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벌림(高伐林)
중국의 정치와 문화전통은 역대이래로 존비유서(尊卑有序), 즉 위계질서를 중시하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 봉건등급에 반대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중국공산당도 권력을 잡은 후에는 역시 존비유서를 따졌다. 여기에서 필자는 유방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천하를 차지한 후 논공행상을 벌이는데, 문신과 무신들이 서로 취한 상태에서 공을 다퉜다. 서로 소리치고, 검을 뽑아 탁자를 베고, 기둥을 쳤다. 유방은 그런 것이 꼴보기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등급제도, 예악규장을 제정하여 신하들을 교욱하고 백성들을 따르게 한다. 다시 조회를 개최하자 신하들은 황공해 하면서 법도를 따랐다. 유방은 그제서야 말한다: "오늘 비로소 내가 진정으로 황제의 존귀함을 맛보았구나!"
모택동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평등을 내세우며 하층민중을 동원하고 기존질서를 교란시켰지만, 일단 권력을 잡고나서는 평등이라는 명목은 여전히 내걸었지만, 자신의 통치에 유리한 정치질서를 건립하려 한다. <1984>를 쓴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거기에 유명한 문구가 있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더욱 평등한' 구성원들은 더욱 높은 대우를 누리는 것이다.
중공은 그 말의 정수를 잘 깨달았다. 어떤 직급의 관리의 주택기준은 몇 평방미터인지, 자동차는 어떤 브랜드로 안배하는지, 문건을 보더라도 비밀문건을 볼 수 있는지, 극비문서를 볼 수 있는지...그것을 조금만 잘못하면 바로 '정치착오'에 해당한다. 대회에서의 좌석배치는 물론이고, 신문방송에서의 전후서열, TV화면에서의 등장하는 순서, 누구는 10초, 누구는 5초...모두 엄격하게 권력의 크기와 지위의 고하에 따라 정해진다. 문혁때 중앙신문에 올라오는 지도자명단의 서열순서를 따져보는 것도 당시 유행이었다. 당시 세상 일을 잘 알지 못하는 나까지도, 수시로 따져보곤 했다. 지도자들이 공개행사를 하거나 화환을 바치는 경우에 1인자는 당연히 가장 중앙, 가장 앞줄에 선다. 그후에 2인자와 3인자가 양 옆에 선다. 나머지 상위들은 약간 뒤에 서고, 그 뒤에는 정치국위원, 전인대부위원장, 국무원부총리....부채꼴 모양으로 양날개를 펼친다. 한걸음을 더 나가거나, 몇분 앞서나가면 그것은 참월(僭越)이다. 당연히 거리를 너무 벌려서도 안된다. 그렇게 한다면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딴 생각을 한다는 것이 되고, 더욱 나쁘게 보면 딴 마음을 품은 것이 된다. 그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의 상사의 뒤를 따라 뒤쳐지지 않고 따라가야 한다. 내가 웃긴다고 여기는 것은 어떤 때는 조직부서에서 누구누구를 부직(副職)에 임명할 때 명확하게 그의 서열이 또 다른 어느 부직 누구누구의 뒤라고 명시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의 서열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비교적 쉽다. 현임 관직, 급별의 고하를 가지고 처리하면 된다. 그러나 역사사건에서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서열을 정할 것인가? 당시의 직무고하, 역할크기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그들이 올라간 최고관직의 고하를 가지고 정할 것인가.
남창폭동이라는 역사사건은 중공의 향후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참가한 사건이다. 건군80주년때, 즉 2007년, 1.5억위안을 들여 남창팔일기의기념관이 다시 개관했다. 봉기영웅기념인명벽이 처음 등장하고, 주은래(周恩來), 하룡(賀龍), 섭정(葉挺), 주덕(朱德), 유백승(劉伯承), 섭영진(聶榮臻), 서특립(徐特立), 곽말약(郭沫若)등 대단한 인물들의 이름이 들어간다. 전문가의 통계에 따르면, 폭동에 참가한 2만여명중에서 건국후에 국가지도자의 직무를 담당한 사람이 16명, 원수 계급을 받은 사람이 6명, 대장 계급을 받은 사람이 3명, 상장 계급을 받은 사람이 4명, 중장계급을 받은 사람이 7명, 소장계급을 받은 사람이 6명이었다. 성부급(성장,부장) 직위를 맡은 적이 있는 사람이 19명에 이른다.
1927년 8월 1일 새벽, 남창에서 폭동작전을 지휘한 사람은 3명의 나중에 원수가 되는 인물들이다: 제20군 군장 하룡, 지휘부참모단 참모장 유백승, 제3군군관교육단장 겸 남창시 공안국장 주덕.
8월 2일 새벽, 회마령(回馬嶺)에서 두 사람이 돌아온다: 전위군위서기 섭영진; 제4군 25사 73단 3영 7연 연장 임표(林彪). 8월 10일, 당시 무한중앙군사정치학교 정치부준위문서를 맡고 있던 진의(陳毅)가 구강(九江)에서 온다.
건군80주년때 중신사와 <해방군보>의 보도를 보면, 이들이 모두 보도에 나온다. 그러면서 '정치착오'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매체는 고심을 한 흔적이 보였다. 하물며 원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장도 있다. 그러니, 상장, 중장까지는 언급할 수도 없다. 보도에서 언급된 대장들은 당시의 직위가 너무 낮았다: 진갱(陳賡) 대장, 폭동때 정치보위를 책임지고 나중에 부대를 따라 남하한다. 그는 하륭의 제20군 3사 6단의 1영 영장을 맡고 있었다; 허광달(許光達) 대장, 당시 제4군 포병 배장을 맡고 있었다. 속유(粟裕) 대장, 남창폭동때 11군의 반장이었다.
<고난휘황>이라는 책의 저자인 김일남(金一南) 소장에 따르면, 1955년 계급을 받은 장군들 중에서, 주은래등 계급을 받지 않은 사람은 빼고, 8명의 원수, 4명의 대장이 남창폭동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했다. 원수는 위에서 말한 것보다 2명이 많은데, 김일남이 말하는 것은 장발규(張發奎)의 제2방면군내의 섭검영(葉劍英)과 서향전(徐向前)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들은 직접 폭동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각자 공헌을 했다. 섭검영의 남창폭동에 대한 공헌은 비밀이다. 거사전에 장발규가 지휘하는 제2방면군에서 제4군 참모장을 맡고 있던 섭검영은 하룡, 섭정등이 곧 억류되어 군권을 박탈당할 것이라는 소식을 탐지한 후, 즉시 섭정, 하룡과 구강의 감당호에서 만나 그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들이 최종적으로 결심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김일남은 4명의 대장이라고 했는데, 위에서 말한 것보다 1명이 많다. 그가 추가한 사람은 장운일(張雲逸) 대장이다. 당시 제4군 25사 참모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신분을 공개하지 않고 폭동에 참가했다. 그는 장발규를 설득하여, 공산당원인 노덕명(盧德銘)을 제2방면군 군경위단 단장에 오르게 한다. 이 단은 남창폭동에 참가할 시간은 없었지만, 나중에 추수폭동에는 참가한다. 남창폭동당일, 장운일은 공산당원인 25사 3단 단장 주사제(周士第)를 엄호하여, 폭동에 참가하는 부대가 늘어나도록 했다.
이렇게 혁혁한 원수, 장군들도 폭동때의 신분은 각자 달랐고, 모두가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창폭동 지도자를 기록하는 중공의 역사서에서 순서를 어떻게 표시하고 있을까? 수십년동앤 대체로 3가지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첫째 방식: 주은래, 하룡, 섭정, 주덕, 유백승.
둘째 방식: 주은래, 주덕, 하룡, 섭정, 유백승. 이 명단은 주덕을 하룡의 앞으로 당겨 4위에서 2위로 바꾼 것이다.
셋째 방식: 1진과 2진으로 나눈다. 남창폭동의 주요지도자 주은래, 하룡, 섭정(나중에 이입삼(李立三)이 추가되고, 서열은 주은래의 뒤, 하룡의 앞에 놓인다). 이것이 제1진이고, 나머지 지도자들 주덕, 유백승, 운대영(惲代英), 팽배(彭湃)...가 제2진이다.
역대이래로 다른 서열표시도 물론 있다. 예를 들어, "주은래, 주덕, 섭정, 하룡" 네명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혁때 하룡의 이름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문혁때도 임표의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 이건 그가 겨우 연장(連長)이었다는 이유때문에 '지도자'로 부르기 곤란해서일 뿐아니라, 임표의 소속부대는 8월 2일에 비로소 남창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문혁때, 모택동, 임표가 참가하지 않은 사건 혹은 그들이 단지 작은 역할만 한 사건에 대하여 당시의 당중앙과 이데올로기주관부서는 이런 방법을 썼다: 담화(淡化). 문혁이 고조되었을 때 선전을 가장 많이 한 것은 모택동과 임표가 정강산에서 회사(回師, 군대가 만나다)한 것이다. 이건 당연히 개소리이다. 그리고 5대혁명성지를 소산(韶山), 정강산(井岡山), 서전(瑞全), 준의(遵義)와 연안(延安)으로 하여 남창을 슬쩍 빼버린다.
북경군사박물관의 초대관장인 가약유(賈若瑜) 소장은 회고글을 쓴 바 있는데 거기서 남창폭동지도자들의 서열에 대하여 적었고 이로 인하여 하마터면 '반당'으로 몰릴 뻔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주은래의 '상방보검'이 있어서 피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1950년대, 호교목(胡喬木)의 저작 <중국공산당삼십주년>은 중공당사교재로 쓰였다.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1927년, 팔일남창기의 지도자는 주은래, 주덕, 섭정, 하룡의 네명이다. 이에 대하여 가약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료를 뒤져보니, 이런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나는 이 문제를 주은래 동지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주은래 동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남창폭동을 일으킨 지도자는 마땅히 주은래, 하룡, 섭정, 주덕, 유백승의 다섯명이라고 해야 한다. 주은래는 이 몇 명의 지도자들의 당시 지위와 역할을 모두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친필로 남창기의지도자의 성명과 서열순서를 적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주은래동지가 제공한 자료에 근거하여 해설사에도 그렇게 하고, 화가 여빙홍(黎氷鴻) 동지에게 부탁하어 대형유화를 그려서 전시했다.
1959년 8,9월, 중앙군사위원회와 주은래가 이끄는 중앙정치국 및 중앙서기처의 관리들이 전후로 군사박물관에 와서 진열내용에 대하여 심사를 진행했고, 비준을 거쳐서 예비전시를 했다. 즉, 중앙정부는 군사박물관의 남창폭동에 대한 기술을 인정한 것이다. 가약유 소장은 이어서 이렇게 적었다:
다만, 얼마 후, 하루는 돌연 중앙선전부에서 통지를 받는다. 우리에게 남창기의 유화를 들고 형제박물관으로 가서 회의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거기에 주은래, 주덕, 섭정, 하룡이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는 대형유화가 놓여 있었다.
회의는 중앙선전부 부부장 장제춘(張際春)동지가 주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지구, 같은 역사사건에 대하여 두 가지로 전시하고 있다. 이건 좋지 않다. 오늘 우리는 인식을 통일시켜야 남창기의 지도자의 서열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장 부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떤 동지는 내가 반당 반중앙이라고 지적하기 시작한다: "호교목 동지의 <중국공산당삼십주년>에서 언급한 것은 주은래, 주덕, 섭정, 하룡이다. 그런데, 너희는 주은래, 하룡, 섭정, 주덕, 유백승이라고 하였다. 이는 호교목 동지에 반대하는 것이니, 당중앙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어서 여러 사람이 발언했고, 언사가 아주 격렬했다.
나는 아주 놀랍다고 여겼고, 이렇게 말했다: "남창기의때 주은래 동지가 책임을 지고 공작을 했다. 호교목 동지는 무슨 공작을 책임졌는가? 어떻게 주은래 동지가 말한 것이 호교목 동지를 반대한 것이 되고, 호교목 동지를 반대한 것이 당중앙에 반대한 것이 되는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장제춘 동지가 물었다: "무슨 근거가 있는가?" 나는 즉시 주은래 동지가 친필로 남창기의 지도자의 서열을 적어준 쪽지를 꺼냈다. 장제춘 동지는 그 쪽지를 본 후에 이렇게 말한다: "회의는 우선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관직이 높은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가약유 소장은 체제내 인사이므로 어떤 내용은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분석을 해보자. 왜 "어떤 동지는 비판하고" "호교목 동지를 반대하는 것이 당중앙을 반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을까? 그건 중공건정초기에 호교목에게는 두 가지 신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중앙선전부 부부장이고, 다른 하나는 모택동의 비서이다. 그의 후자의 신분은 그의 말에 엄청난 무게를 실어주게 된다. 그의 상사인 중앙선전부장 육정일(陸定一)조차도 그를 어느 정도 꺼렸다. 일찌기 중앙선전부에서 일한 바 있는 중공당사전문가 완명(阮銘) 노선생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호교목이 글을 쓰거나 회의에서 발언하면, 자주 어느 것이 모택동의 '최고지시'이고 어떤 것이 자신의 견해인지를 구분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고의로 애매하게 말했고, 동료나 부하들은 그가 모택동의 비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하게 일처리를 하고자 그의 말대로 처리했다. 그런데, 이번 회의에서 감히 '호교목이 반당 반당중앙'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가약유에게도 뒷배경이 있었다. 즉, 직접 남창폭동에 참가한 지도자이며 현임 국무원총리인 주은래가 쓴 친필쪽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약유는 흥분하여 직접적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남창폭동때 주은래 동지가 공작을 책임졌는데, 호교목동지는 무슨 공작을 책임졌느냐?"라고.
이 회의에서의 일이 모택동에게까지 보고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모택동에게 있어서 주은래와 갈등은 있지만, 남창폭동에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고, 논쟁의 촛점은 주덕을 서열 2위로 놓을 것인가, 서열 4위로 놓을 것인가와 유백승을 추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그리고 이때는 주덕과 유백승은 모두 주변으로 밀려난 상황이다. 굳이 이 문제를 가지고 주은래의 말에 반박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남창폭동에서 또 한명의 특수한 참가자들이 있다. 공산당원이기도 하고, 국민당원이기도 하고. 폭동실패후 부대를 떠난다. 심지어 변절하거나 총구를 거꾸로 들었다. 이들은 부대에 큰 손실을 끼친다. 바로 채정개(蔡廷鍇)이다.
채정개가 역사상 유명한 이유는 첫째, 그가 이끄는 국민혁명군 19로군은 상해에서 항일했고, 둘째, 1933년 그가 복건에서 '중화공화국인민정부'를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창폭동때, 신체건장한 채정개는 폭동군남하부대의 좌익총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공산당이 뼛속까지 미워하는 인물이 된다.
채정개는 군인으로서 전투에 용맹했다. 그러나 그가 남창폭동에 참가한 것은 끌려간 것이었다. 폭동부대가 남창을 떠난지 이틀째 되는 날, 도중에 진현현(進賢縣)을 지나가게 된다. 채정개는 혼란을 틈타 부대내의 공산당원들을 정리한 후, 부대를 이끌고 폭동군대를 떠난다. 그가 떠남으로서 폭동부대의 남하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알아야 할 것은 채정개가 지휘한 부대는 5천명이었고, 전체 남창폭동부대 총수의 1/4에 해당했다. 이 숫자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채정개에 관하여, 사후 중공중앙지도자들은 남창폭동전위(前委, 전선위원회)가 "계속 미루고 그를 해결하지 않아서, 결국 도중에 도망쳐버렸다"라고 엄중하게 비판하게 된다. 당시 전위는 채정개가 갈라서서 떠날 것은 충분히 생각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폭동후 며칠내에 확실한 증거도 잡지 못한 상황하에서 전위가 채정개를 포함한 각급군관에 대하여 과감한 수단을 쓸 수 있었을까? 정말 손을 썼다면, 채정개의 부대를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을까?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러하다: 8월 5일, 채정개가 폭동에서 빠진다고 선언할 때, 30단 단장 범맹성(范孟聲), 28단참모장 서석린(徐石麟)등 공산당원들을 죽이지 않았었다. 그저 급여를 주고 부대에서 내보냈을 뿐이다. 나중에 채정개와 공산당은 괜찮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남창폭동때 폭동부대를 떠난 사건의 골이 너무 깊어서, 중공은 다시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켜, 복건(福建)에서 '중화공화국인민정부'를 설립했을 때, 중공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번 남창폭동부대를 떠난 사건이 남긴 음영때문일 것이다.
중공건립후, 채정개에 대하여는 상당히 예우해주었다. 그를 통일전선대상으로 규정하여, 국방위원회 부주석, 전국정협 부주석등의 직위를 준다.
채정개가 떠난 것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섭정 부대의 영장 구진(歐震)이다. 이 부대는 총구를 거꾸로 들이밀었다. 1927년 9월, 폭동부대가 광동 조산까지 퇴각하고, 장개석 휘하의 맹장 설악(薛岳)이 이끄는 부대가 월군(粤軍)제11사 진제당(陳濟棠) 부대와 합쳐서 폭동군을 공격하여, 탕갱(湯坑)에서 격전이 벌어진다. 폭동부대는 설악부대의 4개단을 궤멸시키고, 사단지휘부를 포위하여, 곧 설악부대를 섬멸할 상황이었다. 이 천균일발의 떄에 구진의 부대가 배신을 하고, 설악은 그 기회를 틈타, 증원온 월군과 맹렬하게 반격하여, 폭동군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게 된다. 그후 폭동군은 힘을 쓰지 못한다. 남하하여 광동에 혁명근거지를 건립하겠다는 구상이나, 다시 북벌하겠다는 구상이 모두 분쇄된다. 그리고 부대의 사기도 꺽여서 각급 장병들이 속속 보대를 떠나게 된다. 영장, 연장들이 줄줄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딴 살림을 차렸으며, 남은 사람들도 속속 부대를 해산하여 은신하자고 주장한다.
당시 얼마나 낭패했을까? 예를 하나 들어보면, 남창폭동부대의 마지막 회의는 10월 3일 유사회의(流沙會議)이다. 주은래가 주재했는데, 당시 그는 고열에 시달렸다. 초병이 적의 선봉부대를 발견하여, 회의는 급히 끝내고, 속속 철수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주은래의 들것을 매던 부대원도 도망쳐 버렸다. 주은래의 곁에는 겨우 섭정과 섭영진만 남았다. 세 사람이 가진 무기라고는 섭정의 권총 한자루 뿐이었다. 나중에 세 사람은 작은 배를 타고 홍콩으로 건너간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민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1) (0) | 2023.03.04 |
---|---|
"중공특과(中共特科)": 비밀조직의 진실한 이야기 (0) | 2023.02.14 |
일본은 남경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0) | 2023.02.06 |
왕명(王明)중독사건: 중공당사 최대의 미스테리사건 (0) | 2023.02.06 |
"홍기거(紅旗渠, 홍치취)"의 진상은...? (0) | 2022.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