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위 : 광창전역(廣昌戰役) : 1934년 4월
제5차포위섬멸전투중에, 홍1방면군 1, 3, 5, 9군단은 강서성 광창지구에서 보루를 쌓고 국민당의 국군의 진공을 방어하였다. 18일동안 힘들게 싸웠고, 결국 광창을 포기하였다. 5,093명이 전사했다. 국민당의 국군은 2,626명이 전사했다. 홍3군단은 2,705명이 전사하여 전군 총인원수의 1/4을 잃었다.
8위 : 서부전역(西府戰役) : 1948년 4월
서북야전군이 섬서성 보계(寶鷄)를 향하여 진공하였고, 연속하여 몇개 도시를 함락시켜 초기에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국군이 신속하게 반격하여, 해방군이 포위에 빠졌다. 나중에 1천여리를 싸우면서 도망쳐서 포위를 벗어났으나, 극히 낭패한 결과를 맞이하였다. 이 전투에서 1만5천여명이 전사했다.
7위 : 제1차 사평전역(四平戰役) 1946년 4월
동북연합군은 국군과 사평을 방어하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 1개월을 버티다가 나중에 철수하면서 국군에 추격당하여 천리이상을 도망갔는데, 8천명이 전사했다.
6위 : 상강혈전(湘江血戰) 1934년 11월
중앙홍군이 장정에 나섰을 때, 국국과 상강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6일간의 혈전을 거쳐 홍군은 상강을 넘어 위험에서 벗어났으나, 이 전투에서 병사 3만여명을 잃었다. 전군이 장정을 시작할 때의 8만6천명에서 3만명도 안되는 인원으로 줄어버렸으니, 손실이 참혹했다. 거의 전군몰살의 지경에 처할 뻔하였다.
5위 : 한국전쟁 5차전역 이동단계의 전투 1951년 5월
한국전쟁 5차전투에서 진공섬멸단계를 완성한 후, 지원군의 각 병단은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적을 너무 경시하다가 엄호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아, 미군의 신속한 반격을 받았고, 순식간에 미군과 한국군의 포위에 빠졌다. 주력부대는 위험에서 벗어났으나 3병단 60군의 180사단은 절반의 병사를 잃어서 거의 전멸이었다. 전체 전투에서 중국과 조선군은 8만5천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중 지원군의 사망인원이 7만5천명이었다. 이 때 실종자가 2만여명에 달하였는데,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 중 17,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 이외에는 아마도 역시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위 : 회옥산(懷玉山)의 패전 1934년말
방지민(方志敏)이 홍10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는데, 강서성 회옥산에서 국군 수십개 연대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나중에는 총알이 떨어지고 양식이 바닥나서 궤멸되었다. 전군 2만여명중에서 겨우 1천여명이 포위를 돌파했고, 방지민과 군단장 유주서(劉疇西)는 포로로 잡혀서 죽음을 당했다.
3위 : 환남사변(晥南事變) 1941년 1월
신4군 군부와 2개종대는 환남지구에서 국국 8개사단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10일간의 전투를 거쳐 전군 9천여명중에서 2천여명이 포위를 돌파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군단장 섭정(葉挺)은 포로로 잡혔고, 정치위원 항영(項英)은 전사했다.
2위 : 서로군(西路軍)의 전투. 1936년말
홍군4방면군 부대는 닝샤전투계획을 집행하기 위하여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나아갔고, 서로군을 결성하였다. 몇개월동안의 전투에서 전투력이 우세한 청해군벌 마가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는데, 전략적인 잘못으로 힘든 전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전군이 전멸당했다. 전군 2만1천여명중에서 1만여명은 전사하고, 6천여명은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대부분 도망쳤으며, 최후로 신강까지 온 사람은 겨우 400여명이었다.
1위 : 금문전역(金門戰役) 1949년 10월
제3야전군 10병단 28군은 금문도에 대하여 진공을 개시하였다. 전투를 급박하게 시작하는 바람에 운송선이 파괴되고, 후방의 지원이 끊어져, 3일간의 전투끝에 주력부대 총 9,086명중에서 몇 사람이 바다로 도망쳐서 살아남은 외에는 전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해방군의 전투사상 전부대원이 전멸당한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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