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섭영렬(葉英烈)
중국관영매체 신화사는 1991년 6월 4일 강청의 자살소식을 전달했다. 기실 강청의 자살시간은 1991년 5월 14일이다. 미국작가 로스 테릴은 3시 30분이라고 적었다. 한 간호사가 들어왔다가 그녀가 이미 욕조위에 목을 맨 것을 발견한다. 다른 의사와 간호사들도 황급히 달려왔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이 배우, 정치가, 문화여황이며 모택동의 처였던 '백골정(白骨精)'은 77세의 나이로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저명한 진성감옥(秦城監獄)은 베이징 창핑현 동북의 친청향(秦城鄕)에 위치하고 있다. 감옥의 동원(東院)은 외부와 완전히 폐쇄되어 있었다. 강청이 거주한 곳은 독립주택으로 몇 개의 초소가 있었다. 그녀는 신문을 볼 수도 있고, 라디오를 들을 수도 있고, TV를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뜨개질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썼다. 강청의 딸 이눌(李訥)은 2주마다 한번씩 면회를 와서 그녀에게 물건을 가져다 주었다.
강청은 몸이 좋지 않았다. 1984년 5월 4일, 관련부서는 그녀에게 병보석을 허락하고, 그녀를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거주하게 했다.
1988년 12월, 모택동탄신 95주년기념일에 강청은 가족모임을 갖게 해달라고 요구하나, 허락받지 못한다. 그녀는 평소에 모아놓았던 50개의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고 자살을 기도한다. 간수가 발견한 후 응급구조하여 위험을 벗어났다. 그후 더 이상 그녀에게 수면제를 주지 않았다.
1989년 3월 30일, 병보석이 끝나고, 강청은 다시 진성감옥으로 돌아온다. 감옥에 돌아온 후, 의사는 그녀를 검사하다가 인후암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 수술을 건의한다. 강청은 극력 거부한다. 인후를 베어버리면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1989년 11월 중공중앙은 다시 한번 그녀의 병보석을 허가한다. 거처할 장소에 관하여 강청은 중남해이 모택동 고거(故居)로 가게 해주거나 아니면 그녀가 '문혁'때 거점으로 삼았던 조어대 국빈관 17호루로 가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모두 거절당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중앙판공청의 관련인원들 앞에서 오른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너희가 동의하지 않으면 나는 다시 자살하겠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중앙판공청의 관련부서에서는 북경 주선교(酒仙橋) 부근에 그녀가 머물 수 있는 2층짜리 독립주택을 구하여, 여간호사를 1명 배치해서 그녀를 돌봐주게 한다. 그녀도 그제서야 묵인했고,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강청전전>의 기재에 따르면, 1991년 2월 15일, 강청은 북경 주선교의 거처에서 고열에 시달린다. 그리하여 공안의원에 보내어진다.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강청은 입원서류를 썼다. 이번에 그녀는 "이윤청(李潤淸)"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녀는 다시 한번 모택동과의 결혼을 그리워하는 정을 드러낸 것이다. "윤(潤)"은 모택동이 일찌기 사용한 자(字) 윤지(潤之)에서 따왔고, "이"는 강청의 성이고, "청"은 강청의 "청"이다.
3월 18일, 강청은 열이 내려갔고, 체중도 몇 킬로그램 줄었다. 그녀가 병실에서 입원치료를 받을 때, 병실은 침실, 화장실과 거실이 있었다. 의사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인후암수술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가 조심스럽게 한 무산계급혁명전사를 대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날로 허약해갈 때, 강청은 자주 모택동을 그리워한다. 그녀는 침대에 모택동의 글씨를 놓아두었고, 옷에는 모택동의 상장을 달았다. 침대머리에는 강청과 모택동이 중남해를 새벽에 산보하던 사진을 놓아두었다. 매일 새벽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때면, 모택동의 시사나 모택동의 선집을 외웠다. 청명절이 도래했을 때, 그녀는 천안문광장의 모택동기념관을 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동시에 딸 이눌이 백지를 가지고 공안의원으로 와서 모택동에게 화환을 바칠 수 있게 해달라는 것도 요구한다. 그러나 그녀이 이 두 가지 요구는 모두 거절당한다.
강청은 서둘러 그녀의 회고록을 썼다. 매일 새벽, 모택동의 책을 읽은 후, 그녀는 종이와 붓이 놓여진 작은 탁자옆에 앉는다. 기분이 좋을 때는 역사기록을 수정하기 위하여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원고의 제목에 대하여 간호사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모주석의 충성스러운 전사>가 어떤가?" 혹은 "<모택동사상에 바친 일생>은?" 혹은 "수정주의타도, 신세계건립>?"
5월 10일, 강청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쓰던 회고록의 원고를 찢어버린다. 그리고 주선교의 그녀의 거처로 가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주변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다만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허가하지 않았다. 5월 12일, 강청의 상황을 전해듣고, 이눌과 그녀의 남편이 강청을 보러 온다. 그러나 강청은 그들을 만나기를 거절한다.
5월 13일, 강청은 <인민일보>의 제1면이 위치에 이렇게 쓴다: "역사상 기념할만한 하루" 25년전의 이날, 문화대혁명중의 1966년 5월 13일, 정치국은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새로운 투쟁노선을 결정하고, 동시에 강청은 권력이 아주 큰 문화대혁명영도소조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5월 14일 새벽 1시 30분, 간호사는 강청의 침실을 나간다. 그러나 3시 30분 당직간호사가 들어왔을 때, 강청은 이미 자살하여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추측에 따르면, 강청은 간호사가 나간 후, 평소에 신경써서 남겨두었던 손수건을 몇 장 연결하여 밧줄로 만든다. 그 후에 이불과 베개를 밟고 강청이 그 위에 서서 밧줄을 욕조위의 쇠기둥에 걸고, 자신의 목에 두른 것이다. 개략 3시경에 숨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강청은 여러번 자살을 시도한 바 있다. 1930년대 당납(唐納)과 싸울 때 강청은 자살을 언급한 바 있다. 1976년 체포된 후, 절망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자살을 생각한다. 1984년 9월, 모택동기념관을 참배하겠다는 요구가 거절된 후 그녀는 젓가락을 하나 목에 찔러넣은 적이 있다. 적시에 발견해서 응급조치로 구해낸다. 1986년 5월,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그녀는 양말 몇 개를 연결해서 밧줄을 만든 후, 자신의 목에 건 적이 있다.
이번에는 마침내 강청은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강청은 자살하기 전에 '절명서'를 남긴다. 당시 업무인원들은 그녀의 곁에 있는 탁자위에 놓인 신문에서 강청이 친필로 쓴 임종유언을 발견한다. 절명서이다. 이 절명서는 단지 20자이다. 그러나 글자 하나하나에서 강청의 모택동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신문에 강정은 단정하게 써놓았다:
"주석(主席), 아애니(我愛你)! 니적학생화전사래간니래료(您的學生和戰士來看您了). 강청자(江靑字)"
주석, 사랑합니다. 당신의 학생이자 전사가 당신을 보러 왔습니다. 강청 씀
강청의 이 절명서는 당시 일본의 <문예춘추>에 게재된 바 있다.
그날 오후, 이눌이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와서 사망통지서에 서명한다. 이눌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중앙판공청의 뜻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한 형식의 장례식도 거행하지 않는다. 3일후인 5월 18일, 강청의 유해는 화장된다. 이눌은 현장에 없었다. 강청 혹은 모택동의 다른 어느 친척도 현장에 없었다. 이눌은 유골함을 달라고 요구한다.
타임지가 6월 1일 익명의 북경방면의 소식통에게 전해들었다면서 강청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보도한다. 여기에는 인후암이 자살의 원인이라고 썼다. 며칠 후인 6월 4일 저녁 11시, 중국정부는 타임지보도의 주요내용을 확인해준다. 공고전문은 이러하다: "임표,강청반혁명집단의 주범 강청이 병보석기간중인 1991년 5월 14일 새벽, 북경의 그녀의 거주지에서 자살로 사망했다. 강청은 1981년 최고인민법원특별법정에서 사형, 2년집행유예, 정치권리종신박탈의 형을 받았다. 1983년 1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984년 5월 4일 병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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