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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몽고왕야(蒙古王爺)의 지하보물을 찾아서...(I)

by 중은우시 2006. 11. 30.

작자: 유비룡(兪飛龍)

 

1.

 

중국에는 많은 성이 있고, 모두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장보(藏寶, 감춰진 보물)에 관한 전설이 있다. 신강에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대성(大城)"보물전설이 있고; 감숙에는 돌연 사라진 흑수국(黑水國)의 보물전설이 있고; 청해에는 마보방(馬步芳)이 황망하게 도망치기 전에 거액의 재산을 숨겨두었는데 아직 행방을 모른다고 하고; 산서에는 이자성이 숨긴 보물하나로 인하여 "진상(晋商)"의 휘황찬란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이자성이 대명황궁에서 가져간 금은보화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며; 사천에서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장헌충이 숨겨두었다는 천선진보(千船珍寶)를 찾아나서지만 아무도 얻었다는 사람은 없다; 석달개(石達開, 태평천국의 난때 마지막까지 저항한 인물)는 죽기 전에 대도하변의 모처에 거액의 재물을 숨겼다고 하며; 광동광서지역에는 태평천국의 보물이야기와 해적의 보물이야기가 무성하게 전해진다.

 

역사의 전적을 뒤적이면, 이러한 보물에 관한 이야기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다. 서한시대에 황금은 유통과 지급의 수단이었고, 상류사회에서 아주 성행했다. 유통중인 황금의 양은 매우 많아서 <<한서>>의 기재에 의하면 이 시대에 황제가 하사하는 황금만 90만근, 225톤에 달하였다. 그러나, 동한시대에 이르러 사회에서 유통되는 황금수량이 급격히 감소한다. 즉, 대량의 황금이 극렬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갑자기 신비롭게 소실된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지금까지 한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미혹에 빠트리고 있다.

 

이외에 길고긴 중국의 역사에서, 역사적으로 고증이 가능하나 신비롭게 실종된 문명이 10개가 넘는다. 서장의 고격(古格)왕조, 선진시기에 중경일대에서 활동했던 파국(巴國), 양한시기에 귀주, 운남일대에서 활약했던 야랑국(夜郞國)...이렇게 소실된 문명을 대하면 하나의 의문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긴 역사시기를 통하여 거액의 재산을 모으지 않았던가? 많일 그랬다면 그 재산은 도대체 어디에 숨긴 것일까?

 

이렇게 역사의 도도한 물결속에 흩어진 신비한 재산들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기괴한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중국인들은 명산대천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각종의 기록을 남기고 있으면서, 보물에 대하여는 거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역사전적을 뒤지더라도, 이런 전설에 대하여 조사하여 확인할 방법이 없다.

 

민간에 전해지는 실종된 보물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1년간의 준비를 거쳐 40여개의 민간보물전설을 수집하였고, 수십만자의 자료를 수집했다. 필자는 사직후에 이런 아무런 확인방법이 없는 민간의 전설을 찾아다녔다. 10년의 기자생애로 단련된 소양을 가지고 보물에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나 연구인원을 만나서 이런 허무맹랑한 전설을 조사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사람들에게 재미있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민간보물지도를 봉헌하고 싶었다.

 

2

 

길림성 전곽현(前郭縣) 합랍모도향(哈拉毛都鄕)에는 마지막 몽고왕공의 신비한 지하보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2005년 4월초, 필자가 이 신비한 전설을 따라, 전곽현성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시골의 작은 마을을 찾았을 때, 필자가 사용하는 연통의 핸드폰이 신호를 받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60여년전까지는 300여년간 이곳은 번화하였고 명실상부한 전곽이라사기(前郭爾羅斯旗) 심지어 동몽고의 정치중심이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이 시기에 이 마을은 곽이라사전기의 자사크, 보국공의 왕부(王府)가 소재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은 마을에 소재한 왕부에 관한 이야기는 멀리 17세기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명나라 말년, 여진부락의 애신각라씨가 흥기하였다. 기원 1615년, 이 부락의 수령인 누르하치가 황제를 칭했으니, 역사상 후금(그의 아들인 청태종이 1636년에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음)이라고 부르는 나라이다.

 

누르하치의 요청에 따라, 1624년, 곽이라사부의 구무(固穆)과 그의 형인 부무바(布木巴)는 커얼친의 타이지 아오바(奧巴)와 함께 후금에 귀부하였다. 이후, 커얼친의 제 부락은 여러차례 누르하치, 청태종을 도와 병사를 파병하여 도와 주었다. 1636년, 청태종은 숭덕으로 년호를 바꾸었고, 구무는 황실에 들어가서 보국공(輔國公)의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는 곽이라사전기를 통치했다.

 

곽이라사전기는 동서로 약 360리, 남북으로 500이이다. 여기에는 현재의 장춘(長春), 덕혜(德惠), 농안(農安), 장령(長嶺), 건안(乾安)등의 땅이 포함된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제1대 자사크 보국공 구무로부터 말기 기왕인 제묵특색목비륵(齊默特色木丕勒)까지, 명, 청 양대에 걸쳐 300여년간 지속되었다. 곽이라사전기의 왕부는 계속하여 합랍모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상에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보물에 대한 전설은 이 기의 마지막 왕공 제목특색목비륵(약칭하여 齊王爺)와 관련이 된다. 제왕야는 1874년에 태어났으며 구무의 11대손이고, 40여년간 재위하였고, 1942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제왕야는 이 300여년간 지속된 가족의 모든 문물, 문헌, 주보옥기, 황금백은을 계승했을 뿐아니라, 널리 재산을 모았고, 방원 수백킬로미터의 기름등 업종을 독점하였다. 세상사람들은 "날마다 한 말의 금이 들어가고, 날마다 한 말의 은이 들어간다"고 할 정도였다. 제왕야의 재위기간에 일련의 혁혁한 명호들을 얻게 되는데, 청나라 황조는 철리목맹맹장, 민국이후에는 다라패자, 다라군왕, 화석친왕, 만주국시절에는 몽만대신이 되었다. 가족산업이든, 정치권리든 모두 다른 동몽고왕공귀족들이 따라오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300여년간 번영했던 집안이며, 백만향(1향은 10무, 1무는 200평)의 봉지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개의 독점사업을 가지고 있던 봉건왕후가족이, 제왕야의 세 아들이 모두 어려서 요절하고, 왕야의 가업에 직계자손이 없어졌다. 거액의 가산, 역대황제가 하사한 황포마과, 정대화령 심지어 황제의 조서까지 모두 제왕야의 사후에 어디론가 모르게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제왕야의 재보는 왕부의 지하에 묻어두었을 것이라는 전설이 나타난 것이다.

 

3

 

제앙야의 재위기간(1897-1942)는 바로 근현대 중국의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막측하였지만, 제왕야는 오뚜기처럼 청나라가 망하고, 민국이 들어서고, 군벌이 할거하고, 일본이 침입하고, 만주국이 들어서는 변고에서도 끄덕없었다. 그리고 권력은 계속하여 확장하여 갔다.

 

부친이 정신분열증을 앓았으므로, 1897년 3월, 나이 겨우 23세인 제묵특색목비륵은 철리목맹의 부맹장에 임명되었다. 얼마되지 않아. 그는 철리목맹의 맹장 겸 병비자사크의 직위를 얻어냈고, 철리목맹의 10개 기의 맹장의 보좌에 올랐으며 철리목맹의 풍운아가 되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제왕야의 권위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타이(烏泰)의 반란사건이후, 민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봉호를 받았다. 우타이는 커얼친 우익전기의 자사크 군왕이며, 철리목맹의 부맹장이었다. 1911년 11월(선통 3년), 외몽고의 철포존단파호도극도가 독립하여 황제를 칭하였다. 그리고 비밀서신을 보내어 내몽고의 각기가 중국에서 벗어나 외몽고에 가입하도록 요구하였다. 우타이는 적극적으로 호흥하였고, 특사를 보내어 철포존단파를 접견하였으며, 무기탄약과 다른 원조를 약속받아냈다. 세심하게 기획한 후에, 우타이는 철리목맹의 각 몽고기의 왕공들에게 비밀서신을 보내여 각기에서도 호응하여 한꺼번에 행동하자고 하였다.

 

1912년 (민국원년) 8월 20일, 우타이는 사방에 "동몽고독립선언"을 반포했고, 정식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동시에 병사를 셋으로 나누어, 조남부와 백성등으로 진공했다. 철리목맹의 각기는 커얼친우익후기 자사트, 보국공 라시민주얼이 병사를 보내어 반란에 가담한 외에 다른 기의 왕공들은 모두 유예하며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원세개는 적시 급전을 보내어 봉천도독 조이손등에게 광이라사전기의 움직임을 주의하고, 진압과 위무의 수단을 이용하여 반란을 진압하라고 하였다.

 

길림도독 진소상은 원세개의 비밀전보를 받은 후, 곽이라사전기 몽고와 한족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고, 제왕야가 철리목맹의 맹장이며, 각 몽고의 기들이 관망하고 있으므로 재빨리 45여단의 배개훈으로 하여금 군사를 보내어 곽이라사전기를 핍박하도록 하였다.

 

이후, 제왕야는 맹장의 명의로 공고를 내어, 전맹의 각기에게 구룬에 투항하지 말 것을 알리고, 우타이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후, 제왕야는 공화제를 지지하며, 민국에 귀순하였다. 반란을 반대한 공으로 보국공은 일약 다라패자(多羅貝子)로 승격되었다. 1913년(민국2년), 다시 동몽고를 보호한 공으로 다라군왕(多羅郡王)에 올랐다. 1914년 4월(민국3년)에는 다시 화석친왕(和碩親王)의 작위를 받았다.

 

만주국시절에는 제왕야는 개국공신으로 "내몽고흥안총서총장", "몽정부대신"이 되어 만주국의 6성, 19기의 몽고사무를 담당하였다.

 

제왕야는 일생동안 정치에 있어서 순조로왔던 것을 보면, 비록 20세기 전반에 혼란기였지만, 제왕야의 재산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제왕야가 철리목맹장이 된 후 얼마되지 않아, 크게 공사를 일으켜, 1908년에 왕부를 짓기 시작한다. 장인들은 모두 북경에서 불러왔고, 전체 왕부의 양식은 북경의 관저의 배치를 모방하였다. 모든 중요한 건축원자재는 모두 북경에서 미리 정했고, 큰 목재는 백두산에서 세심하게 고른후에 수로를 통하여 운송해왔다. 모든 왕부를 짓는데 모두 5년의 시간이 걸렸고, 1914년(일설에는 1916년)이 되어서야 완공할 수 있었다.

 

제왕야의 거액의 재산은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왕야에 묻혀 있다는 소문이 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새로 지은 왕부의 담장은 105장이고 높이는 1장55이다. 전체 면적은 457무5푼이며, 4각과 서쪽벽에는 포루(砲樓)를 설치했다. 왕부에는 동문, 남문을 두었고, 동문은 측문이고, 남문이 정문이다. 동문은 넒이가 1장3척이고, 높이가 9척6척이다. 남문은 넓이가 1장6척이고, 높이는 9장6척이다. 양문은 모두 양쪽에서 여는 나무구조로 되어 있고, 주홍색이며 쇠잎을 새겨넣고, 금못을 박아넣었다. 문앞의 계단은 길다란 청석돌로 만들었다. 양측에는 각각 한 마리씩 큰 돌사자를 세웠다. 한가운데는 길이 3장의 영벽이 있고, 영벽의 앞뒤에는 편액을 걸었다. 앞면에는 "접복(接福)"이라고 적고, 후면에는 "영상(迎祥)"이라고 적었다. 영벽의 뒤, 대문의 앞에는 4간의 기간(旗杆)이 있다. 기간의 아래는 직경 1척8촌이고, 높이는 3장여가 된다. 꼭대기에는 화려하고 눈부신 풍마동구슬이 있다. 기간의 양측에는 각각 6개의 말매는 나무막대가 있고, 꼭대기에는 정교한 원숭이상을 장식했다.

 

집안의 구조는 방은 주로 회랑식 건축이며, 엄격한 등급제에 따라 만들었다. 집은 좌. 중, 우의 세개 부분으로 나뉘는데, 모두 7겹이고 640간의 방이 있다.

 

첫째 집은 영빈관이다. 양측에 객청, 객방이 있고, 손님과 일하는 관리를 접대하는 곳이다. 영빈관의 동서상방의 뒤에는 병영(兵營)이 있는데, 동서 각 11간이다. 왕부의 병사 1개중대가 있었는데, 나중에 1개 대대로 늘어난다.

 

둘째 집은 왕야의 인무처(印務處)이다. 대당과 뇌방, 문무관리의 주택이 있는데, 속칭 아문궁(衙門宮)이다. 도장을 관리하는 관리 "백근달"이 왕야의 행정사무를 책임졌다. 경제, 세무징수등이 그것이다. 대당에서는 소송을 처리하고, 죄인을 심문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채짹, 금속농(金屬籠), 노호등등의 형구가 있다. 뇌방은 일반뇌방, 사뇌, 수뇌의 세가지가 있다. 이외에 왕부에는 '대조총국'이 있는데, 장춘, 농안, 덕혜등의 현의 조세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다섯째 집에는 불당을 두었다. 석가모니, 천수천안불상이 있었다. 왕야와 부인, 아가씨들이 복을 빌고 재앙을 쫓는 장소이다.

 

여섯째 집은 왕야의 침원이다. 정방 7간이 있는데, 속칭 7간방(七間房)이다. 동서상방이 각 5간이다. 정방에는 쌍룡이 새겨지고 금룡이 기둥을 타고 오르는 매우 화려한 곳이다.

 

집안의 기둥이나 처마등에는 모두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새 물고기 꽃 산수 인물이 정교하게 새겨져 마치 살아있는 것같다. 정방의 양측에는 각각 하나씩의 이실(耳室)이 있다. 이실의 옆에는 각각 하나씩의 월량문(月亮門)이 있어, 화원과 측원에 통하게 되어 있다. 실내에는 푸른벽돌을 깔았다. 아래에는 연화도(煙火道)가 깔려 있어, 겨울에 난방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왕부의 화원은 서ㅉ고에 있다. 심은 꽃의 종류만 1800여종이다. 화원내에는 과수원, 가산, 꽃밭등이 있다. 과수원에는 해당, 추과등을 많이 심었다. 가산은 인공으로 쌓아서 만들었으며, 위에는 여러개의 정자를 만들었다.

 

5.

 

제왕야가 점유하고 관할한 토지는 모두 100만경이상이었다. 매년 거둬들이는 조세만도 백은 수십만냥이었다. 여기에 새로이 개간하면서 거둬들이는 조세, 관할지역인 6성 19기의 진공납세액은 엄청났다. 그가 보유한 금은재보는 부지기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큰 가업에, 후계자가 없었다. 현지의 백성들 말에 의하면, 주요한 원인은 왕야가 음양택(陰陽宅)을 잘못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왕야는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부인을 두었는지에 대하여 학설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셋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넷이라고도 한다. 이외에 색복진(色福晋)과 측복진(側福晋)에 대하여는 누가 둘째부인이고 누가 셋째부인인지 누가 병으로 죽고, 누가 목을 매어 자살하였는지에 대하여도 서로 다른 얘기가 전해진다.

 

전설중의 제왕야의 첫째부인은 한 민녀(民女)였는데, 자식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복진(福晋, 정실부인)'으로 봉해지지 못했다고 한다. 제왕야에게 사료에서 고증되는 복진은 모두 세명이다.

 

대복진(大福晋)은 오한기(敖汗旗)의 색릉단로포군왕의 여동생이다. 사람들이 노복진이라고 부르는 여인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 대복진은 사람이 현숙하고 온유했다고 한다. 데리고 온 시녀이든 아니면 왕부내의 다른 시녀나 종이건 간에 모두 부드럽게 대하였다고 하며, 왕부의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대복진은 일생동안 모두 삼남이녀를 둔다. 장자는 달목림왕길륵인데 사람들이 공대야(公大爺)라고 불렀다.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은 모두 어려서 요절한다. 달목림왕길륵은 광서22년(1896년)에 태어나고, 광서32년(1906년)에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간다. 거기서 자희태후로부터 화령응 하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는 나중에 장작림의 동생인 장작상(나중에 길림성장이 됨)의 딸과 결혼한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해서 달목림왕길륵은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폐결핵에 결렸다. 제왕부에 많은 돈을 들여 치료하려고 했으나, 결국 장춘에서 죽고 만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죽자 자결하고 만다. 이 일은 당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그 처는 당국에 의하여 열녀로 추앙되고, '절렬가풍(節烈可風)"이라는 금자(金字)로 만든 편액을 받는다.

 

대복진이 낳은 두 딸은, 큰 딸은 라시마라고 하는데 18살때(선통3년, 1911년) 동토목특석기덕패자의 아들에게 시집간다. 결혼후 2년만에 남편이 병으로 죽는다. 오래지 않아 그녀도 정신병을 얻어, 1944년 제왕부로 돌아온다. 다음 해에 죽었다.

 

둘째딸은 천진의 최씨성의 공자에게 시집간다. 남편은 대학생이었다. 이 최씨 공자는 다른 여자가 생겨 둘째딸은 버려지게 된다. 이후 둘째 딸은 왕부로 돌아와서 홀로 생활한다. 만주국 후반기에 북경으로 다시 돌아간다. 일본이 투항한 후에, 국민당이 장춘을 점령하자 그녀는 북경에서 장춘으로 간다. 제왕야의 장춘에 있는 부동산을 팔아치운다. 나중에 북경에서 병사한다.

 

제왕의 둘째부인(측복진)은 길림 동대인 동병권의 동생이다. 만주족이다. 그녀는 제왕야와 결혼하기 전에, 그녀의 오빠는 그녀가 결혼후에 자녀를 낳아서 대복진 소생의 자녀들과 다툴것을 우려하여, 그녀에게 불임약을 먹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후 10여년간 자식을 낳지 못한다. 그녀는 젊어서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웃기를 좋아하였으며 활동하는 것을 즐겼다. 제왕야가 죽은 후에는 그녀의 성격이 기괴하게 변하여 시도때도없이 시녀들에게 화를 내고, 어떨 때는 시녀를 매달아 때리기도 하였다. 1946년 봄에 곽란전염병이 돌아 왕부에서 병으로 죽는다.

 

제왕의 셋째부인(색복진)은 자루터기의 사람이다. 그녀의 오빠인 단필찰랍삼은 당시 곽전기 아라가묘의 라마였다. 그녀의 이름은 색력마(色力瑪)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색복진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토지개혁때, 금은보석을 가지고 라마를 따라 왕야묘(지금의 울란하오터)로 도망친다. 나중에 왕부돈의 농회에 붙잡혀 오고, 한달여만에 농회대원에서 목을 매어 죽는다.

 

제왕의 셋째부인 색복진은 1남3녀를 둔다. 남자 아이는 아홉살 때 죽는다. 셋째딸은 결혼후에 장창병에 걸려 죽는다. 넷째딸은 울란하오터로 시집간다.

 

제왕야는 3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아들 하나도 마지막에는 건지지 못하게 된다.

 

6.

 

오랫동안 제왕부의 지하에 보물이 있다는 것은 계속 의문으로 남아 있었고, 합랍모도의 상공에 구름처럼 퍼져 있었다.

 

합랍모도의 제왕부는 현재 어떤 모습일까? 거기에는 도대체 지하금고가 있는 것일까? 현지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과거 수십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보물을 연구하고 관심가졌을까? 그들은 찾았을까?

 

2005년 청명절에, 이런 의문을 가지고, 간단한 짐을 싸서, 심양에서 길림으로 갔다. 그러나, 필자의 첫번째 방문지는 합랍모도가 아니라 전곽현성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강희(姜喜)라는 사람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강희는 필자가 1년전부터 제왕야의 지하보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전곽현성의 현지 웹사이트에서 나는 그가 쓴 제왕야의 지하보물에 관한 글을 보게 되었고, 웹사이트 책임자의 도움으로 그와 연락할 수 있었다. 둘은 전곽에서 만나서 얘기하기로 약속하였다. 내가 길을 떠나 그를 만나러 가지 며칠 전에, 그는 막 국유양고공회주석의 위치에서 퇴직하였고, 그는 쉬는 생활이 적응되지 않아서 마침 감기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차가 전곽에 이르자, 나는 머물 장소를 정한 후에, 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후에 호텔로비에서 기다렸다. 개략 30분쯤후에 청수한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나는 온 사람이 강희라고 느꼈다. 그래서 맞이하러 갔다. "강선생님?" 노인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강희는 아주 조심스러운 노인이었다. 우리가 같이 방으로 갔을 때, 본인은 본인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는 크게 웃으면서,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내가 처음 그에게 전화를 했을 때 그는 심양에서 일하는 조카에게 부탁하여 내가 일하던 기관에 가서 나의 상황을 탐문해두었던 것이다.

 

지연과 역사적인 원인으로, 제묵특색목비륵은 현지에서 핫이슈가 되는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현지에는 박물관도 개설되었고, 거대한 제왕부의 복원모형도 있어서, 전시실의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두었다. 그러나, 이런 연구자들이 연구하는 출발점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역사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강희만이 단도직입적으로 직접 "장보"라는 이 주제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7.

 

제왕야가 보물전부를 지하에 묻었다는 소문은 1946년 합랍모도에서 시끌벅적하게 토지개혁운동을 벌일때부터 나타났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한 후, 공산당, 국민당, 호자(胡子, 土匪를 말함)의 세 세력이 서로 밀고당기고 있었다. 장춘에서 서남으로 200여킬로미터 떨어진 합랍모도의 왕부둔(王府屯)의 농민들, 여기에는 장기간 제왕부 내외에서 제왕부를 위하여 일하던 노비, 용인, 전호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공산당의 영도하에 "왕부둔농민협회"를 결성하였다.

 

농회가 성립된 후, 첫번째 임무는 토호를 타도하고, 악패와 싸우며, 토지와 재산을 똑같이 나눠가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땅의 최고부자는 제왕부였다. 그러나, 농회간부가 현지의 농민을 데리고 제왕부의 창고와 내실을 열었을 때, 안에는 양식, 베, 가구, 기물등 일상용품이 조금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귀중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제왕부의 수백년의 기업을 생각하고, 매년 수십만냥의 백은수입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겨우 이 정도 재산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농회는 즉시 왕거둔에 흩어져 있는 원래 왕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단서를 제공해달라고 하였다. 이런 일하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제왕야가 사망한 이후에 왕부에서 외부로 물건을 나르는 차량을 본 적은 없다고 하였고, 아무도 외부로 물건을 나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옛날 왕부내의 금은재보, 골동문화재등 귀중한 물건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지하에 묻었다는 말인가?

 

제왕부의 거액의 재산을 추적하는 일은, 당시 농회의 핵심임무가 되었다. 이것은 권력공백기에 왕부둔이 현지의 유명한 부자가 모여있던 곳이어서, 거의 매일 각 토비들이 노략하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보통사람들의 집에 있는 재산도 거의 다 털맀고, 토비들로부터 피해를 입을까봐 땅에 종자를 심지도 않아서, 황폐해졌다. 그래서, 농회는 급히 돈을 모아서 현지 백성들이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외에 농회는 자위대를 조직하여 전쟁전선의 업무도 지원하여야 해서, 돈이 필요했다.

 

제왕부의 수백년간 쌓인 방대한 재산을 찾아내기 위하여, 왕부둔의 농회는 비밀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전문적으로 지하금고를 추적하고 조사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동시에 군중들에게 왕부지하보물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제왕야, 대복진, 측복진은 이미 죽었다. 몇몇 딸은 이미 멀리 시집가 있었다. 왕부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인 색복진, 제왕야의 기타 본가 사람들, 제왕야의 비서, 친척, 심복들은 모두 토지개혁전에 멀리 도망쳐 버렸다. 남아 있는 일반 사람들로서야 높은 담장 안의 왕부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지 없는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제왕부안에 지하금고가 있는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농회의 태도는 아주 확실했다. 반드시 제왕야의 보물을 추적하여 진상을 밝히겠다는 것이었다. 대량의 조사와 방문을 거쳐 농회는 목표를 제왕야의 셋째부인 색복진에게 집중시켰다. 그녀는 귀족출신이고, 아라가묘 활불의 여동생이며, 본인이 또한 재주가 뛰어나서, 제왕야도 생전에 그녀와 많은 일을 상의했었다. 더구나 그녀가 제왕야의 막내아들 청고길(淸古吉)을 낳은 이후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져서, 말하는 것마다 따랐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당시 살아있는 왕부의 사람중에서 색복진이 왕부의 지하보물창고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색복진은 이미 몇개원전에, 토비가 왕부에 들어가 강탈해갈 때, 도망쳐서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농회는 드러나게 드러나지 않게 조사를 하여 마침내 색복진이 아라가묘의 한 라마와 함께 7,8백리 떨어진 왕야묘(울란하오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농회는 비밀체포조직을 결성하였다. 두목이 바로 강희의 의부(義父)인 우만강(于萬江)과 부친인 강정방(姜正方)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두 사람이 일찌기 제왕부에서 잠시 일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만강은 제왕부에서 일을 했고, 강정방은 물긷고 청소하는 잡일을 했었으므로 모두 색복진을 알았다.

 

1947년봄, 추적소조가 우만강과 강정방의 지휘하에 내몽고로 출발하였다. 당시 울란하오터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ㅇ므로, 왕부둔에서 울란하오터로 가는 길에는 적지 않은 곳에서 토비가 출몰했고, 지주무장세력과 국민당군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추적소조는 굶주려서 도망친 사람으로 위장해서 계속 북으로 갔다. 천신만고끝에 울란하오터에 있는 색복진의 친척집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8.

 

당시의 환경하에서, 색복진에 대하여 추적소조는 현재 범인을 잡아오는 것처럼 그녀를 붙잡아 올 수도 없었고, 그녀에게 고향으로 돌아와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왜 그녀를 붙잡으려고 하는지 진정한 목적을 말해줄 수도 없었다. 추적소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향사람이라는 신분으로 그녀를 구슬려서, 그녀에게 고향주위에는 이미 토비들이 사라졌고, 모두 팔로군에 의하여 소탕되었으며, 토비들이 다시는 왕부둔을 넘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그녀가 떠난 후에 왕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더 황량해 질 것이며, 돌아간 다음에는 모두 그녀를 잘 알고 있으므로, 그녀에게 어떻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만일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남아 있다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돌아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아마도 제왕야가 지하에 묻어둔 재물이 생각나서인지, 아마도 울란하오터가 해방되고 나면 자기가 죄인이 되어 왕부둔에 압송될 것이 걱정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며칠간의 설득끝에 색복진은 추적소조를 따라 함게 왕부둔으로 돌아왔다.

 

타초경사를 피하기 위하여, 세밀하게 작전을 짜서, 농회는 이렇게 결정했다. 잠시 아무도 제왕부를 들어가거나 소란피우지 말고, 색복진의 식사를 제대로 하도록 책임지며, 동시에 원래 색복진의 수하였던 여자노비 호기목격을 찾아와서 그녀에게 보내주어, 색복진의 마음이 안정되도록 해주었고, 그녀가 스스로 숨겨진 보물의 비밀을 털어놓도록 할 작정이었다.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암중으로 색복진의 언행을 감시했다. 농회는 또한 몰래 총을 숨긴 농회의 여부구회 동주임을 파견해서 색복진의 생활을 돌봐준다는 핑계로 그녀와 밤낮을 같이 했다.

 

감시보호과정에서, 부구회의 동주임과 여자노비 호기목격은 계속 색복진에게 당의 정책을 선전했고, 현재의 형세를 설명했으며, 그녀가 진정으로 인식하고, 인민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봉건통치계급은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공을 세워 과오를 메꾸고 과오를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져서 인민과 함께 혁명을 하면 혁명동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외에 농회의 지도자는 자주 그녀와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었으며, 정책을 선전하고, 인생을 얘기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색복진의 마음은 점점 풀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우회장과 술을 마시고 얘기하는 과정에서, 색복진은 아주 감동적으로 말했다. "이번 농회의 나에 대한 교육으로 나는 공산당의 정책이 인정에도 맞고 이치에도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농회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곤란한데도, 나의 생활을 이렇게 잘 보살펴주고 있다. 비록 이전만은 못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아주 행복하고, 만족을 느낀다. 나의 고마운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내가 수십년간 개인적으로 모아온 재산을 농회에 내놓겠다. 공을 세움으로써 이전의 잘못을 속죄받고, 관대한 처리를 받도록 하겠다"

 

색복진은 우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원래 제왕부의 침실 북쪽벽의 세번째 지면벽돌아래로 삼척을 파면, 쇠로 만든 네모난 상자가 나올 것인데, 안에 있는 물건이 만금의 가치가 된다고. 농회간부는 색복진이 가르쳐준대로 재빨리 파서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의 물건을 조사하니, 상자안에는 황금20근, 백은 20근, 각종 금시계 20개, 각양각색의 금은, 보석, 진주, 마노 32개, 각종 골동품 12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