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장정(長征)"이라는 용어는 누가 처음 사용했는가?

중은우시 2006. 10. 21. 13:51

작자: 고칙서(顧則徐)

2006년 10월 19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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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 70주년을 맞이하여 미디어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장정"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이 모택동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오류이다. 예를 들어, 2006년 10월 18일 전제된 "홍군간부의 부패토로, 최초의 장정일기는 공개출판될 수 없었다"는 <문회보>의 글은 이치로 따지면 전문가의 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 글에서 "중앙홍군은 제5차 반섬멸군사실패로 어쩔 수 없이 옮기게 되었는데, 그 목표는 홍2, 6군단과 회합하는 것이다. 즉 최초에는 '장정'의 계획이 없었고, '장정'이라는 말도 없었다. 국민당은 3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계속하여 중국공산당의 장정을 서찬(西竄, 서쪽으로 도망가서 구멍에 숨는다는 의미)으로 불렀고, 1935년 여름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이 회합한 후에 비로소 "서정(西征)"이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이것은 홍4방면군에서 먼저 썼던 말이다.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후에 1935년 12월, 모택동은 보고서에서 먼저 '장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장정은 선전대이고, 선언서이고, 파종기이다...' 이후 '장정'이라는 단어는 역사책에 기록되게 되었다" 여기서 작자는 '서찬' '서정' '장정'이라는 단어를 순서대로 열거하면서, 모택동이 가장 먼저 '장정'을 사용했다고 하고 있다. 이런 문장은 학술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도 여전히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장정뿐아니라 만리장정이라는 단어도 먼서 사용한 것은 홍군총사령관인 주덕(朱德)이었다. 주덕이 처음으로 장정이라고 이름한 것은 '만리장정'이라고 이름한 것이었다. 시간은 1935년 5월로, 주덕이 이족(彛族)지역에서 포고문을 반포하면서였다. 포고의 형식은 통속적인 운문을 사용하였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중국공농홍군은 약소민족을 해방시킨다.

일체의 이족, 한족평민은 모두 형제이고 친골육이다.

나쁜 사천군벌은 이족을 심하게 핍박했다

혹독하게 세금을 거둬가고 더구나 마구 죽여버렸다.

홍군의 만리장정은 그 기세가 파죽지세이다(紅軍萬里長征, 所向勢如破竹)

오늘 이미 천서(사천서부)에 왔으니, 이족의 풍속을 존중한다

군기는 아주 엄격하고, 실오라기하나 밤톨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양식은 공평하게 구매할 것이고, 돈은 충분히 지급하겠다

우리 이족 군중들은 절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루빨리 단결해서 함께 군벌을 몰아내자

이족정부를 설립하고 이족이 이족을 관리하자

진정한 평등과 자유는 다른 사람의 압박을 다시 받지 않는 것이다

노력하고 선전하기 바라며, 이것을 서촉(사천서부)에 퍼뜨리자.

 

포고문의 명의는 "홍군총사령 주덕"이다. 그 중의 아홉번째 문구가 "홍군만리장정"이다. 이것은 지금 보유한 역사자료중에서 "장정" 또는 "만리장정"을 가장 먼저 사용한 예에 해당한다. 모택동이 1935년 12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함을 논함"에서 쓰여신 장정보다 6개월여 앞섰다.

 

장정을 연구하다보면, 모택동의 말에 권위를 실어주는 것이 습관화된다. 그러나 역사의 원래의 모습을 복원한다는 각도에서 보면, 모택동보다 더욱 권위있는 사람, 또는 가장 지나치기 쉬운 또 한명의 권위자는 바로 주덕이다. 장정의 주요한 성격은 군사행동이고, 주덕은 최고군사사령관으로사 당연히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비록 정치운동의 각도에서 장정을 본다고 하더라도, 정치가 어떻게 움직이든지, 최종적으로는 군사행동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주덕을 통하여 군사명령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정의 역사는 이미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지도자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로써 장정은 모택동이 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이라고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장은 이전에 산속에서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던 할거 상태에서, 장정의 과정은 실질적으로 그러한 할거상태의 소멸을 의미한다.  바로 "주모홍군(朱毛紅軍, 주덕과 모택동의 홍군)"이 홍군을 통일한 것이다. 준의회의는 모택동의 지위를 확립하였지만, 더욱 의미있는 것은 "주모홍군"의 권위를 회복, 확립 공고히 한 것이었다. 사실상 장정개시후에 이덕은 지휘하기 힘들게 되어 군사지휘권을 부득이 주덕의 손에 돌려준 것이다. 사람들은 주덕의 숭고한 명망과 군사지휘기술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나 주덕은 당내의 혼란한 국면에서 직접적으로 처리할 능력은 없었고, 그래서 전력을 다하여 모택동을 불러낸 것이며, 다시 "주모홍군"의 국면을 만든 것이다. 국대를 장악한 주덕의 강력한 지지가 없었다면, 모택동은 근본적으로 실질적인 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준의회의가 바록 "주모홍군"의 지위를 확립하였지만, 군사행동의 각도에서 본다면, 모택동은 대내, 대외적으로 단독으로 명령이나 포고를 발포하할 법정의 지위에 있지 않았다. 이 지위를 보유한 것은 홍군총사령관 주덕이었다. 즉, 주덕은 모택동보다 장정시기에 더욱 권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장정문제에 있어서 주덕이 모택동보다 더욱 권위가 있다는 사실은 주덕은 장정을 전부 진행했으나, 모택동은 1년간의 장정만 진행했다는 점이다. 주덕은 2년의 장정을 진행하였다. 정치, 군사지도자들중에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주덕의 명의로 발포한 명령이나 포고가 반드시 주덕이 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장정기간동안, 주덕의 명의로 반포된 문건은 일부분만 본인이 직접 써서 반포한 것이고, 나머지 대량의 문건은 모택동등의 사람들이 주덕의 '법정' 지위를 빌려 반포한 것이다. 선전의 측면에서 홍군이 활동한 지역은 주로 서남지구였고, 주덕은 호국전쟁시기에 이미 서남의 명장이었다. 사회각계각층과 소수민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과 명망이 있었다. 주덕의 이름은 선전에서 아주 중요한 브랜드로 작용했다. 최초로 '장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포보군도 선전물이며 주덕의 명의로 반포한 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이다. 이 글이 주덕이 쓴 것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글의 스타일을 보면 되는데, 이 글의 스타일을 보면 바로 주덕의 스타일이다. 주덕은 시를 쓰는 것을 즐겼고, 좋아했다. 학생시대에 시를 짓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고 한다. 그는 아주 알아보기 쉬운 스타일로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위 포고문은 이런 주덕의 쉬운 글로 시를 쓰는 것과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이것을 보면 그가 직접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덕이 '장정'이라는 단어를 모택동보다 먼저 사용했을 뿐아니라, 중앙집단결의의 정식문건에서 보더라도 모택동의 1935년 12월의 글보다는 빨리 나타난다. 주덕에게 아무런 통지도 하지 않고, 모택동과 중앙의 다른 사람들은 팽덕회, 임표의 1,3군단을 데리고 돌연히 떠나갔고, 4방면군과 나뉘어진다. 1,3군단이 감숙의 러시아국경선에 도착하자, 1935년 9월 12일,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참가자는 장문천, 박고, 모택동, 왕가상, 개풍, 유소기, 드알, 채수번, 섭검영, 임백거, 나맥(이유한), 양상곤, 이덕, 임표, 섭영진, 주서, 나서경, 팽덕회, 이부춘, 원국평, 장순청 등이었다. <<장국도동지의 착오의 결정에 관하여>>를 작성하고, "2만여리장정"이라는 말이 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모택동은 단지 당이 최초로 장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참여했을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회의 때, 모택동이 회의개최전에 작성한 <<사방면군지도자의 논쟁 및 금후 전략방침에 관한 보고>>에서는 장정이라는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당시 모택동본인이 장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