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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시검교(施劍翹)의 복수사건

by 중은우시 2005. 8. 13.


시검교가 부친의 복수를 위해 손전방을 죽인 후 뿌렸다는 전단지.

 

중화민국(中華民國)시절의 정계에는 암살사건이 유난히 많았다. 도성장(陶成章), 송교인(宋敎仁), 정여성(鄭汝成), 진기미(陳其美), 탕화룡(湯化龍), 서수쟁(徐樹錚), 장소증(張紹曾), 요중개(廖仲慨), 소표평(邵飄萍), 사량재(史量才, 양행불(楊杏佛)등이 모두 암살당해 사망했다. 왕정위(汪精衛)도 일찌기 자객으로부터 중상을 입은 적이 있고, 송자문(宋子文)도 자객의 공격을 받은 바 있다. 이런 정치적 암살은 역사에 여러가지 의문을 남겼다. 이외에 복수를 위하여 이름난 인물을 암살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산동성정부 부총참의인 정계성(鄭繼成)은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직계(直係, 직예군벌로 지금의 북경을 근거지로 한 군벌세력이다) 대군벌인 "구육장군(狗肉將軍) 장종창(張宗昌)을 암살하였다.

 

그러나, 민국시절의 암살사건으로 가장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시검교(施劍翹, 1905-1973)라는 여인이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당대의 대군벌 손전방(孫傳芳)을 암살한 사건일 것이다.

 

시검교는 원래 이름은 곡란(谷蘭)이고 안휘성 동성(桐城)출신이다. 부친은 시종빈(施從濱)으로 산동군무방판 겸 봉계(奉係, 봉천군벌로 지금의 심양을 근거지로 한 군벌세력이다) 제2군의 군장이었다. 1925년 11월경 직봉대전(直奉大戰, 직예군벌과 봉천군벌의 싸움)중에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때 대군벌 손전방은 전시의 포로는 죽이지 않고,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어기고, 시종빈을 처형하고, 효수하여 머리를 안휘 방부(蚌埠)역전에 걸어두었다.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시검교는 부친을 위하여 복수하기로 하고 시를 지어 맹세하였다.

 

戰地驚鴻傳耗   전장터에서 놀란 기러기가 나쁜 소식을 전해왔네.

閨中疑假復疑眞   규방에서 들으니 거짓말 같기도 하고, 다시 진짜같기도 하다.

背娘偸問歸來使   모친 모르게 돌아온 사람에게 물어보고

懇叔潛移劫後身   숙부에게는 부친의 시신을 거둬달라고 부탁한다.

被孚犧牲無公理   포로로 잡힌 사람을 죽이는 건 공리에 맞지 않고

暴屍懸首滅人倫   시신을 거두지않고 목을 걸어두는 건 인륜을 망각한 짓이다.

痛親誰識兒心苦   누가 있어 자식들이 얼마나 가슴아픈지 알 것인가.

誓報父仇不顧身   부친의 원수를 갚는데 내 한몸 돌보지 않으리.

 

당시에 여자로서 직접 나서기가 힘들고, 특히 손전방은 백만대군을 거느린 거대군벌이었으므로 시검교는 우선 숙부의 아들인 시중성(施中誠)을 찾아간다. 시중성은 어려서 부친을 잃고 시검교의 부친인 시종빈이 거두어 자식처럼 길렀고, 성의를 다하여 교육시켰다. 시중성은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시종빈의 도움으로 군내에서 승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시종빈이 죽은 후 그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연태경비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승진해 있었다. 시중성은 철골대한도 아니었고 은혜를 반드시 갚고자 하는 대장부도 아니었다. 그는 백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자신의 양양한 전도를 망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검교는 그와 형제자매의 의를 끊는 서신을 남기고 떠난다.

 

3년이 지난 후 시검교는 다시 한 사람을 만나 부친의 복수를 부탁한다. 그는 시정공(施靖公)인데 바로 시중성의 보정군관학교 동기생이었다. 시정공은 당시 산서군벌 염석산의 아래에서 첩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시검교로부터 부친이 해를 당하였다는 말을 듣자 비분강개하며 동정을 표시하였고, 가슴을 치면서 시기가 되면 자신이 시검교를 대신하여 복수를 해주겠다고 하면서, 분신쇄골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시검교는 그를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늘이 자신을 버리지 않아 이런 남자를 보내주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시집가게 된다. 그런데, 결혼후에 시정공은 계속 미루기만 하고 장인을 위하여 복수는 하고자 하지 않았다. 어느날 시검교가 결혼전의 약속을 꺼내며, 재촉하자 "너는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냐. 이리와 양의 원한은 영원히 청산될 수 없는 것이다. 손전방은 흡혈마왕이고, 일생동안 엄청나게 사람을 죽였으며, 원한을 맺은 원수도 부지기수이다. 불의를 행한 자는 스스로 멸망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가서 그의 개같은 목숨을 뺏지 않더라도 자연히 누군가가 그를 손보게 되어 있다"라고 교묘히 변명하였다.

 

시검교는 시정공이 약속을 저버리는 겁쟁이로 생각하고 희망을 접었다. 1935년 6월에 시검교는 아이를 데리고 산서 태원을 떠나 천진의 친정으로 돌아온다. 떠나기 전에 또 한 수의 시를 지었다.

 

一生犧牲爲父仇  일생을 희생한 건 부친의 복수를 위함인데

年年不報使人愁  해가 가도록 원수갚을 생각은 않으니 걱정뿐이네

痴心願望求人助  헛되이 다른 사람이 도와주도록 바랐으나,

結果仍須自出頭  결국은 스스로 나서는 수밖에 없겠구나

 

이후 시검교는 천진에 가서 당시 천진에 있던 손전방의 행적을 계속 추적한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도 늦지 않다고 하였는데, 부친이 사망한 지 꼭 10년째 되는 1935년 추석에 처음으로 프랑스조계지역의 영화관입구에서 손전방의 차량번호 1093번 검은색 승용차를 발견하고 검은 안경을 낀 손전방을 멀리서 본다. 이후 손전방의 집주위를 탐색하고 이름을 바꾸어 손전방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한다.

 

그러던 중 1935년 10월 3일(음력) 천진 일본조계의 화원가 관음사에서 부친의 10주기를 위하여 법회를 거행하던 중에 부명스님으로부터 손전방이 매주 수요일 법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후 1935년 11월 13일 시검교는 브라우닝 권총을 준비하고 법회에 참석해서 손전방에게 접근하여 머리를 쏘아 즉사시킨다. 

 

시검교는 "여러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친을 위하여 복수한 것입니다. 절대 무고한 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가방에서 전단을 꺼내서 뿌렸다.

 

"여러 선생님들께 드립니다. 첫째, 오는 시검교(원명 곡란)은 손전방을 죽였는데, 이것은 부친 시종빈의 복수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 상세한 상황은 제가 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읽어봐 주십시오. 셋째, 큰 복수는 이미 하였으니 저는 법원에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넷째, 불당이 피를 뿌리고, 여러분을 놀라시게 해서, 거사림과 여러 선생님들께 죄송합니다."

 

전단의 뒤에는 2개의 시를 써서 부친을 위한 복수를 한 심정을 적었다.

 

父仇未敢片時忘, 부친의 원수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

更痛萱堂兩霜。 모친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샌 것이 더 가슴아프다

縱怕重傷慈母意, 모친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 겁나지만

時机不許再延長。 시간은 더 이상 미루지를 못하게 하였다

 

不堪回首十年前, 십년 전의 일은 감히 되돌아볼 수가 없고

物自依然景自遷。 사물은 그대로지만 상황은 바뀌었네

常到林中非拜佛, 절에 자주 온 것은 부처에게 절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劍翹求死不求仙    검교는 죽기를 원할 뿐, 신선이 될 생각은 없다.

 

당시의 신문들에서는 시검교의 행위에 대하여 동정적이었고, 살인마 손전방을 죽인데 대하여 오히려 통쾌해하는 편이었다. 재판과정에서 시검교는 제1심법원으로부터 10년형을 언도받고, 변호사를 통해 항소하여 천진고등법원에서는 7년의 유기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전국부녀회, 강녕, 양주, 강도부녀회, 안휘학회, 안휘성 휘주사범대학등에서 시검교를 사면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시종빈과 교분이 있던 풍옥상 장군은 이열균 장계등과 연합하여 민국정부에 부친의 복수를 한 효녀이고 백성을 위하여 해악을 제거한 협녀 시검교에게 특사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시검교가 감옥에 들어간지 1년쯤 지난 1936년 10월 20일에 중화민국 최고법원은 특사령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