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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어대6

강청(江靑)이 남긴 20자의 유언 글: 섭영렬(葉英烈) 중국관영매체 신화사는 1991년 6월 4일 강청의 자살소식을 전달했다. 기실 강청의 자살시간은 1991년 5월 14일이다. 미국작가 로스 테릴은 3시 30분이라고 적었다. 한 간호사가 들어왔다가 그녀가 이미 욕조위에 목을 맨 것을 발견한다. 다른 의사와 간호사들도 황급히 달려왔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이 배우, 정치가, 문화여황이며 모택동의 처였던 '백골정(白骨精)'은 77세의 나이로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저명한 진성감옥(秦城監獄)은 베이징 창핑현 동북의 친청향(秦城鄕)에 위치하고 있다. 감옥의 동원(東院)은 외부와 완전히 폐쇄되어 있었다. 강청이 거주한 곳은 독립주택으로 몇 개의 초소가 있었다. 그녀는 신문을 볼 수도 있고, 라디오를 들을 수도 있고, TV를 볼 수도 있었다. 그.. 2022. 1. 11.
조어대(釣魚臺) 국빈관의 역사 글: 홍촉(洪燭) 나의 어린 시절은 남방에서 보냈다. 머나먼 북경의 두 곳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하나는 중남해(中南海)이고 다른 하나는 조어대이다. 중남해는 조국의 심장이고, 모주석이 그 곳에 있으면서, 강산을 다스렸다. 조어대 국빈관은 많은 각국원수를 접대했다 .이 두 지명.. 2012. 10. 3.
강청(江靑)은 왜 자살했는가? 글: 양은록(楊銀祿) '문혁' 역사를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강청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을 것이다. 국내외에 어떤 신문잡지는 그녀에 대하여 계속 보도를 하고 있다. '문혁'기간동안 강청은 모택동의 권위와 자신의 지위를 가지고 호풍환우하며 권력이 아주 강했고, 영향이 아주 깊었다. 이.. 2012. 9. 19.
신중국은 왜 조어대(釣魚臺)를 국빈관으로 삼았는가 글: 홍촉(洪燭) 필자는 어릴 때 남방에서 지냈다. 머나먼 북경에 두 곳은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다 두었다: 그중 하나는 중남해(中南海)이고, 다른 하나는 조어대(釣魚臺)이다. 중남해는 말할 것도 없이 조국의 심장이었다. 모주석이 그 곳에 있으면서, 글을 쓰고 나라를 통치했다. .. 2011. 10. 8.
장옥봉(張玉鳳)의 눈으로 본 강청(江靑) 글: 섭영렬(葉永烈) 1972년, 모택동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의 곁에서 돌봐주는 사람은 수간호사(護士長) 오욱군(吳旭君)을 제외하고는 바로 장옥봉이었다. 장옥봉은 원래 모택동 전용열차의 승무원이었다. 1968년, 24살된 그녀는 철도부에서 일하던 유애민(劉愛民)과 결혼하고, 얼마후, 딸을 낳는다. 홍.. 2009. 3. 3.
중국역사상 10군데 낚시터(釣魚臺) 첫째, 강태공조어처(姜太公釣魚處) 장소: 하북성 남피현 성서쪽 5킬로미터지점 혹은 섬서성 보계현 번계하변 벌어보 남쪽 내력: 상(商)나라 말년 주왕(紂王)이 황음무도하여, 호화로운 녹대(鹿臺)를 건축하고자 하였다. 공사가 방대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하대부였던 강태공 여상(呂尙)은 직언.. 2006.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