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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시진핑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by 중은우시 2023. 1. 12.

글: 초일정(楚一丁)

중공 20대이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시진핑은 직접 중공정치국상위들을 이끌고 샨시(陝西) 북부로 가서 옌안(延安)정풍운동을 기념하고, 중공7대회지(會址)를 방문했다.그후 다시 허난(河南) 안양(安陽)으로 가서 홍기거(紅旗渠)를 시찰하면서, 사회주의는 목숨을 걸고 얻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공은 20대이후 좌경화의 추세가 명백해졌다. 예상가능한 것은 이후 5년 내지 10년동안, 이로 인한 당(黨)과 민(民)간의 갈등이 신속히 첨예화될 것이다.

 

주목할 점은 중공고위층도 이미 미래 중국사회에 당과 민간의 대립이 첨예화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미리 그 준비를 하고 있다. 새로 선임된 중공중앙서기처에는 사상유례없이 경찰과 특무계통을 장악하고 있는 관리가 3명이나 포함되었다. 그들은 각각 전국가안전부장, 현정법위서기인 천원칭(陳文淸); 전 공안부부부장, 현중앙기율검사위부서기 류진궈(劉金國); 현공안부장 왕샤오홍(王小洪).

 

만일 국가안전부와 공안부는 국제, 국내사회를 겨냥한 특무기관이라면,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중공당내를 통제하는 특무기구이다. 현임 중공정치국위원중에서도 3명이 중앙기율검사위에서 일한 바 있다. 그들은 각각 현임 중앙기율검사위서기 리시(李希), 전중앙기율검사위서기 자오러지(趙樂際), 전중앙기율검사위부서기 리슈레이(李書磊).

 

시진핑이 중공20대에서 중공고위관료들을 배치한 것을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중공은 현재 전 소련이 비밀경찰에 의존하여 통치를 유지하던 길과 유사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많은 특무들을 모아놓았다는 것은 그들이 상대해야할 적수가 당연히 중공에게 위협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소한 중공으로서는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중공의 마음 속에 근심해야할 집단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먼저 부유해진 사람들

 

중공은 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 명확히 결정한다: "중국의 사회주의제도는 아직 초급단계이다". 그 논점은 나중에 소위 등소평이론의 핵심내용중 하나가 된다. 즉 등소평의 "먼저 소수의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자"는 선부론(先富論)의 이론기초인 것이다.

 

문제는 초급단계이론이 나온지는 지금 이미 40년이 되었다. 중국은 이미 세계제2의 경제체가 되었다. 이 초급단계이론을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을까? 일단 초급단계가 끝나면, 중공은 이들 먼저 부유해진 소슈의 부호들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중공은 2015년 제18기 5중전회에서 나중에 소위 "시진핑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중요내용이 되는 결의를 통과시킨다. 그 중의 주요내용중 하나는 '공동부유'이다. 중공의 해석에 따르면, 중국의 경제발전 총량은 계속 증대되었고, 분배의 불공정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수입격차, 도농간의 공공서비스수준의 차이가 아주 크다. 그리하여 어떻게 경제번영의 성과를 공유할 것인지가 주요문제로 되었다.

 

여기에서 핵심은 시진핑과 등소평이 관심을 가진 문제가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소수인들을 먼저 부유하게 만들자는 것이고, 시진핑이 관심을 가진 것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간의 불공정에 대한 것이다.

 

중공은 얼마전에 끝난 20대에서 처음으로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고수입군의 재산을 적절하게 제약한다." 이를 보면, 중국이 관심을 가진 것은 이미 어떻게 소수인들이 먼저 부유하도록 만드느냐가 아니라 소수인들이 먼저 부유해진 후에 부를 어떻게 새로 분배할 것이냐 소위 "공동부유"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즉, 이들 먼저 부유해진 사람들은 중공의 눈에 이미 혹은 현재 혁명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20대이후 중국연통(Unicom)이 앞장서서 합작프로젝트를 개시한 텐센트(騰訊)가 바로 그 첫번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외국기업의 중국에 대한 투자도 이들 제약받아야 하는 재산에 속하게 되었다. 

 

중공20대이후 2주일도 되지 않은 시간동안, 한때 파산에 직면했던 공소사(供銷社)가 신속히 다시 살아난다.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5만개의 공소분사(供銷分社)를 다시 열겠다고 선언했다. 확실히, 중공은 이미 유퉁분야를 재산재분배의 새로운 돌파구로 잡은 것같다. 앞으로 일련의 정책이 나와서 공소사시스템이 국내시장경제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게 될 것이다.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미 먼저 부유해진 사람들은 당연히 중공이 시진핑신시대사상을 실천하는데 이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빠링후(80後)의 몇대의 사람들

 

문혁이 끝난지 이미 근 반세기가 되었다. 중공의 현재 최고위층지도자들은 마침 문혁때 성장한 세대이다. 시진핑은 취임한 때로부터 계속하여 개혁후30년으로 개혁전30년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해왔다. 소위 "초심을 잃지 않는다(不忘初心)"은 당연히 모택동 시대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그런 '초심'으로 멈춰 서있지 않는다. 80후, 90후와 00후의 세대들은 문혁시기의 중국인들처럼 이 세계의 2/3의 사람들이 도탄에 빠져있어서 자신들이 그들을 구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중의 많은 사람들은 세뇌당해서 샤오펀홍(小粉紅)이 되었지만, 그들은 절대로 자신이 가진 자유가 몰수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샤오펀홍들이 강제청령(제로코로나)정책때 원망의 소리를 낸 것은 바로 그 명확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핸드폰, 인터넷과 SNS는 80후의 몇세대사람들이 생활하는데 필수품이다. 경제분야에서 시장자유도가 점차 축소되는 상황하에서 중공은 정보유통채널에 대한 통제를 갈수록 엄격하게 하고 있다. 중공은 서방에서 현대과학기술을 도입한 후, 먼저 하이테크의 방화벽을 만들고, 민중들이 인터넷에서 해외의 정보를 취득할 수 없게 막았다. 최근 들어서는 더욱 강화되어, 악명이 자자한 사회신용체계를 건립했다. 그리고 이 체계를 하이테크의 안면인식시스템 및 개인의 핸드폰과 은행계좌등과 연결시킨다.

 

현대화가 중국민중에게 가져다준 것은 더욱 많은 자유가 아니라, 더욱 많은 족쇄였다.

 

하이테크시대는 중공체제하에서 생존하는 중국민중에게 서방에서는 없던 현상을 가져다 주었다. 즉 인터넷감시를 회피하기 위하여 발명된 각종 인터넷명칭들이다. 2020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전 온라인감시원이었던 류리펑(劉力朋)의 말에 따르면, 중국은 인터넷에서 당시 시진핑을 부르는 각종 온라인용어, 부호 혹은 문자와 부호의 서로 다른 조합이 합계 35,00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80후의 몇대의 사람들은 문혁을 겪지 않았다. 만일 문혁의 기준으로 보면, 오늘날 중국의 네티즌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행반혁명'으로 분류될 것인가? 답은 너무나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이 몇대의 사람들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탕핑(躺平, 복지부동)하고 있다. 다만 탕핑은 아마도 첫걸음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나이가 젊고 신체도 건장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만일 침묵속에서 사망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저 침묵속에서 폭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중공이 하이테크수단을 동원하여 계속하여 현대정보채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80후의 몇세대들은 분명히 갈수록 중공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지식계와 문예계

 

중국의 지식계와 문예계는 문혁후인 1976년부터 1989년 6.4운동 이전에, 언론자유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환경을 겪은 바 있다. 그 시기에 중공은 등소평의 허락하에 문혁중 타도된 중공의 원로간부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필요에서, 호요방(胡耀邦)이 앞장서서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수단이다"라는 토론을 벌인다. 그 시기에는 문혁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다만 6.4민주화운동이 피비린내나게 진압된 후, 중공이 지식분자들에게 남겨진 중공비판의 공간은 영원히 10년문혁과 반우파운동에 대한 반성의 범위내로 한정되게 하였다. 시진핑이 최고권력을 넘겨받은 후에 "초심을 잊지 말자"과 "개혁개방후의 30년으로 개혁개방전의 30년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문혁과 반우파운동이라는 두 차례의 정치운동에 대한 반성공간도 점점 좁아지게 된다.

 

89년의 민주화운동이후, 예술계에서도 숙청당하는 거물예술인들이 몇년에 한명씩 나타나게 된다. 비록 많은 경우는 세금포탈과 재무문제를 이유로 들었지만 목적은 하나이다: 살계경후(殺鷄儆猴). 닭을 죽여 원숭이를 겁준다.

 

40년대초 연안정풍운동, 50년대말 반우파운동, 나중의 문혁에서 타도된 소위 '현행반혁명'으로 중공은 중국의 지식인들의 언론통제를 통치지위를 유지하는 핵심수단중 하나로 삼았다. 만일 50년대말 반우파운동의 기준으로 보면, 오늘날 중국의 지식계와 문예계의 유명인사들중 얼마나 반우파운동때의 '우파'의 범위에서 배제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오늘날 중공체제하에서 생활하는 지식인들이 깊이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이다.

 

중국의 지식엘리트는 과거 중공체제내의 개혁개방40년동안, 중공에 매수된 사람들이고, 경제개혁의 성과를 나눠가진 계층이다. 중공이 좌경화되면서 소위 '공동부유'의 길을 걷게 되면, 중공은 계속 그들에게 통치자의 이익을 나눠줄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는데도, 그들이 중공의 좌경화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이는 관찰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다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중국의 지식계는 영원히 중공이 안심할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공은 독립적인 사고를 인정할 수 없는 전제정권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먼저 부유해진 사람들, 80후의 몇대의 사람들, 그리고 중국의 지식계와 문예계는 미래 공산주의이데올로기로 되돌아가는 환경하에서 가장 먼저 중공이 가려는 길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동시에 이들이 아마도 '부흥'의 환상 속에서 가장 먼저 꿈이 깨지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