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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요방18

시진핑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글: 초일정(楚一丁) 중공 20대이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시진핑은 직접 중공정치국상위들을 이끌고 샨시(陝西) 북부로 가서 옌안(延安)정풍운동을 기념하고, 중공7대회지(會址)를 방문했다.그후 다시 허난(河南) 안양(安陽)으로 가서 홍기거(紅旗渠)를 시찰하면서, 사회주의는 목숨을 걸고 얻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공은 20대이후 좌경화의 추세가 명백해졌다. 예상가능한 것은 이후 5년 내지 10년동안, 이로 인한 당(黨)과 민(民)간의 갈등이 신속히 첨예화될 것이다. 주목할 점은 중공고위층도 이미 미래 중국사회에 당과 민간의 대립이 첨예화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미리 그 준비를 하고 있다. 새로 선임된 중공중앙서기처에는 사상유례없이 경찰과 특무계통을 장악하고 있는 관리가 3명이나.. 2023. 1. 12.
백지혁명(白紙革命)의 배후는...? 글: 대종사(大宗師) 시진핑이 등극한지 1달도 되지 않아서, 시진핑을 타도하자는 백지혁명이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그 기세는 맹렬하고, 광범위하여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백지혁명이 이처럼 단기간내에 성숙되고, 체계를 갖추며, 현대의 방식으로, 통일된 보조, 강령을 내놓으며, 동시에 전국 각지, 각 대학에서 신속히 전개된 것을 보면 그 배후에 강력한 정치적세력이 계획하고, 조율하고, 조종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세력은 공산당과 정부의 내부에 있다. 시진핑이 일거에 조사해서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사하도록 시키는 사람이 아마도 그 세력의 앞잡이이거나 혹은 동정하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공산당의 건국후에 일어난 모든 민변(民變)의 배후.. 2022. 11. 30.
경풍(慶豊)의 죄는 홍헌(洪憲)의 백배이다. 글: 진숙함(陳淑涵) 당대 중국제일남아, 즉 중공건정이래 단독으로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내건 펑자이저우(彭載舟) 선생은 중공20대 전날, 베이징 쓰통차오(四通橋)에 플랭카드를 내걸어 국적 시진핑을 토벌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이런 영웅적인 장거를 해냈으니, 천지가 놀라고 귀신이 눈물을 흘릴 일이다. 펑용사의 영웅적인 기개에 감동받아, 필자는 그의 토적격문인 를 자세히 읽어보았으며,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글은 중공건정이래 전체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한 웅장한 글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이며, 진실함과 절실함이 들어 있어, 읽는 사람의 피를 끓게 만든다! 펑자이저우 용사는 당금의 국적 시진핑을 1백여년전의 원세개(袁世凱)에 비유했다. 이것은 필자가 유일하게 동의할 수 없는 .. 2022. 10. 19.
왕자오궈(王兆國)와 후진타오(胡錦濤): 일마당선(一馬當先)과 후래거상(後來居上) 글: 고벌림(高伐林) 한 친구가 지난 기의 을 본 후에 댓글을 남겼다. 기억하기로 중공12대에서 중점배양하기로 선발된 사람은 왕자오궈이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모두 그의 밑에서 일했었다고. 그 사람의 말이 맞다. 2002년 후진타오 원자바오가 후계자로 올랐지만, 근 30년전에 왕자오궈는 중공중앙판공청 주임 겸 공청단중앙제1서기였으며, 원자바오는 중앙판공청 부주임이었고, 후진타오는 공청단중앙 상무서기였다. 이들 둘은 모두 왕자오궈의 부하였다. 이는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왕자오궈는 후진타오보다 공청단중앙에 3개월가량 먼저 왔다. 1982년 한영(韓英)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등소평이 1980년 7월, 후베이 스얜시(十堰市)의 제2자동차제조공장(二汽)을 시찰할 때 발견했다. 당시 얼치.. 2022. 9. 13.
무엇이 "경외세력(境外勢力)"인가? 글: 노전(老錢) 공삼마규수(孔三媽叫獸, 규수는 敎授를 비하하는 말이며, 북경대학의 孔慶東을 가리킴)의 6.4천안문사태에 관한 TV인터뷰를 보았는데, 나는 정말 동의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를 '공삼마'라고 비하해서 부르는 수밖에 없다. 며칠전에 그에 관한 뉴스가 올라왔다. 6.4를 지지하여 공경동(콩칭둥)의 웨이보가 폐쇄당했다는 것이다. 그가 강의때 학생들에게 6.4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아예 폭란(暴亂)은 없었다. 너희(중공)가 총을 쏘아서 인민민중을 유혈진압한 후에 죄를 거꾸로 뒤집어 씌운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 대하여 약간의 호감을 가졌다. 양심이 아직 남아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계속 그의 TV인터뷰를 보았다. 6월 5일, 내 기억에 한 글에서 본 것같은데, 다음 날은 그.. 2022. 7. 29.
루하오(陸昊): 차세대 정치스타였던 그는 어디로 가는가? (상) 글: 주당(周儻) 1 2022년 6월 24일, 중공제13기 전인대상무위원회 제35차회의에서 인사이동을 발표했는데, 55세의 루하오는 국무원 자연자원부 부장에서 면직되고,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당조서기로 옮겨갔다. 조금의 상식이 있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이런 변동은 너무나 분명하게 루하오가 권력중추에서 쫓겨나서 철저히 주변화된 것이라는 것을. 나의 첫 반응은 이러했다: 시핵심, 너무 악독하구냐. 중국공산당은 장기간 음모, 폭력, 공포활동을 해온 집단이다. 김용의 소설에 나오는 사고하는 방법이 보통사람과 다르고, 누구든 얽히면 비명에 죽고 분신쇄골하게 되는 마교와 마찬가지로, 정치활동이건 지도자의 사생활이건 괴이하고, 은밀하고, 황당하기 그지없다. 공산당의 장기간의 정신오염하에.. 2022. 7. 13.
현재와 향후의 중국정치방향 (2): 독재제와 과두제 과두제의 형성 모택동은 자신을 우두머리로 하는 절대 금자탑의 독재체제를 건립했다. 다만 이 체제하에서는 모든 사람이 위험하다. 모택동 자신을 포함해서. 그는 계속하여 권력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여하한 부하도 세력을 모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가 사망할 때, 원래 명성이 비교적 높았던 정치인물 유소기, 임표, 주은래, 주덕등은 모두 사라졌다. 남은 정치파벌은 모두 약소했다. 모택동이 지정한 후계자인 화국봉은 정치적 난장이였다. 누구도 모택동의 의발을 이어받을 실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설계한 체제가 위기에 빠진다. 다른 공산당국가도 유사했다. 강자가 떠난 후에는 항상 정치불안정이 나타났다. 궁중정변을 통하여, 거기에 암실정치를 통하여 결국 등소평이 섭검영과 손을.. 2022. 5. 22.
"왕슈쥔(王書君)": 미국에서 체포된 중국스파이, 그는 어떤 사람인가? 글: Macedon 최근 미국에서 중국스파이로 체포된 5명중에서 미국동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민운(民運, 중국민주화운동)'인사가 포함되어 있덨다. 그는 바로 여러 해동안 "호요방조자양기념기금회"의 비서장을 맡아왔던 왕슈쥔이다. 왕슈쥔은 3월 16일 뉴욕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중국민주당전국위원회 주석인 왕쥔타오(王軍濤)는 오랫동안 뉴욕에 거주해왔고, 왕슈쥔과는 여러 해동안 알고 지냈다. 그는 자신의 왕슈쥔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인상 속에서 왕슈쥔은 아주 열정적인 사람이다. 비교적 온화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그는 기꺼이 도와주었고, 아주 부지런했다." 왕쥔타오는 이렇게 말한다. 왕슈쥔은 민운활동을 조직, 참여하는데 .. 2022. 3. 25.
당매체의 이상 논조: 중남해가 내부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가? 글: 학평(郝平) 경제의 급속한 발전은 중공이 지금까지 자랑하던 집권 '정당성'의 기초였다. 그런데, 이 '정당성'의 기초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 얼마전에 끝난 중공중앙경제공작회의의 보고에서 연이어 25번의 '온(穩)'자가 출현했다. 이는 당이 현재 경제가 신속히 하락함으로 인한 집권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시에 경제문제는 중남해 내부투쟁의 촛점이 되어 버렸다. 는 12월 9일 이론판에 평론원 취칭산(曲靑山)의 라는 제목의 글을 싣는다. 여기에서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의 개혁개방에 대한 공헌을 언급하였으나, 시진핑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시진핑이 당내의 서로 다른 목소리의 반대에 봉착했다고 보았다. 현재, 이 글은 인민망 '관점' 난의 인기글의 8위에 위치하고.. 2021. 12. 16.
주소주(周小舟)와 왕조국(王兆國) 글: 장효웅(張效雄) 관료사회의 승진과 좌천, 환해침부(宦海沉浮)는 어떤 때는 중대한 역사의 전환점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저 작은 일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부득이해서이다. 왜냐하면 '형세는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스스로 자초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주소주와 왕조국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점을 잘 설명해준다. 1959년 여산회의에서,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의견서"를 써서 제출한다. 그러다가 '반당집단'의 수령으로 타도당한다. 그 전에, 팽덕회는 호남으로 가서 조사연구할 때, 당시 호남성위 제1서기이던 주소주가 배동했다. 여러 문제에 대해 두 사람은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모택동은 '팽대장군'과 결렬한 후, 주소주를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 2020.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