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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18

[황자쟁위술] 여인노선술(女人路線術) 파결총희패(巴結寵姬牌) 자초편외 ‘베겟머리송사’의 효과에 대하여 자고이래로 정인군자들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영웅도 미인이라는 관문은 넘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英雄難過美人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애교나 눈물앞에 무너지지 않는 남자는 드물다. 아마도 이것은 모든 남자의 통병(通病)일 것이다.. 2015. 10. 11.
한단(邯鄲): 3천년간 이름이 바뀌지 않은 도시 글: 대취간역사(大嘴侃歷史) 중국의 전설중에서, 상고시대의 인류시조인 여왜(女媧)는 한단의 고중황산(古中皇山)에서 흙으로 사람을 빚었으며 연석보천(煉石補天)했다. 그녀의 신력은 이들 진흙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한단의 이름은 화하역사의 첫페이지부터 나타난다. 그.. 2014. 9. 7.
모택동의 선조는 모수자천의 모수(毛燧)인가? 글: 이자지(李子遲) 며칠 전에 북경에서 하북성 한단(邯鄲)시 문예이론가협회 주석 왕승준(王承俊)과 만나서, 일찌기 전국시대 조나라의 도성이었던 하단의 유구한 역사를 얘기했다. 한단은 중국역사문화명성이며, 중국성어전고의 고장이고, 중국산문의 도시이고, 중국태극의 고향이며, .. 2013. 11. 10.
성(姓)과 씨(氏): 진시황은 영정(赢政)이라 불리지 않았다. 글: 필황(畢荒) 진시황은 영정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우선 중국고대인의 "성"과 "씨"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국인의 성명은 성을 앞에 붙이고, 이름을 뒤에 붙인다. 이는 여러 외국인들의 습관과는 다르다. 지금은 사람들마다 성과 이름을 다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자(字)도 있다. 그러나.. 2013. 4. 13.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추리 글: 진경원(陳景元) 진시황의 사후 3개월동안 온량거(轀輬車)에 놓아두고, 매장도 하지 않고 장례도 치르지 않으면서,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함양(咸陽)으로 돌아와서 여산(驪山) 북록의 능묘에 묻혔다는 주장은 통상적인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떤 시신이라도, 엄격한 냉동, 방.. 2012. 9. 20.
진시황(秦始皇)과 태자단(太子丹)의 관계 글: 아체(阿杕)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장사일거혜불부환(壯士一去兮不復還)" 이 비장한 노래소리는 이천여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흐르고 있다.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형가에 존경을 지니.. 2012. 6. 7.
한단(邯鄲): 3천년간 이름이 바뀐 적이 없는 도시 글: 가운봉(賈雲峰) 왜황궁 인류의 역사가 처음 시작한 곳은 현대사처럼 확실하지 않고, 모호하며 신비롭다. 동방이건 서방이건 역사의 시작은 신화와 전설이다. 사람은 역사의 주인공이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래서, 다윈의 ‘진화론’을 모르는 조상들은 사람을 만든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 2011. 6. 27.
여불위(呂不韋)의 공(功) 그리고 과(過) 글: 손호휘(孫皓暉) 진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여불위는 현대 중국인에게 아주 익숙한 인물의 하나이다. 사마천의 중사경정(重史輕政)의 뛰어난 필법으로 인하여, 그리고 후세 역사를 기록하는 유생들의 문화패권주의에 따라 의도적으로 왜곡됨으로 인하여, 그리고 현대의 통속적인 .. 2009.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