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촉(洪燭)
필자는 어릴 때 남방에서 지냈다. 머나먼 북경에 두 곳은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다 두었다: 그중 하나는 중남해(中南海)이고, 다른 하나는 조어대(釣魚臺)이다. 중남해는 말할 것도 없이 조국의 심장이었다. 모주석이 그 곳에 있으면서, 글을 쓰고 나라를 통치했다. 조어대국빈관은 중국을 방문한 수많은 각국원수들을 맞이했다. 이 두 지방은 자주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 나왔다. 일반백성들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중남해는 북경의 시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조어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부성문(阜成門)의 서쪽이다.
중남해의 전신은 금(金)나라 황제가 피서용으로 쓰던 여름궁전(大寧宮)의 태액지(太液池, 西華潭)였다. 조어대도 마찬가지로 금나라때의 유적이다. <일하구문고>에 따르면, "조어대는 삼리하의 서쪽에 1리정도 떨어져 있다. 대금시대의 옛유적이다. 대의 아래에는 샘물이 솟아올라서 연못을 이루었고, 그 물은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 서산산록의 무이 모조리 이 곳으로 들어온다." 조어대의 수원은 서산의 각 샘들이다. 중남해는 '옥천산 및 북경 서북의 물을 원천으로 하여 거기로 끌어들였다" 둘은 이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이를 보면 금나라때 수리를 중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리는 국가와 백성에 이로올 뿐아니라, 왕후장상의 놀이에도 편리를 제공했다. 태액지와 조어대는 모두 금나라 중도(中都, 지금의 광안문 일대)의 성밖에 있는 자랑할만한 '수경낙원(水景樂園)'인 셈이다. 황실구성원들이 성안에서 지내기 지겨워져서 한바퀴 둘러보며, 물놀이라도 하고 싶으면 태액지로 가서 배를 타거나, 조어대로 가서 낚시를 했다.
<제경경물략>에 따ㅡ면, "부성문을 나서서 남으로 시빌를 가면, 화원촌이 있다. 옛 화원이다. 그곳의 나무는 이미 잘려서 논두렁이 되었다. 금나라 왕도의 조어대이고, 앞에는 옥연담이 있다. 지금의 연못이다. 샘이 땅에서 솟아오른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이로 인하여 대를 만들고 낚시를했다. 조어대는 그렇게 붙인 이름이다." 조어대는 금나라 황제가 쓰던 낚시터인 것이다.
금애종의 어제시를 봐도 이는 증명된다. "금왕난여기도래(金王鸞與幾度來), 조대고욕비금대(釣臺高欲比金臺)". 그는 스스로 조어대를 연소왕(燕昭王)의 황금대(黃金臺)와 비교하며 스스로를 끌어올렸던 것이다. 연소왕은 연나라수도에 대를 쌓고, 황금을 그 위에 두고 천하의 명사들을 모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 일대의 명군이 황금으로 낚은 것은 일대의 인재들이었다. 금애종이 현인들을 갈구하던 연소왕과 비교할 바는 못된다. 그는 대에 올라서 순수히 물고기만 낚았다. 그저 시골어부의 정취를 체험했을 뿐이다. 좀더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인생을 즐기기만 한 것이다. 제왕에 있어서, 큰 물고기 하나를 잡는 것과 준재를 하나 얻는 것은 비록 쾌감은 비슷할지 몰라도 수준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하물며 뿌린 미끼를 보더라도 낚시하는 사람의 인색함과 통큼이 드러나게 된다. 금애종이 낚시할 때 물린 것은 기껏해야 지렁이류이다. 그러나 무형의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던 연소왕은 한번에 천금을 뿌리고, 강산을 내어주는 것도 아까워 하지 않았다.
연소왕은 통이 컸다. 널리 중원의 현명한 인재들을 끌어모았고, 제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연나라를 기사회생시켰다. "갑옷입은 병사가 수십만, 마차가 칠백승, 말이 육천필, 군량미는 10년을 버틸 정도이다" 실지를 회복했을 뿐아니라, 제나라의 성 72개를 함락시켜(제나라의 수도 임치 포함), 복수를 했다. 제나라의 금은재화, 차갑진보는 모조리 연나라에서 차지한다. 옛날에 인재를 끌어모으기 위하여 황금을 쌓아두었던 황금대는 다시 한번 전리품으로 가득찼다. 적국의 홍종대려, 보정예기가 모두 황금대에 놓여서 전시되었다.
금애종은 그저 낚시의 즐거움만을 누렸다. 인재가 부족한 점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조어대를 연소왕의 황금대와 비교했는데, 이는 그저 자신의 부를 자랑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의 낚시실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황제는 조어대에서 얼마나 낚았을까? 기껏해야 한바구니정도일 것이다. 정치적업적에서, 금애종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결국 몽골군에 포위되어 자결한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어대는 망국의 군주 한 명을 보낸 것이다.
원나라가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한 고관대작이 조어대를 자기의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화원별장으로 개조한다. 이때 듣기 좋은 이름을 붙인다. 만류당(萬柳堂). 당시 사람은 이렇게 묘사했다: "제류사수(堤柳四垂), 수사면(水四面), 일저중앙(一渚中央), 저치일사(渚置一榭), 수치일주(水置一舟), 사정조문(沙汀鳥聞), 곡방일규(曲房一窺), 등화일가(藤花一架), 수자일방(水紫一方)"(개략 해석하면, 제방에 있는 버드나무는 사방으로 줄기를 늘어뜨리고 있고, 물이 사방에 있는데, 가운데 있는 물가에는 정자를 하나 만들어 두었다. 물에는 배를 묶어 놓았다. 물가모래에는 새소리가 들리고, 골방에서 바라보니 등나무꽃이 한 쪽에 보이고, 찬란한 물이 다른 한 쪽에 보인다.)
청나라 건륭연간에, 조어대는 다시 왕기를 받는다. 황실의 행궁으로 승격한다. 수역의 면적도 약간 늘어난다. 그러나, 여전히 금나라때부터 전해져온대로 향산에서 도랑을 통해서 물을 받았다. 금나라황제의 어대는 일찌감치 황폐해졌으므로, 다시 토목공사를 벌여서 그 유적지에 벽돌로 쌓은 높은 대를 만든다. 대에 올라서 멀리 바라보면서 건륭제는 참기 힘들었을까? 따라온 태감에게 붓과 먹을 준비하게 시켜서 '조어대'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남긴다. 그리고 이를 새겨서 서문의 편액으로 삼게 한다. 건륭제는 조어대로 와서 낚시는 하지 않았다. 그저 붓글씨연습만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글을 남겼던 풍류황제이다. 중남해에서 조어대까지 북경의 여러 경치 내지 전국각지(특히 강남)에는 이 아마추어서예가의 글씨를 지금도 볼 수가 있다. 금나라황제는 낚시에 빠졌지만, 청나라황제는 대부분 글쓰고 시부를 남기는 취미가 있었다.
마지막황제인 선통제(부의)에 이르러, 조어대는 다시 주인이 바뀐다. 부의는 통크게 이곳을 자신의 스승인 진보침(陳寶琛)에게 하사한다. 아마도 진씨늙은이는 놀라면서도 기뻤을 것이다. 몰래 스스로를 몇 번이나 꼬집어봤을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이 '학비'는 확실히 비쌌다. 노교수는 부지불식간에 큰 물고기를 낚은 것이다.
북경해방전날, 부작의(傅作義)는 장군으로서 이 곳을 별장으로 삼았다. 부작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공산당군애에 자신이 방어하던 북경성을 넘겨주었다. 이렇게 하여 문화재와 고적들이 전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1959년, 조어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빈관이 된다. 이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다. 고대를 포함하여 점유면적이 40만평방미터가량에 이르며, 15개의 고박하고 화려한 국빈관건물이 들어선다. 새로 세 개의 인공호를 파고, 옥연담의 물을 끌어들인다. 고조어대의 황제행궁은 1982년에 새로 짓는다. 기본적으로는 청나라때 건륭행궁의 원모습을 그대로 살렸다. 행궁안의 재, 헌, 정, 대의 건축양식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중국의 고전 원림건축의 독특한 품격을 그대로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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