. 관문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고, 소첩이 요구하니까 그저 따라준 것이다. 그래서 초청장에는 첩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보냈다. 오는 손님들도 그저 모른척 넘어가 주기를 바란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생일을 맞이한 것이 본부인이 아니고 첩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모두 화를 내고 가버렸다. 바깥으로 나가는데 마침 호림익이 들어오고 있었다. 호림익은 그들을 붙잡고 "왔다가 왜 모두들 그냥 가십니까"라고 불었다. 관리 한명이 상황을 설명하고 그냥 밖으로 가버렸다. 그의 등을 보고는 호림익은 한 마디 했다. "기개있는 사람이군" 말을 마치고 그는 잔치장소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을 떠나려다가 순무가 들어가니 그냥 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남아서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첩의 생일잔치는 그런대로 무난하게 끝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당연히 소첩은 호림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호림익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소첩을 자기 모친에게 소개시켜주어 양녀로 삼게 하였다. 이러다보니 자신이 관문 총독의 양자형(姉兄)이 되게 되었다. 들리는 바로는 이 소첩이 항상 "호림익 오빠는 천하에 찾아보기 힘든 인재입니다. 네가 뭘 하느냐. 모르는 것이 있으면 호오빠에게 가서 물어봐라" 관문이 소첩이 시키는대로 하다보니 호북성은 매우 평화로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