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조어대(釣魚臺) 국빈관의 역사

중은우시 2012. 10. 3. 19:26

글: 홍촉(洪燭) 

 

나의 어린 시절은 남방에서 보냈다. 머나먼 북경의 두 곳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하나는 중남해(中南海)이고 다른 하나는 조어대이다. 중남해는 조국의 심장이고, 모주석이 그 곳에 있으면서, 강산을 다스렸다. 조어대 국빈관은 많은 각국원수를 접대했다 .이 두 지명은 자주 신문, 방송에서 나타났다. 백성들도 귀가 따갑게 들어봤다.

 

중남해는 북경의 시중심에 있다. 조어대는 약간 편벽한 곳에 있다. 부성문(阜成門) 바깥의 교외에 있다. 중남해의 전신은 금나라 황제가 피서하던 여름궁전인 대녕궁(大寧宮)의 태액지(太液池) 즉 서화담(西華潭)이다. 조어대도 마찬가지로 금나라때의 유적이다. <일하구문고(日下舊聞考)>에는 이런 말이 있다: "조어대는 삼리하(三里河) 서리호(西里滸)에 있고, 대금(大金)때의 구유적이다. 대의 아래에 샘이 솟아나는 곳을 모아서 연못으로 만들었다. 그 물은 겨울에 되도록 마르지 않았다. 서산 산록의 물은 모조리 이 곳에 모인다." 조어대의 수원은 서산(西山)의 여러 샘이다. 중남해는 "옥천산 및 북경 서북의 수계를 끌어들어 수원으로 삼았다." 양자는 일맥상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금나라때 수리를 아주 중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리는 국가와 민족을 이롭게 할 뿐아니라, 제왕장상이 놀이하는데도 편리를 제공한다. 태액지와 조어대는 모두 금나라 중도(中都), 지금의 광안문일대의 성밖에 만들어놓은 '수경낙원(水景樂園)'이다. 황실구성원은 성 안에 머무는데 싫증이 나서 바깥을 한바퀴 돌아보고 싶을 때, 물놀이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태액지로 가서 놀잇배를 젓거나, 조어대로 가서 낚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부성문을 나서서 남으로 십리를 가면, 화원촌이 있는데 옛 화원이다. 그 뒤에 나무가 있는데, 지금은 평지이다. 금나라황제가 만든 욱조어대(郁釣魚臺)가 그 곳에 있다. 그 앞에 옥연담이 있는데, 지금의 연못이다. 샘이 땅에서 솟아오른다. 옛날과 지금 사람들이 그래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욱대는 낚시를 하여, 조어대라고 이름을 붙인다." 필자는 여기원문에서의 '욱'자는 '어(御)'자와 통한다. 그러면 이해가 더욱 쉬울 것이다. 조어대는 금나라황제의 어용이므로 어대(御臺)인 것이다.

 

금애종의 어제시(御製詩)가 이를 증명한다: "금주난여기도래(金主鸞輿幾度來), 조대고욕비금대(釣臺高欲比金臺)". 그는 조어대를 연소왕(燕昭王)의 황금대(黃金臺)와 비교하면서 혼자 즐기고 있었다. 연소왕은 연나라의 수도에 대를 쌓고 황금을 그 위에 놓아둔다. 그리고 천하의 명사들을 모집하여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는다. 그 일대의 명군은 많은 돈을 들여서 인재들을 낚았다. 치국안방(治國安邦)의 인재들을. 금애종이 그 현명한 인재를 갈구했던 연소종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대에 오른 것은 순전히 물고기를 낚기 위함이다. 그가 체험한 것은 겨우 낚시꾼의 쾌감과 비슷하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는 본분이 아니다. 인생을 즐기는 것뿐이다. 제왕에 있어서 큰 물고기 하나를 낚는 것과 한 인재를 얻는 것은 비록 쾌감에서는 비슷하지만, 수준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가 내놓은 미끼는 낚시꾼이 인색한지 호탕한지를 알 수 있다. 금애종이 낚시에 건 것은 지렁이 몇 마리이다. 그러나 무형의 낚시대를 들고 있던 연소왕은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연소왕은 씀씀이가 컸다. 널리 중원의 인재를 모았고,  제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연나라를 기사회생시켰다. "갑옷을 입은 병사가 수십만이고, 수레가 칠백승, 전마가 육천필, 곡식은 십년을 버틸 수 있었다." 실지를 수복했을 뿐아니라, 역공하여 제나라의 72개성(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성 포함)을 함락시켜, 복수를 했다. 제나라의 금은재보와 수레, 갑옷등은 모조리 연나라로 귀속되었다" 옛날에 큰 돈을 아끼지 않고 인재를 끌어모으던 황금대는 이제 전리품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심지어 적국의 홍종대려(洪鐘大呂), 보정예기(保鼎禮器)도 모두 황금대에 놓고 전시했다.

 

금애종은 그저 낚시의 즐거움만 추구했다. 인재의 결핍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조어대를 연소왕의 황금대와 비교했지만, 이는 그저 부자가 돈많은 것을 다투는 것뿐이다. 나는 그의 낚시수준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그가 조어대에 가서 얼마나 많이 낚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껏해야 몇 광주리일 것이다. 정치적 업적에서 금애종은 아무런 성취도 거두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몽골군에 포위되어 목을 매고 자결한다. 정말 비애이다. 조어대는 한 망국지군을 이렇게 보낸 것이다.

 

원(元)이 금(金)을 멸한 후, 한 고관대작이 조어대를 자신의 것으로 하여 화원별장을 만들고 멋진 이름을 짓는다. 만류당(萬柳堂). 당시 사람들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제방의 버드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물이 사방에 있고, 한 모래섬이 가운데 있는데, 모래섬에 정자(榭)를 세우고, 물에는 배를 놓아두었으며, 모래톱에는 새우는 소리가 들리며, 곡방(曲房)에서 내다보면, 등나무꽃이 한편에 보이고, 물빛이 한 편에 보인다."

 

건륭연간에 이르러 조어대는 다시 한번 황제의 기운을 받는다. 황실의 행궁이 된다. 수역면적도 약간 증가된다. 그러나 여전히 금나라때에 향산에서 끌어온 물길을 유지했다. 금나라황제의 어대는 이미 무너졌으므로, 토목공사를 벌여서 그 유적지에 다시 벽돌로 쌓은 높은 대를 만든다. 대에 올라서 멀리 보면서 건륭은 아마도 손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던 태감을 시켜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한 다음 "조어대"라는 글자를 크게 썼고, 이를 서문의 편액으로 조각해서 걸어놓으라고 명령한다. 건륭제는 조어대로 왔지만, 낚시는 하지 않았다. 그저 서예를 연습했을 뿐이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누구누구 이 곳을 다녀가다"라는 글을 남겼던 풍류황제이다. 중남해에서 조어대까지, 북경의 경치마다, 그리고 전국각지(특히 강남)에 그 아마추어 서예가가 남긴 글씨를 볼 수가 있다. 금나라황제는 낚시에 맛을 들였지만, 청나라황제는 글을 써서 남기는 취미가 있었다.

 

마지막황제 선통제에 이르러, 조어대는 다시 주인이 바뀐다. 부의는 시원시원하게 이 곳을 자신의 공부를 도와준 스승 진보침(陳寶琛)에게 하사한다. 아마도 진보침은 놀라고도 기뻐하며 자신의 뺨을 몇 번이나 꼬집어 보았을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이 '학비'는 확실히 비쌌다. 늙은 스승은 부지불식같에 큰 대어를 낚은 것이다.

 

북경이 해방되기 전날, 부작의 장군은 이곳을 별장으로 삼는다. 부작의 장군은 한 가지 큰 공로를 세우는데, 공산당군대에 자신이 방어하던 북경성을 넘겨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문화재와 고적이 총포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필자는 추측해본다: 그는 아마도 조어대에서 심사숙고했을 것이고, 결국 정확한 선택을 했다.

 

1959년, 조어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빈관이 된다. 이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다. "고대(古臺)를 포함하여, 부지면적은 40만평방미터가량이 된다. 15개의 조형이 고박하고, 옹용화귀한 빈관루가 새로운 원림건축군을 이룬다. 국빈관내의 물길이 에워싸고 돌아서, 아주 아취가 있다. 수목이 울창하며 새로 3개의 인공호를 파서 옥연담의 물을 끌어들인다. 고조어대의 황제행궁은 1982년 재건되었으며, 기본적으로 청나라 건륭행궁의 원모습을 유지한다. 행궁내의 재(齋), 헌(軒), 정(亭), 대(臺)의 건축양식은 모두 특색이 있다. 이는 충분히 중국고전원림건축의 독특한 풍격을 보여준다. 양원재(養源齋)는 굽은 회랑이 구불구불하게 놓여 있으며, 작은 봉우리와 돌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아름답고 다양하다.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양원재의 앞에서 하나의 파란 연못이 된다. 유람하는 사람이 이 곳에 이르면 마음이 경치와 하나가 되고, 물고기와 새들도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소벽헌(瀟碧軒)의 앞에는 연못이 있어 낚시를 할 수 있다. 징의정(澄漪亭)은 흙과 돌로 쌓은 가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대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옥연담의 수려한 경치가 눈앞에 끝까지 펼쳐진다."

 

조어대 국빈관의 경계는 아주 엄격하다. 야채를 좋아하는 미식가 왕증기(汪曾祺)가 한번은 이 곳을 지나가다가 높은 담장의 바깥에 많은 회채(灰菜)가 자라는 것을 발견한다. 회채는 두텁고 부드러웠다.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여서 이를 캐서, 가지고 가던 책가방에 넣었다. 집으로 가져가서 볶아서 먹으려 한 것이다. 경비는 놀라서 급히 달려왔고, 그에게 심문한다: "뭐하는 겁니까?" 왕증기는 고분고분 책가방을 열어서 회채를 보여주며 질문에 응했다. 경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떠나갔다. 나중에 왕증기는 아주 유머스럽게 말했다. "그는 아마도 내가 무슨 시한폭탄을 설치하는 줄 알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