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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추리

by 중은우시 2012. 9. 20.

글: 진경원(陳景元) 

 

진시황의 사후 3개월동안 온량거(轀輬車)에 놓아두고, 매장도 하지 않고 장례도 치르지 않으면서,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함양(咸陽)으로 돌아와서 여산(驪山) 북록의 능묘에 묻혔다는 주장은 통상적인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떤 시신이라도, 엄격한 냉동, 방부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놓아둘 수가 없다. 북방에는 "하불과삼(夏不過三), 동불과칠(冬不過七)"(여름에는 삼일을 넘기지 않고, 겨울에는 칠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남방에는 "춘삼(春三), 하일(夏一), 추오(秋五), 동칠(冬七)"의 습속이 있다. 그 뜻은 상온조건하에서 남방지방의 시신을 놓아두는 기간은 봄이 3일, 여름이 1일, 가을이 5일, 겨울이 7일이라는 말이다. 관목도 미리 준비를 다해두어야 하고, 사용하는 목재는 상등 남목(楠木)을 최고로 친다. 그리고 거기에 주홍색으로 칠을 한다. 고대에 시신을 영구에 싣고 장례를 기다리는 풍속이 있었다. 그러므로, 관목은 겹겹이 유지(油脂)를 발라 밀봉하여, 모든 틈을 막아버려서 모조리 봉쇄해버린다. 설사 관속의 시신이 썩는다고 하더라도 외부에 시취(屍臭)가 조금도 누설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황제이건 일반 백성이건,고귀한 자이건, 비천한 자이건, 모두 이런 자연규율의 무정한 구속을 받는다. 만일 이런 규율에 따라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반드시 아주 곤란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왜 사람이 죽은 후에는 "하불과삼, 동불과칠"을 따지게 되는가? 왜 반드시 적시에 매장하거나 혹은 각종 냉동, 방부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만일 적시에 매장하지 않거나 각종 방부, 냉동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어떤 난감한 현상이 벌어지는가? 기실 이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죽은 후에는 시신을 남긴다. 그리고 신속하게 일종의 독성이 아주 강한 알칼리성물질 프토마인(시체독)이 생성된다. 시체독의 화학명칭은 Ptomaine이다. 육류가 부패할 때 생성되는 유독물질이다. 동물과 인간의 시체의 질소함유유기물(예를 들어 단백질등)이 부패인자의 작용을 받아 부패할 때, 바로 생상되는 일종의 독정이 아주 강한 물질이다. 시체는 24-28시간 부패한 후, 일종의 독성이 가장 강한 뉴린(neurine)을 형성한다. 5,6일후에도 독성이 계속 존재한다. 이런 물질이 유독한 것은 그것이 주위의 살아있는 생물에게 거대한 생리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정상인들의 신경계통을 마비시키거나 심장악화를 초래하고, 그 증세는 어리럼증, 구토, 설사, 동공확대, 맥박미약, 사지한랭이 있다. 가장 심각하게 되면 전신마비가 되고 지각을 상실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일부 특수한 재난사건에더, 자주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이런 '시체독'이 나온다. 각종 방식과 경로를 통하여, 외부에 계속하여 발산하고 전파하게 된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질식을 느끼고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량의 시체가 썩은 후에는 전염병이 발생한다. 이런 '시체독' 자체는 바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악성 냄새이다. 사람들은 자주 그것을 "시취"(odor of putrefaction)라고 부른다. "시취" 자체는 일종의 부패세균이다. 그것은 신속시 시신의 장내의 단백질을 분해하고, 황화수소와 수소를 위주로한 부패기체를 만든다. 그리고 입, 코, 항문등 부위로 배출된다. 이런 부패기체는 통상적으로 죽은 후 둘째날 밤낮부터 나타난다. 심지어 사람이 죽기 전에도 소량의 이런 기체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런 악취는 후각이 영민한 조류를 불러들인다. 얕게 묻은 분묘에서 시취가 나오면, 여우류와 같은 동물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병원의 영안실에 시신을 놓아둘 때, 반드시 시신의 입, 코 및 항문등 구멍을 위생솜등으로 꽉 막아둔다. '시취'가 외부로 나오는 현상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막아두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 "시취"는 일종의 오랫동안 잊기 어려운 극렬한 악취이다. 사람이 죽은 후 시체에서 나오는 부패와 악취의 맛은 모든 동물의 시신중 가장 심한 악취이다. 이것은 아마도 모든 동물이 대변중에서 사람의 대변이 가장 악취가 심한 것으로 판단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일부 사람들은 자주 향화(香花)는 "구리향(九里香)"이라고 했는데, 사람의 시체에서 나오는 악취는 완전히 반대로 일종의 "구리취(九里臭)"라고 할 수 있다. 사라은 아주 먼 곳에서 한꺼번에 이 기이한 악취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대다수의 사람은 '시취'를 맡기 전에, 이런 악취를 맡은 경력이 없다. 이것은 꿈속의 지옥에서나 맡을 수 있는 사악한 냄새이다. 일반적인 악취가 아니다. 사람들이 극렬하고 코를 찌르며, 비리고 숨이 막힐 듯한 부패의 냄새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대량의 "시취"를 맡은 사람은 그후 몇 개월 혹은 1년동안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꿈속에서도 그 냄새를 맡고 깬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시취'를 맡은 후, 자신의 생명에서 영원히 지우지 못하는 그림자가 되었다고 한다.

 

진왕조의 혁혁한 개국황제 진시홍은 제5차 전국대순유를 하는 도중에 돌연 수천리바깥의 하북 형태 "사구(沙丘)" 궁안에서 죽는다. 나중에 어떤 학자는 그가 병사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피살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조고(趙高)등이 진행한 일련의 궤이한 행동으로 보자면, 그는 사전에 기획된 정병음모의 일부분이며, 진시황은 정변자에게 피살당했을 가능성이 확실히 가장 크다. 그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게 만들고, 그가 직접 진나라도성 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조고등이 정권을 탈취할 가장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진시황의 사지(死地)에 대하여, 역사상 논쟁이 벌어진 바 없다. 이는 사람들의 인식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사기>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은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붕(崩)하셨다." 사구평대는 어떤 곳인가? <사기.정의>에 따르면, "사구는 형태 평향현 동북 이십리에 있다." <사기. 집해>에는 "사구는 장안에서 이천여리 떨어져 있다. 조나라때 사구궁이 거록에 있는데, 무령왕이 죽은 곳이다." 사구궁은 바로 공포의 궁, 사망의 궁, 정변의 궁이다. 누구든지 이 곳에 가면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낄 것이다.

 

사구궁은 원래 조(趙)나라의 궁전이었다. 기원전299년, 조나라에 정변이 발생한다. 한때 이름을 떨쳤던 국군 조무령왕이 정변자들에게 사구궁에 구금된다. 모든 궁안의 사람들은 내보내지고, 그는 아무런 음식도 공급받지 못한다. 3개월후, 궁문이 열렸는데, 조무령왕은 일찌감치 대전에서 굶어죽은 상태였다. <사기. 제태공세가>에는 "환공(桓公), 시재상상(屍在床上), 육십칠일(六十七日), 시충출어호(屍蟲出於戶)"의 기록이 있다. <여씨춘추. 지접>에는 환공이 "몽의몌이절호수궁(蒙衣袂而絶乎壽宮), 충류출어호(蟲流出於戶), 개이양문지선(蓋以楊門之扇), 삼뤌부장(三月不葬)"의 기록이 있다. '충류(蟲流)'가 무엇인가? 충류는 살이 썩으면서 생성되는 대량의 충저(蟲蛆)를 말한다. <한서.진만년전>에는 "자교사(自絞死), 세수백천인(歲數百千人), 구자충출부란(久者蟲出腐爛)"의 기록이 있다: 충류는 살이 썩기 전에 넘쳐 흐르는 시수(屍水)이다. 조무령왕이 사구궁에서 참사하고, 3개월간 매장하지도 장례지내지도 않았다. 당연히 "시수류만지(屍水流滿地), 시충출어호(屍蟲出於戶), 시취구리산(屍臭九里散)"의 놀라운 참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조고에 의하여 이 '마귀의 궁'으로 모셔졌을 때 자신의 '죽음'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할 하나의 중요한 사실과 교훈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국내외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특히 일국의 군주 혹은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경성을 떠나고, 자신이 계속 통치하는 권력중심에서 멀어지게 되면, 생명이 위험에 처하는 중요한 시기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각 세력의 권력투쟁이 가장 긴장되고, 가장 괴이하고, 가장 공포스러워지는 시기에 접어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정변과 반정변"은 고대 정치권력투쟁에서 가장 민감하고 가장 핵심인 문제이다. 당연히 이 비상시기의 "탈권(奪權)과 반탈권(反奪權)"의 투쟁방식은 수백수천가지이다. "탈권과 반탈권"의 수단도 오화팔문이다. "탈권과 반탈권"의 과정도 첨예하고 복잡하다. "탈권과 반탈권"을 발동시키는 기획자는 신비막측하다. 이 "탈권과 반탈권"의 과정을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보황(保皇)과 반보황(反保皇)으로 부르기도 하고, 정변(政變)과 반정변(反政變)으로 부르기도 한다. 역사학자이건 고고학자이건 진시황의 사망시의 역사를 정변의 각도에서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탐색하고 연구해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진나라말기의 많은 역사의 진상은 모호하게 가리워지게 되었다.

 

어떤 정변에서 정변자의 역량이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대방의 저항을 조금도 받지 않는 상황하에서 순조롭게 정변의 성공을 얻어내는 것이다; 어떤 정변에서 정변자의 역량이 강대하지 못하게 되면, 그 결과는 정변을 일으키자마자 반정변자에 의하여 일거에 격파된다; 어떤 정변에서는 정변자와 반정변자가 아주 격렬하게 싸우고 투쟁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쌍방의 장기결전의 결과에 따라, 최종적으로 승부가 갈린다; 어떤 정변에서는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조용하게 이루어졌지만,만일 배후에서 관찰하면 그것은 경심동백이고 피비린내가 충만하다. 많은 황제, 국군과 수뇌는 화가나서 죽기도 하고, 굶어서 죽기도 하고,부친이나 형제에게 살해당하기도 하고, 총신이나 환관에게 살해당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통계를 내본 적이 있는데, 각종 정치탈권과정에서 정변자를 사지에 몰아넣는 방법이 150종에 이른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진시황이 가면 가는 것이고 죽으면 죽는 것이다. 기껏해야 진왕조에서 제정한 관방의 최고예의로 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정식으로 끝났다고 선포하면 무슨 경천동지할 사정이 발생할 일이 아예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다. 진시황을 처음부터 좌우에서 모시던 진왕조의 환관 조고는 이미 암중으로 몰래 무서은 찬탈음무활동을 준비, 기획, 발동했다. 진시황의 이번 동순(東巡)은 함양에서 출발하여 진나라국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므로 그가 정변을 일으키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진시황이 제5차출순(出巡)에 나설 때, 무관(武關)을 나서서, 남양(南陽)으로 가고, 운몽(雲夢)을 거쳐서 형산(衡山)을 오른다. 전당(錢塘)을 지나 대우(大禹)에 제사지내고, 오중(吳中)으로 와서 검지(劍池)를 파낸다. 장강(長江)을 건너, 감유(楡)로 가고, 낭야(琅邪)에서 놀고, 지부(芝罘)에 오른다. 일만여리의 여정에서 몸은 계속 좋았다. 평원군(平原郡)(산동성 덕주)에 도착했을 때 좀 좋지 않았다. 진시황은 사람들에게 전진속도를 높이라고 명령한다. 하루빨리 한단성으로 가려 했다. 그곳에서 한동안 조용히 휴양하려 한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점은 한단은 진시황의 마음 속에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단은 그의 출생지이고, 그의 모친의 고향이다. 그의 부친 진장양왕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그의 동년생활의 추억이 있다. 그러나, 조고는 속으로 머리를 굴린다. 진시황이 한단에 도착하게 해서는 안되었다. 최선은 한단에 도착하기 전에 진시황이 죽는 것이다. 그래야만 일련의 음모를 성사시킬 수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심지어 극히 무책임한 방식으고, 진시황의 사인에 대하여 그리고 함양으로 돌아오는 전체 과정에 대하여 시종 가장 중요한 역사사실 하나를 숨기고 회피하고, 이전했다. 책에서는 그저 이렇게 말한다: 진시황은 혹서기인 칠월에 사구에서 죽었는데, 혹서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고등 5,6명이 진시황이 죽은 소식을 알았다고만 적었으면서 '비불발상(秘不發喪)'할 수 있었다; 사구는 구원(내몽고 오원현)에서 3천여리나 떨어져 있고, 구원에서 함양까지 2천여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진시황이 건재하다는 습을 봉ㄹ 수 있었다; 진시황의 시체가 아주 협소한 온량거에 놓여져 있으며서 한 차에 변질되어 부패한 전복을 놓아두어 진시황의 어차 뒤를 따르게 했다. 이렇게 하여 동순을 따르면 다른 문무백관들을 속일 수 있었다; 동순의 인원은 진시황이 죽은지 3개월후, 진나라도성으로 돌아와서, 여산에 묻는다. 진시황의 유체는 여전히 수은이 충만한 지궁의 속에 안장되어 있다. 만일 미 것이 모두 <사마천>사기의 원래 글이라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는 후인과 세인들을 모조리 철없는 어린아이취급했다고.

 

왜 진시황의 죽음에 대하여 '비불발상'해야 했을까? 과거 여러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는 '비불발상'을 중대한 일로 보고 분석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조고가 일으킨 '정변'이라고 보지 않았고, 이 '정변'의 원인과 경위에 대하여 추구해보지도 않았다. 기실, 진시황이 사구에서 사망한 후, 조고는 유언을 마음대로 고쳐서 부소와 몽염을 죽인다. 그리고 진나라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모두 장기간 정교하게 기획하고 준비한 것이다. 진시황이 죽은 시간과 장소를 포함해서 모드 조고 '정변' 음모의 구성부분이다. '정변'의 성공을 보증하기 위하여, 절대로 진시황이 한단에서 죽어서는 안되었다. 만일 그가 한단에서 죽는다면, 한단에서 정식 치상(治喪)활동을 거행해야 하고, 다시 정변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많아진다. 만일 정말 그를 길가는 도중에 죽게 한다면 그것은 백주대낮에 벌이는 공개적인 정변이 된다. 소식이 금방 각지로 퍼져나갈 것이다. 진시황에 충성하는 몽염과 부소는 반드시 들고 일어나 항거할 것이고, 정변은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진시황은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는가? 지금까지, '정변'의 각도에서 이 역사진행과정에서의 모든 사람의 행동을 분석, 판단해보지 않았다. 실제로 진시황이 최후는 조고가 사구궁내에서 살해하거나 화가나서 죽게 만든 것이다. 왜 진시황이 조고에게 화가나서 죽었다고 말하는가?그것은 전시황은 계속하여 인재를 등용하는데 구애받지 않았다. 누구든지 예전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상대방이 진정한 능력이 있으면, 모두 중용했다. 군사가 위지료는 진시황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지 않고 호랑이의 마음을 지녀서 뜻을 얻으면 가볍게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를 알고도 그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진국위(秦國尉)로 삼아서 그의 계모를 채택한다." 이사도 일찌기 진시황에 대든 적이 있다. 그러나 이사는 진시황의 중용을 받았다. 조고도 중죄를 범한 적이 있다. 법률에 따르면 사형에 처해야 했다. 그러나 서법에 정통하고, 법률을 잘 알아서 진시황은 그를 사면해준다. 그리고 그를 중거부령(中車府令)에 임명하여 자신의 좌우를 항상 따르게 한다. 진시황이 그렇게 조고를 신임하고 중시하였지만, 한단에 도달하기 전날, 조고등은 지고무상의 황제를 이미 황량하기 그지없고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사구의 황량한 성으로 모시고 간다. 진시황은 아마도 즉시 자신의 말일이 도래했음을 알았을 것이다.

 

<사기.은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의 주왕(紂王)은 "사구(沙丘)의 정원과 누대를 늘이고, 들짐승과 새들을 그 속에 넣어두고, 귀신에 제사지내는 것은 소홀히 하며, 사구에서 놀고 즐겼다." <사기. 조세가>에는 조나라의 국군 조무령왕이 "나가려고 했으나 나가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삼월여만에 사구궁에서 굶어죽는다" 이를 보면, 이 사구궁은 악명이 자자한 주왕이 황음무도하고 잔혹한 정치를 펼쳤다가 망국에 이른 곳이다. 전국시대 제후인 조무령왕이 정변집단에 유폐되어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진시황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조나라의 도성 한단에 장기간 거주했으므로, 일찌감치 사구궁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사구궁에서 발생한 여러가지 비참한 죽음의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정변의 궁, 공포의 궁, 마귀의 궁, 사망의 궁, 불상(不祥)의 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각 제후국가의 원래 145개 거대궁전은 모조리 철거되고, 모든 목재와 다른 건축재료는 함양으로 운송한다. 그리고 북판(北阪)지구에 원래 모양대로 중건했다. 오직 사구궁만은 피비린내가 충만하므로 형태에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아서, 점점 쇠락했다.

 

한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구궁안에 갇혀 있게 된다면 그 비참함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백골 위에 각종 새똥이 가득하다; 그 땅위에 곳곳에는 개미가 구멍을 파놓아싸; 대전의 기둥에는 강렬한 여우악취와 곳곳에는 야생늑대의 털이 떨어져 있다. 전체 궁전은 음침한 바람과 음침한 비, 그리고 들풀, 마른 나무와 낙엽을 제외하고 이미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 진시황은 시급하게 한단의 옛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조고는 그를 이 모골송연한 살인의 궁으로 데려온 것이다.그리고 직접적으로 조무령왕이 세상을 떠난 대전으로 모시고 간다. 그는 알았다. 자신이 이미 조고에 의하여 귀문관으로 끌려왔다는 것을. 정변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개창한 대진제국, 대진왕조가 와해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진시황은 잘 알았다. 일찌감치 죽여버렸어야 할 조고가 그에게 마지막 정치보복을 진행한다는 것을. 반항을 해봐야 할 것인가?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늦었다. 분노의 눈, 부들부들 떨리는 몸 이외에 진시황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서운 사구궁에서 진시황의 일생은 이렇게 조고에 의해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