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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34

모택동(毛澤東)과 유소기(劉少奇)가 내부투쟁을 벌인 진정한 원인은...? 글: 무덕산(武德山)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글에서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갈등에 관하여 대부분 "사청(四淸)"운동때의 "심각한 의견차이"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이데올로기 층면에서 고도로 일치했고, 모택동이 유소기를 비판한 관점과 방법은 기실 모두 모택동의 인가를 받아 대거 제창한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택동이 유소기와 "중대한 이론상의 의견차이"때문이 아니라, 유소기에 대한 불만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택동은 유소기에 대한불만때문에 "중대한 이론상의 의견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간의 갈등은 더욱 실질적인 원인이 있다.... 모택동 71세생일때의 식사자리 12월 26일, 모택동의 71세 생일이었다. 그날 저녁 모택동은 인민대회당 노북경청(老北京廳)에서 일부 사람들을 불러 .. 2023. 10. 17.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 2023. 7. 7.
"팔로군(八路軍)" 명칭에 관한 몇 가지 문제 글: 맹검홍(孟儉紅) 항전초기 홍군(紅軍)을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대하여는 여러 글과 책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다만, 여전히 약간의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예를 들어, 팔로군 번호의 유래라든지, 산하의 3개사(師)의 번호는 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등등. 그리고 개편된지 1달도 되지 않아 왜 팔로군은 다시 제십팔집단군(第十八集團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중공은 왜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는지.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팔로군 번호를 둘러싸고 어떤 다툼과 알력이 있었는지. 중공은 또 어떤 상황하에서는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이 시기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팔로군"은 원래 '월군(粤軍)'의 번호였.. 2023. 7. 7.
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의 암중각축(暗中角逐) 글: 고문겸(高文謙)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에서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어조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소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반동의 부르조아계급입장에 서서, 부르조아계급독재를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거대한 문화대혁명운동을 탄압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혼동하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며 백색공포를 실행하며 스스로 득의하며 부르조아계급의 위풍을 키우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뜻을 꺽었다. 어찌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 모택동은 글에서 1962년 조정시기의 소위 '우경'문제를 연결시켜, 기세등등하게 유소기와 최종대결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모택동의 이 글은 그후 전체회의에 인쇄되어 배부되어, 회의참석자들이 유소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전체회의는 바로 .. 2023. 5. 18.
남창폭동(南昌暴動): 참가한 지도자들의 서열은? 글: 고벌림(高伐林) 중국의 정치와 문화전통은 역대이래로 존비유서(尊卑有序), 즉 위계질서를 중시하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 봉건등급에 반대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중국공산당도 권력을 잡은 후에는 역시 존비유서를 따졌다. 여기에서 필자는 유방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천하를 차지한 후 논공행상을 벌이는데, 문신과 무신들이 서로 취한 상태에서 공을 다퉜다. 서로 소리치고, 검을 뽑아 탁자를 베고, 기둥을 쳤다. 유방은 그런 것이 꼴보기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등급제도, 예악규장을 제정하여 신하들을 교욱하고 백성들을 따르게 한다. 다시 조회를 개최하자 신하들은 황공해 하면서 법도를 따랐다. 유방은 그제서야 .. 2023. 2. 9.
어느 사건으로 모택동이 유소기를 죽이기로 결심했을까? 글: 히요시 히데마츠(日吉秀松, 일본대학 문리학부 조교수, 중국계) 독재자는 권력과 명리에 반드시 신경을 쓴다. 유소기(劉少奇)는 모택동(毛澤東)을 믿었기 때문에 국가주석직을 물려받았고,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다. 모택동과 유소기의 결렬은 절대로 사청(四淸)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8대에서 개인숭배를 비판한 것이 발단이었다. 시모노프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스탈린을 가리킴)는 강연대에 올라 모든 사람들을 보면서 발언했다. 나는 나이가 들었고, 나는 수탁받은 모든 직책을 이행할 수 없다. 나는 계속하여 장관회의주석의 직무를 담당할 수 있고, 이전처럼 정치국회의를 주재하는 직책을 이행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총서기로서 중앙서기처의 회의를 주재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총서기의 직무를 면직해줄 것.. 2023. 2. 8.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 2022. 10. 26.
"주덕(朱德)의 편담(扁擔, 멜대)"과 "임표(林彪)의 편담" 글: 임휘(林輝) 1950년대초, 토비(土匪)출신의 중공 전 군사지도자 주덕의 간고(艱苦)하고, 소박한 정신을 칭송하는 글인 이 소학교 교재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글은 조작혐의가 있어 작년에 교과서에서 삭제된다.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 조작혐의가 있는 글이 1967년 2월 정치적 원인으로 주인공을 "임표"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년 후 임표사건이 발생하고나서, 주인공은 다시 원래대로 주덕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주석의 편담"도 날조된 것이 아닌가? 먼저 이 정치적 풍운변화에 흔들린 글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대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1928년 주덕과 모택동은 폭동에 실패하여 도망쳐서 정강산에서 만난 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사람을 5.. 2022. 9. 5.
임표가 정강산에서 발탁, 중용된 경위는? 글: 옥미수(玉米穗) 임표는 주덕이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올라 모택동과 합칠 때, 제28단 1영 3연의 연장(連長)이었다. 28단은 주덕의 주력단이고, 단장은 왕이탁(王爾琢)이다. 1영(營)의 영장은 주자곤(朱子昆, 그는 나중에 환남사변(皖南事變)때 항영(項英)과 함께 피살된다)이고, 2영의 영장은 원숭전(袁崇全)이었다. 2영 영장인 원숭전은 나중에 홍군을 떠나 국민당군에 투항하려 했다. 단장 왕이탁이 그를 뒤쫓아갔다가 원숭전의 총에 죽고 만다. 28단은 하루아침에 단장과 2영의 영장을 잃었다. 임표는 이런 상황하에서 연장에서 먼저 영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얼마 후 단장까지 오른다. 이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공초(龔楚)의 회고에 따르면 구체적인 경위는 개략 다음과 같다: 1928년 7월, 먼저.. 2022. 7. 28.
정강산시기 주모(朱毛) 충돌: 임표(모택동지지) vs 진의(주덕지지) 글: 옥미수(玉米穗) 1928년 연말, 국민당군은 정강산에 대한 제3차 포위소탕작전을 벌인다. 정강산에서는 당정군긴급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한다. 회의에 출석한 사람은 모택동(毛澤東), 주덕(朱德), 진의(陳毅), 홍오군(紅五軍)의 팽덕회(彭德懷), 등대원(滕代遠), 상감변구특위서기(湘贛邊區特委書記) 담진림(譚震林)등이었다. 주덕이 의견을 내놓는다: 정강산은 우리가 1년간 건설한 혁명근거지이다. 쉽게 버릴 수 없다. 다만 만일 모든 홍군이 이 산을 지킨다면 양식이 부족하여 오래 버틸 수 없고, 고사당하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홍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홍4군 31단과 홍5군은 모택동, 팽덕회 두 동지가 지휘하여 정강산을 고수하고, 나(주덕)는 홍4군 28단, 29단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동으로 가.. 2022.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