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히요시 히데마츠(日吉秀松, 일본대학 문리학부 조교수, 중국계)
독재자는 권력과 명리에 반드시 신경을 쓴다. 유소기(劉少奇)는 모택동(毛澤東)을 믿었기 때문에 국가주석직을 물려받았고,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다. 모택동과 유소기의 결렬은 절대로 사청(四淸)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8대에서 개인숭배를 비판한 것이 발단이었다.
시모노프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스탈린을 가리킴)는 강연대에 올라 모든 사람들을 보면서 발언했다. 나는 나이가 들었고, 나는 수탁받은 모든 직책을 이행할 수 없다. 나는 계속하여 장관회의주석의 직무를 담당할 수 있고, 이전처럼 정치국회의를 주재하는 직책을 이행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총서기로서 중앙서기처의 회의를 주재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총서기의 직무를 면직해줄 것을 요청하니 받아들여 달라.
이것은 독재자 스탈린이 그의 동지들에게 '권력양도"하겠다고 할 때 한 말이다. 독재자는 어떤 때 겸양의 말을 한다. 특히 '권력양도'나 '은퇴'를 통해 수완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다만 그런 행위는 단지 연기이고, 일종의 시험이다. 부하들의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시험하는 것이고, 누군가 자신의 권력을 노리지 않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말렌코프는 스탈린의 거짓겸양에 대경실색한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사람의 모든 본능, 욕망은 기본적으로 배타성을 지닌다. 권력욕은 더더욱 배타성, 독점성을 지닌다. 감시를 받지 않는 권력은 더더욱 강력한 배타성을 가진다. 당연히 감시를 받지 않는 권력자, 정치독재자는 반드시 가장 강력한 배타적 심리를 가지고 항상 자신이 권력을 잃을지 우려한다. 그러므로, 독재정치의 권력투쟁은 반드시 피비린내가 나고, 잔혹무정하며,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독재자는 권력에 대하여 특수한 점유묙망이 있고, 권력을 개인사유물로 여긴다. 독재자는 모든 명리를 중시하고, 권력, 명리앞에서는 절대로 겸손하거나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권력 혹은 명리에 대한 겸양은 절대로 독재자의 품성이 아니다. 즉, 독재자가 진심으로 은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양도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도대체 어떤 목적에서였을까? 그의 동지 혹은 부하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시모노프는 계속하여 이렇게 묘사한다:
스탈린이 그런 말을 하면서 회의장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정치국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스탈린이 발언할 때 회의를 주재하던 말렌코프는 탁자 뒤에 서 있었다. 나는 말렌코프의 얼굴에서 일종의 무서운 표정을 보았다. 두려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니다. 두려움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인재만이 낼 수 있는 표정이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최소한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죽음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표정의 의미는: 스탈린의 그런 요청에 동의할 수 없다. 그가 3가지 직위중 마지막 직위를 사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건 안된다. 말렌코프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 그의 손짓, 그의 표현력이 풍부하게 높이 든 두 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즉시 스탈린의 요청을 확고하게 거절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스탈린의 등뒤에서 귀를 울리는 함성이 들인다: "안됩니다! 우리는 유임을 요청합니다!" 장내에서는 함성이 터져나온다. "안됩니다. 그건 안됩니다. 우리는 연임을 요청합니다. 사임요청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에피소드나 함성을 얘기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뭔가를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깨달은 것이다. 나는 스탈린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스탈린이 정치국을 주재하고, 부장회의를 주재하지만, 총서기는 다른 사람이 맡는다. 그건 레닌이 살아있을 때와 같은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즉시 그리고 거의 즉시 내가 꺠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그때 회의의 주석으로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고, 일단 문제가 생기면 최가 가장 크게 될 말렌코프는 즉시 스탈린은 총서기직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다. 그는 전체회의에서 자신이 그런 말을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등뒤의 주석단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앞에 회의장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스탈린이 총서기의 직위를 떠나는 것을 준비하고 있는지, 이미 그는 나이가 들고 노쇠했으므로 더 이상 총서기의 직무는 담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체 회의장은 웅성거리고 고함이 터져나왔다. 스탈린에게 총서기직을 유임하며 중앙서기처를 맡아달라고 할 때,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이때 말렌코프의 얼굴색은 마치 진정으로 현실적인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막 피해간 후의 그런 얼굴색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당대표대회에서 공작보고를 했고, 실제로 중앙서기처의 여러 회의를 주재했기 때문이다. 현재 다시 중앙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는데 이 회의에서 일단 스탈린이 나이가 들어 사임하고자 하는 세번째 직위인 총서기 후보자는 당연히 그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스탈린이 자신의 등뒤와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면 내 생각에 가장 먼저 목이 날아갔을 사람은 바로 말렌코프였다. 그랬다면 사태가 어떻게 끝날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모택동이 국가주석을 사임한 것은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나중에 스탈린은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계속 총서기직을 맡겠다고 동의한다. 이때의 말렌코프는 거의 사형수가 형장에서 풀려난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쉰다. 스탈린의 연기는 왜 소련공산당의 다른 지도자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을까? 왜나하면 모두 스탈린이 총서기를 더 이상 맡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가식이고 연기라는 것을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일단 누군가 스탈린의 '요구'에 호응하면 아마도 연극하려던 것이 사실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아마도 말렌코프가 총서기직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건 절대로 말렌코프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직위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이건 말렌코프에게 권력욕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단 스탈린의 직위를 물려받으면 단두대에 올라가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정치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렌코프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재자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공재산인 국가와 권력을 사유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고권력, 최대명리는 모두 독재자의 것이어야 한다. 독재자가 권력을 양보하거나 이익을 양보하지는 않는다.
1950년대 중국에서도 유사한 일막이 벌어진다. 모택동은 국가주석직을 물러나겠다고 했을 뿐아니라, '모택동사상'을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이건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을 뿐아니라, 모택동이 달성하고자 하는 또 다른 정치적 목적도 숨어 있었다.
1956년 후르시쵸프가 소련공산당20대회의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 및 기타 정치적 죄행을 고발했고,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련공산당의 동향에 대하여, 중공내부에서도 비교적 후르시쵸프에게 기울어졌다. 그래서 중공8대의 당장수정보고에는 "당의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하고, 개인숭배를 반대하며, 개인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에 반대하고, 개인의 송덕을 칭송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들어간다. 확실히 이건 소련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다. 8대는 또한 모택동의 요구를 받아들여, '모택동사상'을 언급하지 않고,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했으며,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갔다. 다만, 8대에서 모택동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당시 중앙의 일상업무를 주재하던 유소기에게는 나중에 액운의 씨앗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독재자는 마찬가지이다. 모택동의 제안은 그저 형식적이었고, 시험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래서 8대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택동은 결의중의 국내주요모순론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표시한다. 이 반대는 절대로 무슨 이론상의 서로 다른 견해가 아니고, 모택동의 유소기등에 대한 불만표시의 핑계일 뿐인 것이다.
국가주석직을 사임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시험하는 것이면서 다른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소위 다른 목적이라는 것은 모택동의 지식분자박해의 대음모이고 '반우파투쟁'과 관련이 있다.
유소기는 독재자의 본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모택동은 후르시쵸프의 비밀보고서가 나온 이후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같았다. 왜냐하면 모택동이 바로 중국의 스탈린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택동은 부득이 일정한 정치적 태도를 보여야 했다. 자신은 스탈린과 다르다는. 그 때, 모택동은 서방국가에서는 스탈린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모택동은 서방의 민주제도에는 정치적으로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막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주석은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계속하여 스탈린의 사도(邪道)인 '권력집중'을 선택한다.
모택동은 더 이상 국가주석의 직무를 맡지 않겠다고 건의했고, 1958년 12월, 중공8기 6중전회는 모택동의 건의를 실질적으로 논의한다. 즉 당시의 중공지도층은 모택동의 건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실 이것은 모택동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모택동은 그의 동지들도 말렌코프등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게 사임을 거두어달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모톡동은 자신의 동지와 부하들이 그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정말 국가주석직위를 사임하는 것에 대하여 토론할 줄은 몰랐다. 이는 당내에 누군가는 그가 국가주석에서 물러나는 것에 찬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재자의 말에 찬성하는 것은 일종의 복종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독재자의 말에 찬성하는 것이 반역이 된다. 예를 들어, 모택동이 국가주석직을 사임하겠다고 했을 대, '모택동사상'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고 했을 떄,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바로 독재자의 의지를 치명적으로 위배하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재자는 권력을 중시하고, 명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1957년 5월 1일, 민주인사 진숙통(陳叔通), 황염배(黃炎培)등은 유소기, 주은래에게 편지를 써서 모택동이 더 이상 국가주석을 맡지 않는데 대하여 반대한다는 표시를 한다. 그러나 아주 기이하게도 유소기, 주은래에게 보낸 이 편지에 모택동이 비시(批示)를 내린다: "유(소기), 주(은래), 주(덕), 등(소평), 팽진이 보고, 등소평이 처리하라. 이 편지는 반드시 정치국동의를 얻은 다음에 발송하라. 유소기는 100명가량이 참가하는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여 토론하고 동의를 얻으라." 이는 당시 다른 지도자들의 편지도 모택동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모택동의 정치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빠트려서는 안될 부분이다. 즉, 모든 개인서신도 결국 모택동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중남해에서, 모택동이외에는 어떠한 사적인 성격의 편지는 없다. 그래서 위에서 본 것같은 기이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유소기가 국가주석을 넘겨받은 것은 이미 살신지화를 잉태한 것이다.
모택동의 이런 행위가 기이한 것은 자신이 더 이상 국가주석을 연임하지 않겠다고 하고서 왜 진숙통, 황염배 두 사람의 만류하는 서신을 올리도록 했을까? 이건 무엇때문인가? 이건 두 가지를 설명한다: 하나는 모택동이 내심으로 국가주석직을 사임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택동은 비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1958년부터 나는 잠시 이 임무에서 벗어났고, 정력을 집중하여 약간의 중요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잠시 이 임무를 벗어났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택동이 진심으로 연임을 원치 않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기껏해야 잠시 그 직무를 벗어난 것이지, 완전한 사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모택동의 동료가 연구하고 토론할 이슈는 모택동이후의 후임자문제가 아니라, 기껏해야 누가 이 '잠시동안' 국가주석직무를 대리하느냐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소기는 주덕이 국가주석을 맡아야 한다고 건의하고, 주덕은 유소기가 맡아야 한다고 추천한다. 그들은 모택동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모택동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후임자를 정할 것인지, 누가 모택동의 직무을 승계할 것인지를 생각했고, 멍청하게도 8기6중전회에 의제로 올려 토론했으며, 최종적으로 결의를 통과시킨 것이다. 객관적으로 모택동이 국가주석이라는 단지 명예직인 직위를 내놓게 한 것이고, 유소기도 모택동의 시직을 받아들이고 다른 지도자들의 추천을 받아 국가주석직위를 맡은 것이지만, 이때부터 이미 유소기의 운명은 결정된 셈이다.
다른 하나의 점은 모택동이 자신이 국가주석을 연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걸어, 당외인사에 대하여 개혁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특히 모택동은 임기에 대하여 손을 쓴다. 그는 4월 30일 최고국무회의 제12차(확대)회의(즉 반우파운동, 지식분자를 박해하는 음모의 마지막 동원회의)에서의 발언에서 더 이상 국가주석임무를 맡지 않은 건을 언급한다: "내년 2기전인대에서 반드시 국가주석을 사임한다.....스위스에는 7인위원회가 있고, 대통령은 윤번제로 맡는다. 우리도 몇년마다 윤번제로 돌아가며 맡아도 좋다. 그렇게 점차 몸을 뺄 것이다. 찬성하지 않아도 방법이 없다. 억지로 맡길 수는 없으니까. 찬성한다면, 소식을 밖으로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할테니까."
국가권력은 독재자의 사유재산이다.
윤번제로 대통령을 맡는 것은 나중에 반우운동에서 하나의 죄상이 된다. 원래 국가주석을 연임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나 윤번제로 대통령에 앉는다고 말한 목적은 당외인사들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택동은 권력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려고 한다는 이미지를 심기위해서이다. 이를 보면, 모택동이 국가주석을 연임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동지들을 시험하는 것이고, 당외인사들을 속이기 위한 일석이조의 계책이었다.
현재 어떤 사람은 모택동과 유소기의 결렬이 "사청운동'기간중이라고 하는데, 그건 정확하지 않다. 유소기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분명 1956년의 중공8대에서 더 이상 '모택동사상'을 언급하지 않고, 모택동이 스스로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건의를 받아들인 때부터이다. 이것이야말로 독재정치의 '정상논리'에 부합한다. 말렌코프의 두려움을 보면 유소기가 얼마나 경험이 없고, 노련하지 못한 정치가인지 알 수 있다. 독재자는 절대로 권력과 명리에서 양보하지 않는다. 오직 허위적인 시험이 있을 뿐이다. 1969년 9대 개막식에서 모택동은 임표에게 회의주석단 주석을 맡으라고 하고, 자신은 부주석을 맡겠다고 제안한 것도 같은 경우이다. 그래서 임표가 죽어라 거절한 것도 그런 이유때문이다.
독재자가 권력을 어찌 다른 사람과 나누어갖겠는가. 설사 국가죽이라는 직위가 단지 명예직이고 아무런 실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건 독재자의 명리중 하나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국가와 정치권력이 독재자의 사유재산이 되면, 명리는 오직 독재자에 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사 문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유소기가 타도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독재정치는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다만 독재정치는 그 나름의 독특한 게임규칙이 있다. 유소기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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