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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루하오(陸昊): 차세대 정치스타였던 그는 어디로 가는가? (상)

by 중은우시 2022. 7. 13.

글: 주당(周儻)

 

1

 

2022년 6월 24일, 중공제13기 전인대상무위원회 제35차회의에서 인사이동을 발표했는데, 55세의 루하오는 국무원 자연자원부 부장에서 면직되고,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당조서기로 옮겨갔다. 조금의 상식이 있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이런 변동은 너무나 분명하게 루하오가 권력중추에서 쫓겨나서 철저히 주변화된 것이라는 것을. 나의 첫 반응은 이러했다: 시핵심, 너무 악독하구냐.

 

중국공산당은 장기간 음모, 폭력, 공포활동을 해온 집단이다. 김용의 소설에 나오는 사고하는 방법이 보통사람과 다르고, 누구든 얽히면 비명에 죽고 분신쇄골하게 되는 마교와 마찬가지로, 정치활동이건 지도자의 사생활이건 괴이하고, 은밀하고, 황당하기 그지없다. 공산당의 장기간의 정신오염하에서, 근묵자흑, 근주자적으로 중국인들도 영혼이 왜곡되고, 두뇌가 어두워졌으며, 심리적으로 변태가 되어, 가장 열렬하게 음모론에 집착하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루하오가 국무원발전중심으로 좌천된 이런 간단하기 그지없는 사실조차도, 어떤 사람들은 "리커창의 큰 그림", "후춘화가 심은 암장(暗樁)"이라고 말한다. 이런 허황된 말은 바로 중국인이 자신의 음모론을 최신분야에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루하오는 나의 대학후배이다. 1985년 북경대학에 입학한 후, 금방 나와 가까워졌다. 루하오는 키가 크지 않고, 머리카락도 많지 않으며, 얼굴색도 어둡고, 표정도 별로 없어. 나이가 들어 보인다. 몇년동안 가을 겨울에 같은 노란색 방한복을 입고 다녔다. 그가 나중에 관료가 된 후에 말을 유창하게 하고, 상투적인 말들을 잘 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에 최소한 내 눈에 그는 말이 거의 없고, 신중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목소리도 담백하고 음색도 보통이며 음량도 높지 않았다. 그때 북경대학은 개성이 두드러졌고, 재능이 넘치고, 송곳처럼 튀어나와 눈길을 끄는 인재들이 넘쳐났다. 나는 심지어 처음에 그를 평범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2달후,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은 보통사람과 달랐고, 절대로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년5월 필자는 <의보(議報)>에 <동홍(董宏)때문에 생각난 80년대의 기억>이라는 글에서 1985년 11월 필자가 당시 9.18학생운동에 참가한 후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중공중앙고문위원회기면12.9운동50주년좌담회"의 경과를 얘기할 때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 규모가 큰 좌담회에서 보이보(薄一波)보다 더 바쁜 사람은 아마 오직 리커창(李克强)뿐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주관기관의 가장 벎고 동시에 대학업무를 주관하는 공청단 중앙서기로서, 리커창은 현장총지휘를 맡았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원로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첫날 회의가 개최되면서 대회당의 로비에 들어간 후, 그가 급히 이곳 저곳을 왔다갔다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발이 쉴틈이 없이 이 사람을 붙잡고 몇마디 하고, 저 사람을 붙잡고 일을 지시하곤 했다. 사람들이 대회의장으로 들어가서 착석하고 회의개최를 준비하려고 할 때, 나는 돌연 왼쪽 앞쪽 멀지 않은 곳에 루하오가 사람들 틈에서 뒤에서 리커창을 끌어당겨 몇 마디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히 그는 리커창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후 눈이 휘둥그레할 일이 벌어진다. 두 사람은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십여미터를 걸어가서 로비 끝에 있는 쇼파에 앉았다. 루하오는 공손하게 잠시도 쉬지 않고 말했다. 리커창은 보기에 약간 마음이 조급해 보였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나는 크게 놀랐다. 마음 속으로 우리는 리커창과 아주 친하지만, 그가 바빠서 정신이 없을 때는 그저 한번 고개만 끄덕여 인사하면 그만이었다. 그를 붙잡아 끌고 일부러 멀리 조용한 곳까지 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이 5,6분이나 늘어놓을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리커창도 그의 말을 들어주었는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고, 그가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는 보기드문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루하오는 그 분야에서 천재라 할 수 있었다. 2003년 그는 36살의 아주 젊은 나이에 베이징시 부시장에 오른다.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고, 아마도 뒤에도 없을 것이다. 다시 몇년이 지나서, 2008년 그는 공청단중앙제1서기가 되고, 2012년에는 중앙위원회에 들어가며, 2015년에는 헤이룽장성 대리성장과 성장이 된다. 2018년에는 국무원에 새로 성립된 자연자원부의 초대 부장이 된다. 모조리 사상 최연소였다. 그러나, 루하오는 전형적인 일찍 일어나지만 늦게 나가는 유형이다. 지금까지 부부장, 부장급에서 18년간이나 머물고 있다. 그는 아마도 마음 속으로 초조할 것이다. 만일 2012년에 발생한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19대 혹은 20대때 정치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학생시절에 정치국상위가 되는 것을 인생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것이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더 이상 광명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루하오와 관료사회에서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사람말을 하고, 귀신을 만나면 귀신말을 한다" 허황되기 거지없는 말도 아무 생각없이 그냥 내뱉을 수 있다. 2016년 그는 전국양회의 헤이룽장개방일에 기자들에게 확실하게 말한다: "룽메이(龍煤)의 광산노동자 8만명은 지금까지 월급이 한달이라도 밀린 적이 없고, 수입을 한푼이라도 줄인 적이 없다." 그러나, 다음 날, 쐉야산(雙鴨山) 8대광구의 수만명 광산노동자들과 가족들이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한다. "우리는 살고 싶다. 우리는 먹을 것이 필요하다" "공산당은 우리 돈을 내놔라" "루하오는 두눈 멀거니 뜨고 거짓말을 한다"는 등의 표어를 내걸었다. 나도 보도를 보았고, 속으로 웃었다. 루하오가 처음 북경대학에 입학해서 나를 만났을 때는 공손하기 그지없고, 신중하여 인상이 아주 좋았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어제 일같다."

 

2

 

위 글에서, 루하오가 학생시대에 정치국상위가 되겠다고 했다. 이건 내가 상상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학번으로 학생회 부주석을 맡았고, 내가 북경대학에 있을 때 부하이며, 몇년전 펑룬(馮侖)의 뒤를 이어 완통(萬通)의 동사장에 오른 장이(江毅)가 직접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내용을 나에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여러 매체에서 루하오의 평생이력을 얘기할 때 모두 특별히 이렇게 강조한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북경대학에서 최초로 직접선거를 통해 학생회주석에 선출된 사람이다" 위키백과같은 곳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이 정보의 출처는 분명 루하오의 자술이다. 루하오의 그때 학생회에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몇 가지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있었다. 여기서 최초로 '직접선거'라고 했지만, 기실 여전히 간접선거였다. 즉, 먼저 각과에서 주석단후보자와 여러 명의 학생대표대회 대표를 선출했고, 그후 학생대표대회의 대표가 주석단후보자중에서 5명의 주석단을 뽑았으며, 마지막으로 5명의 주석단내에서 주석 1명을 뽑은 것이다. 1986년이전에 북경대학학생회의 주석, 부주석은 학교공청단위원회에서 지정해주었고, 자주 어찌된 일인지 이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돌연 학생회주석을 맡고, 다시 전국학련 주석까지 맡는 경우가 많았다. 1986년 4월 즉 루하오의 직전 학생회때부터 선거제를 채택한다. 이는 그해 연초에 필리핀에서 발생한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낸 "2월혁명"을 대표로 하는 세계의 민주화열품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런 선거는 중국공산당에 의해 짓밟히고 우매해진 선거맹인 중국인들이 세계정치사상 가장 엉터리인 창거이자 가장 멍청한 짓거리였다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가. 내가 상세히 설명해주겠다: 이번 선거의 설계는 먼저 모든 사람이 1명의 다음 기 '학위회(學委會)' 후보자와 몇명의 학대회(學代會) 대표를 뽑는다. 그후 학대회 대표 전무가 투표하여 15명가량의 "학위회"를 구성한다. 학위회의 구성원은 바로 미래 5명의 주석단 및 10명가량의 각부 부장이다. 세번째 단계는 바로 전체에서 막 당선된 "학위회" 구성원들과 각과 학생회주석으로 "전위회(全委會)"를 구성하는 것이다. '전위회'의 투표로 '학위회'에서 5명의 주석단을 선출한다. 마지막으로 공청단위원회가 그중 주석 1명을 지정한다. 주석단에 뽑히지 못한 '학위회' 성원은 자원하여 업무를 나누어 각부의 부장이 된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번잡하며 중첩되고 중복대립되며 앞뒤가 맞지 않는 선거규칙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 '학위회'와 '전위회'가 무엇의 약자인지도 아무도 몰랐다. 황당무계한 것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부 부장은 모두 '학대회'에서 선거로 선출된 것이지 주석단이 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론적으로 학대회에만 책임지면 되지 주석단에 책임질 필요는 없는 거시다. 주석단고 그들에 대하여 영도권, 관리권 혹은 징계권이 없었다. 각부의 부장은 주석단을 비난하고 욕할 수 있지만, 주석단은 그저 멀거니 두 눈을 뜨고 듣고 있어야할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에 주석은 선거로 뽑힌 것이 아니고 임명된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위신도 없고,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도 않았다. 금방 이런 정신착란의 산물은 참혹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이 기의 학생회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 참혹한 교훈을 겪고, 백치들은 크게 깨달아서, 잘못을 고쳐 바로잡으려 한다. 그리하여 임명을 투표로 바꾸고, 반년 일찍 다음 기 학생회선거를 시작한다. 게다가 84학번을 건너뛰고 바로 루하오의 그 85학번의 선거를 진행한다. 이번 변혁과 건너뛰기과정에서 필자가 핵심역할을 했다. 필자가 한 이런 것으로인해 루하오 성공의 밑받침을 만들어주게 되었다. 나와 다른 친구들의 원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관료사회의 여러 유명인사들의 앞날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일이란 것이 절망 아이러니하고 예측할 수가 없다. 1986년 11월의 "북대학생회주석제1차직접선거"로 되돌아가면, 제1차투표에서 득표수가 많은 5명은 루하오, 장이(江毅), 구창(顧强), 리장(李江)과 니바오중(倪寶忠)이었다. 즉, 루하오는 최소한 부주석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점심식사를 한 후에 오후에 계속 회의를 열었다. 84학번 역사학과 학생이며, 현재 샤오젠화(肖建華)의 명천계에서 사후수습팀 책임자를 맡고 있는 니바오중이 주석경선을 포기한 외에, 나머지 4명은 순서대로 연설을 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첸원중(錢文忠)이 종이에 "구설순중간담민주(口舌脣中間談民主), 창간자리면출정권(槍杆子裏面出政權)"(입술과 혀의 중간에서 민주를 얘기하고, 총부리 안에서 정권이 나온다)라는 대련을 보고는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오후 2시반, 긴장되고 격렬하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결전의 순간이 도래했다. 사회자는 4명에게 모두 연설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2016년의 미국대통령선거 마지막 경선집회에서 힐러리의 영상을 보았는데, 그녀는 정말 있는 힘을 다 했다. 머리카락도 흐트러지고, 화장도 지워졌으며, 거의 완전히 목소리도 나갔다. 그리고 미친듯이 소리질렀다. 마치 마지막 순간까지 1표라도 더 끌어모으기 위해서, 나에게 투표해달라고 소리쳤다. 마치 무릅꿇고서 한표만 주세요 한표만 주세요라고 애걸하는 것같았다. 보면서 나는 그녀가 뇌일혈이나 심장발작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중국인들은 훨씬 문명적이고 함축적이다. 그리고 정치규칙을 잘 따른다. 힐러리처럼 미친 것처럼 체통도 불구하고 소리지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침착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향을 취한다. 루하오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낮게 깔리면서 우수에 차있지만 사람들이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말했다. "나는 주석이 되어서 나의 성적을 나에게 실망한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상자련(自傷自憐)하면서, 병이 있거나 없거나 신음하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루하오의 '고월량(苦月亮)'을 듣고 그다지 느낌이 없었고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는 탄식성이 들리면서 여기저기서 '주석은 분명 루하오다'라는 말이 나왔다. 나 자신도 경선에 참가한 적이 있고, 마지막 말을 끝낸 후의 심정을 안다: 어쨌든 해야할 일, 말해야할 것은 모두 말했다.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다. 남은 것은 하늘의 결정을 기다릴 뿐이다. 그후 다른 사람이 투표할 때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같은 심정이 된다. 그리고 금방 개표가 시작된다. 이는 가슴뛰고, 우려되고 두려운 순간이다. 독재공포정치국가에서 총칼을 들고 일으키는 쿠데타에 비하더라도 전혀 가볍지 않다. 선거결과가 나왔다. 루하오 1위, 그는 성공적으로 다음기 북대학생회 주석이 되었다. 나중에 장이가 한 말을 들으니, 등뒤에서 사람들은 루하오를 '이혼주석'이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루하오는 관료로서도 매우 순조로웠다. 본성이 외향적이고 밝았으며, 인간관계를 잘 처리했다. 그리고 연기와 쇼를 잘 했다. 서안말로 하면 '작세(炸勢)'를 잘한다. 다만,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해본 사람들은 모두 느낀다. 그는 시종 '공광(空曠), 낙막(落幕), 소색(蕭索), 우울(憂鬱)하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고 돌연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같은 기질과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전형적인 모습은 그가 웃음을 거의 보이지 않으며, 더더구나 내심의 즐거움을 비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것을 공산당독재체제하에서의 정치인의 냉막, 극제(克制), 엄식(掩飾)과 인간성의 결핍때문이라고 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루하오의 경우는 상당한 부분이 그의 어릴 때 가정의 영향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3

 

루하오가 북대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일을 했다. 다만 함께 힘든 노동을 같이 한 사람은 아마도 나 뿐일 것이다. 그때 나는 몸이 약했지만, 루하오는 18살의 청년이었다. 비록 나보다 약간 통통했지만, 당시 90%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닭잡을 힘조차 없었다. 같은 나이에 100킬로그램의 마대자루를 지고 어깨를 바꾸지도 않고 수십리 산길을 걸어갔다는 시핵심과 비교하면 우리는 장애인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루하오는 정말 시핵심의 좋은 제자가 아니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후계자의 위인의 신체를 타고난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때는 마음 속으로부터 탄식이 나온다. 시핵심은 정말 길을 잘못 들었다. 그렇게 좋은 뼈대와 몸을 가지고, 그걸 제대로 써서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역량도 부치고 제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마음을 쓰고 잠도 자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지. 

 

나는 루하오와 같이 구른 적이 있지만, 대학기간동안 친구라고 할 수는 없다. 루하오같은 사람은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잘보이려는 대상이 아니라면. 그러나, 주제로 돌아오면, 그는 잘보이려는 대상에게는 더더욱 마음 속에 있는 말 진심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계에 그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믿는다. 그는 마음 속 깊이 있는 속마음을 자신의 처에게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건 이상한 게 아니다. 마누라는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만, 언젠가 사이가 멀어지면 가장 위험한 사람이고, 가장 흉악한 내간(內奸)이자 스파이가 된다. 최근 들어 여자들에게 대의멸친당한 관리들이 수두룩하게 많다. 우리가 많이 보지 않았는가. 이는 독재제도하에서 어쩔 수 없는 비애이다. 공산당은 모든 유형 무형의 부와 자원을 독점, 절취, 획득, 농단하는 동시에, 정상인이 가지는 일체의 행복과 즐거움은 빼앗겨 버렸다. 당연히 공산당원은 모두 특수재료로 만들었고, 이런 희생과 댓가는 그들에게 있어서 별 것도 아니고, 신경쓸 일도 아니긴 하다.

 

89년 민주화운동초기, 학생들은 분기하여 호요방(胡耀邦)을 애도했다. 천안문광장에서, 인민대회당 앞에서, 중남해 신화문앞에서 시위하고, 연좌하고, 집회하고, 시위하고, 호요방을 추도했다. 요구하는 것은 호요방의 명예회복이었다. 추도회전날, 학생들은 다시 학생대표가 인민대회당에 들어가 호요방의 유체고별식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정부는 학생의 요구를 들어주어 특별히 북경대학학생 2명이 호요방추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준다. 한명은 현임 북경대학 학생회주석 샤오젠화였고, 다른 한명은 전임주석인 루하오였다. 다른 학교는 몇명이 들어가고 누가 들어갔는지 알지 못한다. 이걸 보면 공산당의 저능함과 우둔함이 나타난다. 이런 조치는 학생들을 다독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발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학생들이 분노하게 된다. 나는 루하오가 4월 22일 인민대회당의 호요방추도회에 참석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가 89년 학생운동시기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슨 행동을 하였는지 아는 전혀 알지 못한다. 최소한 중대한 행사에서 그의 그림자를 본 적은 없다. 심지어 샤오젠화조차도 주위 사람들의 호소와 압력에 마지막 순간에 광장단식팀에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내 생각에 그해에 발생한 여러가지 배산도해(排山倒海)와 산붕지열(山崩地裂)의 상황은 이제 막 사회에 나와 아직 열혈청년이라 할 수 있는 루하오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격동과 고통과 괴로움과 갈등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만일 당시 중국의 운이 좋아서 다른 길로 갈 수 있었더라면, 큰 뜻을 품고 있고, 조류를 잘 타는 루하오는 분명 아무런 망설임없이 창을 거꾸로 들고 시대의 대세쪽에 섰을 것이라고.

 

그해 어느 날, 학생제5식당의 남쪽의 좁은 골목의 울퉁불퉁한 흙길 위에서 점심때 나는 루하오와 마주쳤다. 식판을 들고 계속 말했다. 이는 6.4사태이후 처음 그를 만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요즘 어떤지 물었고, 그에게 나는 이미 사회에 나가서 의류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놀라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는 우물쭈물하면서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의류사업. 의류사업. 어째서 그런 걸...." 나는 그와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웃으면서 헤어졌다. 그 혼자 남았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마치 고개를 흔들면서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묵묵히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루하오, 루하오. 너와 나의 인연은 이번 생에 여기서 끝이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일이 있은지 2년후, 학교병원입구에서 대학원입학생 신체검사를 하는 줄의 곁에서 멀리 루하오를 볼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이미 배가 나오고 있었고, 그를 태워준 자동차의 곁에 서서 당시로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다거다(大哥大, 당시 큰 핸드폰)를 들고 고개를 쳐들고 통화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