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여불위(呂不韋)의 공(功) 그리고 과(過)

by 중은우시 2009. 3. 10.

글: 손호휘(孫皓暉)

 

진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여불위는 현대 중국인에게 아주 익숙한 인물의 하나이다.

 

사마천의 중사경정(重史輕政)의 뛰어난 필법으로 인하여, 그리고 후세 역사를 기록하는 유생들의 문화패권주의에 따라 의도적으로 왜곡됨으로 인하여, 그리고 현대의 통속적인 역사관련서적과 통속적인 텔레비전드라마에서 엽기적으로 그려냄에 따라서, 여불위의 역사적 진면목은 이미 황당하기 그지없는 간상(奸商)의 성공사, 궁중의 색정사로 덧칠되었다. 여불위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함께 유가들이 만들어난 역사의 만화경속에서 일그러지고 부스러진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우리는 여불위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여불위는 역사상 진실한 여불위와 말로 다하기 힘들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역사의 안개는 도대체 우리의 어떤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

 

여불위의 치국공로와 중국정치문명에 대한 특수한 공헌은 오랫동안 가리워져 있었다.

 

여불위의 인생역정은 아주 단순하다. 사업을 하던 시기와 정치를 하던 시기로 크게 구분된다. 핵심적인 맥락은 이렇다: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사로 성공을 거둔다. 한단에서 진나라의 공자인 영이인의 처지가 곤궁한 것을 보고, 그를 도와줌으로써 정계로 진출할 생각을 가진다; 나중에 성공적으로 영이인을 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영이인이 조나라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와준다; 나중에 진소왕이 죽고 태자인 영주가 즉위한지 1년만에 죽자, 영이인(즉, 진장양왕)이 즉위한다. 그는 여불위를 승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긴다; 그동안 여불위는 가짜환관 노애를 태후에게 바치고, 노애의 힘이 커져서 정권을 농단하고 결국 태후와 함께 반란사건을 일으킨다; 진왕 영정이 친정을 시작한 후, 여불위는 공개적으로 그가 친히 주재하여 편찬한 <<여씨춘추>>를 발표하고, 진왕 영정과 치국이념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낙양(관직을 삭탈하나 작위는 보류함)으로 쫓겨난다; 나중에 진왕은 다시 여불위를 파촉으로 쫓아보내려고 하자, 여불위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며, 낙양의 북망산에 묻힌다.

 

실제적인 정치적 행위로 보자면 여불위에게는 4개의 공적과 1개의 죄책이 있다.

 

진나라의 후계자가 없게 되었을 때 공자 영이인을 구해내서 국가최고권력이 승계되도록 한 것이 공적의 하나이다.

 

효문왕이후, 장양왕이후, 진왕 영정의 소년기에, 연속 세번이나 진나라를 이끌면서 권력교체기의 중대한 정치적위기를 넘기고, 진나라의 안정을 유지한다. 이것이 공적의 둘이다.

 

진소왕 말기의 퇴폐적이고 곤란한 국면을 전환시켜, 진나라의 부활을 이끌어내고, 주(周)나라를 멸하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한다. 이리하여 진나라의 실력이 다시 고개를 든다. 이것이 공적의 셋이다.

 

진나라에 농, 공, 상, 문을 모두 중시하는 정책을 펴서, 진나라문명이 천하에 떨치게 한다. 이리하여 진시황이 후에 통일문명을 창제하는데 사회적인 기초를 세웠다. 이것이 공적의 넷이다.

 

여불위의 죄책 1개는 이것이다: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 진나라 태후에게 적절하지 않은 인물을 천거하여, 진나라에 변법이후 통일이전에 유일한 악성반란을 초래한다. 이는 거의 진나라정권의 승계를 위협하는 사건이었다. 다만 이는 여불위의 공적과 비교하자면, 당시 진나라의 실제상황을 감안할 때 이 죄책은 역시 중요성이 떨어진다. 반란의 책심이 노애와 태후였으므로, 그들은 동시에 여불위와 진왕 영정을 모두 배척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불위는 정변이 무르익는 단계에, 이미 진왕 영정의 친정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비록 여불위는 반란을 평정한 주도세력은 아니었지만, 이미 권력기반을 가진 여불위의 지원이 없었다면, 진왕 영정이 쉽게 반란을 평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불위의 정치적 업적을 평가하는 것에서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

 

상앙이후, 진나라의 역대승상은 모두 뛰어난 군주를 만났다는 것이다. 오직 여불위의 대에 이르러, 진소왕의 말기에 정권장악력이 약해지고, 이후 양대에 걸쳐 평범한 군주와 어린 군주를 만나게 된다. 변법이후 진나라역사상 가장 힘이 약해졌던 저조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진나라는 윈기를 통합하고, 나라를 잘 조정하여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여불위의 톡특하고 심오한 정치철학은 다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작용을 발휘했다. 이것은 진나라의 행운인가? 여불위의 행운인가? 이같은 대체불가능한 역사적 역할은 여불위가 위대한 정치가로 성장하는 바탕이 된다.

 

당시의 여불위는 일종의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여씨춘추. 중춘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사람들중 군주를 섬기는 자들은 모두 손숙오가 초장왕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치를 따지자면 이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초왕의 행운이다." 즉, 초장왕이 손숙오를 임용한 것은 이치를 아는 자의 눈으로 보기에 초장왕의 행운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여씨춘추>>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 초장왕은 놀고 사냥하고 향락을 즐기면서 정사를 게을리 했다. 손숙오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정사를 돌보았기 때문에, 초나라는 강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장왕의 공적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이처럼 보기드문인재본위의 이념은 세속의 전통적인 군왕은사관(君王恩賜觀)을 초월했다. 마찬가지로, 여불위와 같은 정치가가 진나라에 임용되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여불위의 행운이 아니라, 진나라의 행운인 것이다!

 

여불위의 실제 공과가 그의 인생이 내포한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2천여년이후, 고급문명의 시야로 다시 중국문명역사의 긴 화폭을 바라보면, 우리는 돌연 여불위의 심오함과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그의 여씨학파는 중국고전정치철학의 높은 봉우리이다. 여불위의 역사적 지위의 더욱 중요한 측면은 그의 여씨학파가 중국정치문명에 끼친 독특한 공헌에 있다.

 

춘추시대는 중국문명이 새로운 사조를 잉태하는 시기였다. 전국시대는 중국문명이 대폭발하는 시대였다. 진나라제국시대는 중국문명이 대통합되는 시기였다. 이 세 시기에 중국통일문명의 원천을 구성하고, 중국오천년문명사에서 모든 흐름이 흘러내려가는 높디높은 고원이 된다. 이 문명이 급변하는 대황금시대에 여불위는 앞시대를 잇고 후시대에 전해주며, 문명의 큰 흐름을 통괄하여, <<여씨춘추>>라는 광세의 경전을 편찬하니, 이는 중국문명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선진시대의 제자백가들이 연구한 주요영역은 세 가지였다: 정치변혁영역, 인문사상영역, 실용민생영역. 바로 이 삼대영역이 서로 교차하고 부딛치며, 서로 융합하면서 공전절후의 백가쟁명의 국면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창총생(原創叢生), 경정임립(經典林立)의 분수가 솟아오르는 멋진 광경이 연출되게 된 것이다. 그중 정치변혁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는 풍부하고 두터우면서 넓고 큰 다원화된 정치문명을 구성한다. 당시의 사회변혁에 강력하고 직접적인 추진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당시의 정치문명학파는 전체 사회변혁의 중심에 섰고, 전체 사회가 주목하는 중심에 섰다.

 

이러한 정치문명학파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8개이다: 법가, 병가, 묵가, 도가, 유가, 잡가(여씨학파), 종횡가, 음양가. 바로 당시 국가변혁의 실질적인 영향으로 말하자면, 법가, 종횡가, 병가, 여씨학파의 영향이 가장 컸고 직접적이었다. 그리고 묵가, 도가, 유가, 음양가의 직접적인 영향은 비교적 적었다. 다만 모두 보편적인 사회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위 "현학(顯學)"은 바로 이런 보편적인 영향력을 얘기하는 것이다.

 

문명유산을 계승하는 당대역사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춘추전국시대의 정치문명학파의 역사적 의의는 일종의 시대가 완전히 바뀐 이후에 새로운 가치의 정립이다. 새로운 가치의 정립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선진시대의 정치문명유파를 볼 때, 이미 당시의 실제작용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의미에서의 역사전승가치까지 보게 된다.

 

모든 정치학설을 모두 정치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설이 철학의 경지로 진입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측면이 필요하다: 하나는 그 학설이 광범위한 기초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학설이 추상적으로 파악되는 깊이있는 본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으로 중국원생문명시대를 보면 정치철학유파는 다섯개이다. 즉, 법가, 도가, 묵가, 유가, 여가의 다섯이다. 이중, 법가는 광범위한 인성(이 악하다는) 현실과 광범위한 정치질서를 추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이를 통하여 확립된 법가학설은 영원히 지소고디는 추상적인 공간이 있다. 묵가는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인류정신(사랑)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겸애' '비공'의 이념을 가지고, 영원히 보편적인 추상가치를 지니고 있다. 도가는 전체 우주의 본질운행(도)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를 '도'에 따라 행하도록 하고, 적극적인 작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념으로 하여, 마찬가지로 영원한 추상적으로 투시되는 가치가 있다. 유가는 광범위한 인성(이 선하다는 것)의 현실을 바탕으로 전통을 지키는 정신적인 추구를 기본으로 하여, 복고, 중용, 인정등의 정치이념을 가지고 영원히 극단보수주의적인 추상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다섯 유파중 여씨학파의 정치철학이 가장 남다르다.

 

여불위는 착실한 고전농경경제의 전체운행을 기본으로 삼는다. 그리고 전면적으로 이런 전체운행에서 파생되는 각종 사회정치법칙을 결합하고 심각하게 투지하여, 여씨학설은 농경사회를 투시하고 전체 고전정치문명운행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역사의 거울로서 영원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다.

 

여씨학파의 정치학설은 <<여씨춘추. 심시>>에서 "경도(耕道)"라고 표현한다. 혹은 농(農)의 도(道)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농도(農道)이다. 즉, 전체 농경경제의 운행법칙이다. 이처럼, 여불위는 도농(道農), 즉 농경의 도리를 정치문명의 도리로 삼은 위대한 정치철학가라고 말할 수 있다.

 

여불위의 농도는 기본적으로 아래의 여섯가지 내용을 지닌다.

 

첫째, 농도의 생명력은 천지만물의 변화를 기반으로 생겨난다. 그러므로, 농도의 근본특징은 다원적이고 겸용적이다. 만상을 배척하지 않는다. 농도의 겸용성에서 출발하여, 여씨정치철학은 일련의 고귀한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를 논한다. (1) 사회생존에 있어서는 농경사회는 단일하게 생존할 수 없다. 반드시 농, 공, 상, 사를 모두 중시하는 종합경제형태의 민생사회로 생존해야 한다. (2) 이데올로기로 말하자면, 여불위는 정치문명유파에 대하여 보기드문 백가겸용, 백가병중의 태도를 지녔다. 법가, 묵가, 유가, 도가의 각파 정치학설을 모두 존중했고, 비판했다. (3) 명확하게 정치찰학상에서 귀공거사(貴公去私, 멸사봉공, 선공후사)의 이념을 제기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이다. 하늘은 사사로이 덮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싣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농도의 포용적인 특징은 춘추전국시대 정치철학유파중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둘째, 농도체계하의 상도(商道)를 강조했다. 농경경제시대의 중상주의를 추진하였다. 전국시대 정치학설중에서 중농에 대하여는 일치한다. 법가의 변법도 실제로는 중상의 측면이 있다. 다만 이론적으로 상인에게 합리적인 지위를 부여해준 것은 여씨학설이 유일하다. 근본적으로 여불위 자신이 걸출한 상인이므로, 상도가 나라와 백성에 이롭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정치실무상으로 여불위는 상도법칙을 치국의 도리로 승화시켰다. 그는 전국시대의 가장 걸출한 상인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상인으로 정계에 투신한 사람으로는 앞에 백규(白圭)가 있고, 뒤에 여불위가 있다. 백규는 위나라의 대상인이다. 그는 상인출신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위무후의 말기와 위혜왕의 전기에 승상을 지낸다. 그의 정상관계에 대한 격언으로는 "정도(政道)로 상사(商事)를 처리하고, 상도(商道)로 정사(政事)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백규는 정,상 양쪽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어 전국시대의 명재상중 한 명이 된다. 그는 여불위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다만, 정치실천에 있어서, 백규는 위나라에서 중상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상인들에게 제대로된 지위를 부여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불위는 달랐다. 그는 치국학설에서 상인들에게 합리적인 존재가치를 부여해주었을 뿐아니라, 실천상으로도 중상정책을 실시했다. 가장 현저한 예를 들자면, 여불위가 정사를 담당할 때, 진나라는 공개적으로 나라의 경제에 공헌을 한 두 명의 대상인을 표창한다. 하나는 파과부청(巴寡婦淸)이고, 다른 하나는 오씨라(烏氏)이다. 이들에게 작위를 주고 표창한다. 전체 춘추전국시대에 특히 상앙변법후의 진나라에서 이는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셋째, 농도에는 뿌리가 있다. 농경이 근본이다. 의식(衣食)은 생존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의 도리로 승화시킨다. 바로 국가에서 중농정책을 실시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로서, 왜 농경이 근본이 되었는가? 왜 다른 산업을 근본으로 삼지 않았는가? <<여씨춘추>>에서는 이렇게 답변한다: 이는 국가생존의 필요이다. 나라를 다스리는데서 필수적이다. 고대의 성현들도 백성을 이끄는데 먼저 농업을 강조했다.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것은 그 땅에서 나는 이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뜻이 귀한 것이다. 백성이 농사를 지으면 소박하고 소박하면 쉽게 쓸 수 있다. 쉽게 쓸 수 있으면 변경이 안정된다. 즉, 농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양식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 농도의 근본은 자연법칙을 따르는데 있다. 천지 사시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다. 국가정치의 도리는 마찬가지로 이러한 농도법칙을 따라야 한다. 사람은 천지와 마찬가지이다. 만물의 형태는 서로 다르지만, 그 정(精)은 일체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천지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다섯째, 농도는 하늘과 땅의 상황변화에 순응해야 한다. 다스리는 도리는 시세에 따라야 한다.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 억지로 웃게 해서는 즐겁지 않으며, 억지로 울게 해서는 슬프지 않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방식으로는 성과가 적다. 성과가 클 수 없다.

 

여섯째, 농사는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가를 다스리는데도 사람의 나쁜 욕망을 제거하고, 법도를 건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시세에 순응하여 변법을 해야 한다. 치국은 바로 법을 세우는 것이다. 법을 세우면 천하가 따른다. 이것은 철저한 변법철학이다.

 

이상의 기본원칙이 여불위 정치철학의 영혼이다. 이 영혼은 바로 법치와 변법을 기본지탱점으로 하여, 동시에 나머지 정치문명유파에서 가치있는 것들을 흡수한다. 그리하여 공동으로 포용적이고 박대한 치국이념을 구성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여불위의 정치적인 안목과 문명적인 흉금은 크고 넓다. 정치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심오하고 투철하다. 그리하여 법가를 포함한 모든 철학유파를 초월했다. 아쉽게도 후세에서는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고, 그의 학설에서 중요한 점을 빠트리고 있다. 여씨학파에 말도 안되는 잡가(雜家)라는 모자를 씌워놓고 있다. 이렇게 하여 역사의 진상과 본질을 흐리고 많은 사람들을 오해하게 하였다.

 

여불위의 비극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사사로이 노애를 가까이한 죄책에 있지 않다. 진왕 영정과 여불위 본인은 모두 그 죄책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여불위의 비극의 가장 깊은 근원은 바로 그의 정치철학 자체에 있다. 당시 진나라의 법치전통과 법가이념은 이미 거국적으로 국가철학으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진왕 영정은 상앙의 정치철학을 견고하게 따랐다. 여불위는 백가를 포용하는 정치철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법가인 상앙의 법치에 수정을 가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의 정치역량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심각하고 조화될 수 없는 정치문명이념의 충돌이 발생했던 것이다.

 

진왕 영정을 위시한 진나라의 법가를 질책할 수는 없다

여불위를 정신적 영수로 삼은 여씨학파를 질책할 수도 없다.

 

실제정치의 파도속에서 그들은 모두 너무나 많은 역사적인 원인과 현실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역사문명의 저울은 심오하고 장기적인 문명으로 볼 때 역시 여불위의 정치철학이 더욱 장기적이고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불위가 편찬한 <<여씨춘추>>는 중국고전 정치문명의 대백과사전이다. 중국원생문명시대 정치철학중 가장 심오하고 가장 전면적으로 종합한 것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들만금 풍부한 정치경험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