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은록(楊銀祿)
'문혁' 역사를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강청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을 것이다. 국내외에 어떤 신문잡지는 그녀에 대하여 계속 보도를 하고 있다. '문혁'기간동안 강청은 모택동의 권위와 자신의 지위를 가지고 호풍환우하며 권력이 아주 강했고, 영향이 아주 깊었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혁' 개시후, 진백달(陳伯達)이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이 되고, 강청이 제1부조장이 된다. 진백달은 한동안 병가로 쉬면서, 중공중앙은 강청을 대리조장으로 임명하여, 문혁소조의 전면적인 영도업무를 맡는다. 진백달이 조장의 직위에 있을 때에도, 강청이 실질적인 1인자였다. 왕왕 그녀가 최종결정을 했다. 중공제9기 1중전회에서, 강청은 중앙정치국위원으로 선임되어, 중공중앙의 핵심영도자중 한 명이 된다. 1976년 10월 6일, 그녀는 중공중앙에 의하여 격리심사를 받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법정에서 그녀는 '대의늠름'한 자태로 큰 소리를 쳤다: "내가 누구를 무서워한 적이 있느냐. 나는 무법무천(無法無天)이다." 강청의 이런 모습을 친히 본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강청처럼 강골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자살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의 사례를 보면, 강청의 성격과 그녀가 자살한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68년 10월, 중공중앙은 유소기(劉少奇)의 당적을 박탈하고, 당내외의 일체 직위를 취소한다. 그때 강청은 복잡한 심정을 나타냈다. 춘풍득의와 초조불안이다. 하루는 그녀가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에 계단에서 목이 마르다고 급히 물을 달라고 한다. 간호사가 물 한잔을 건네자, 그녀는 한 모금을 마신 후 물이 뜨겁다고 간호사의 얼굴에 물을 뱉아낸다. 그리고 물잔을 바닥에 던져서 깨트려버렸다. 그러면서 큰소리로 말한다: "너희는 유소기를 타도하기 위하여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아느냐, 얼마나 쉽지 않았는지 아느냐. 너희가 이렇게 나를 대하면, 나에게 이렇게 뜨거운 물을 마시게 하면 이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냐?" 이번 전회이후 강청은 자주 주변사람들에게 말했다: "장래에 만일 자본주의가 복벽하면, 수정주의분자, 주자파가 등장할 것이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관직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것이다."
강청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나는 근거리에서 관찰했고, 그녀가 완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969년 하반기부터, 전국은 전쟁준비상태가 된다. 하루는 강청이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각종 전쟁준비업무를 잘 해야 한다....더욱 중요한 것은 차량운전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운전을 배워야하낟. 만일 적의 습격을 받고, 운전사가 죽으면, 경위병이 운전해서 도망칠 것이다; 만일 경위병이 또 총에 맞아 죽으면, 비서가 운전해서 도망쳐야 한다; 만일 비서도 총에 맞아 죽으면, 간호사가 운전해서 도망쳐야 한다; 만일 너희들이 모두 총에 맞아 죽으면, 나 자신이 운전해서 도망쳐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을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할 수가 없다. 나 강모의 성격도 아니다"
1970년 1,2월, 북경주변지구에 지진이 발생할 지로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후, 강청의 민감한 신경은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녀가 엄숙하게 나에게 말했다: "나의 안전을 보증하는 것이 너희의 책임이다. 당중앙, 모주석이 너희에게 내린 임무이다. 나의 안전문제는 조그만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된다. 만의 하나라도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
1971년 상반기의 어느 날, 강청은 돌연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우리에게 조어대 10호루의 거실옥상테라스에 온실을 만들자고 했다. "옥상 온실의 안에는 철골을 세워서 한줄한줄 만드는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게 만들면 채광이 좋을 것이다. 철골에는 큰 화분을 놓고, 화분에는 흙을 담으면 내 생각에 무슨 화초, 채소같은 것을 심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을 나서지 않고도 시간을 보내고, 몸도 단련할 수 있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의 지시에 따라 잘 연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왕동흥(汪東興, 당시 중공중앙판공청 주임) 동지의 지시를 받은 후 당신에게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나는 강청의 의견에 따라, 즉시 강청 주변의 업무인원과 조어대의 책임자 및 기술자를 불러서 회의하고, 연구했다. 회의참석자들은 모두 거실옥상은 너무 넓어서, 강청의 요구대로 물건들을 놓는다면 너무 무겁다. 안전문제를 처리하기 어렵다. 거실내에는 큰 기둥을 몇 개 세울 수도 없다. 그들은 일치하여 말했다: "강청의 안전을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그녀를 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설득하자." 우리는 연구한 의견을 왕동흥에게 보고했는데, 그는 말했다: "너희의 의견이 아주 좋다. 그렇게 그녀에게 설명해라. 그녀는 너희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그녀를 잘 안다."
나는 강청에게 우리의 연구의견을 보고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자주 거실에서 일을 보고, 휴식을 취하고 손님을 만나는데, 만일 옥상이 무너진다면, 큰 일이 납니다. 우리는 책임을 부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하여, 안하는게 좋겠습니다. 우리의 의견을 고려해주십시오."
강청은 그 말을 들은 후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급히 말한다. "너무 위험하구나. 하지말라. 하지 말라."
1972년 7월, 강청이 북대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돌연 하북성 창려현의 갈석산에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말했다: "갈석산은 조조가 가본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관창해>라는 시를 한 수 읊었다. 나는 조조의 문공무략을 좋아한다. 그가 가봤던 곳을 한번 가보고 싶다. 너희가 어레인지해라." 우리는 강청의 의견에 따라, 사람을 보내어 답사를 했다. 답사를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그 산은 비록 높지 않으나 아주 가파르고 길이 없어서 오르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 상황을 그녀에게 보고하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활간(滑竿, 두 사람이 메는 등산용 들것)을 타면 되지 않느냐. 너희가 메라." 우리는 말했다. "안됩니다. 길이 없습니다. 등산때 사람이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아주 위험합니다."그녀는 나에게 말한다: "소양. 총리에게 전화를 해라. 그에게 헬리콥터를 하나 보내달라고 해라. 내가 헬리콥터를 타고 올라가겠다. 내가 올라갈 수 없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나의 이런 조그마한 바램도 이룰 수 없단 말이냐." 나는 그녀의 분부에 따라 총리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총리는 명확하게 말한다: '안된다. 너무 위험하다. 만일 헬리콥터가 고장난다면, 저울추처럼 떨어질 거이다. 만일 사고가 발생하면, 나는 당중앙, 모주석에 말씀드릴 수가 없다. 네가 강청 동지에게 가지 말라고 말해달라." 강청은 그 말을 들은 후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저울추처럼, 저울추처럼, 떨어진다고, 떨어진다고. 너무 무섭군. 안간다. 안간다. 소양 네가 총리에게 보고해라 내가 가지 않겠다고."
'문혁'기간 복주군구정위 유배선(劉培善)은 비투(批鬪)로 자살했다. 모택동은 복주군구의 보고때 비시(批示)를 한다. 출로를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자살한 것이다. 강청은 이 보고서와 모택동의 비시(批示)를 보고는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안타까워하며 나에게 말했다: "유배선의 자살은 주석을 놀라게 했다. 그는 전공이 있는 사람이다. 주석은 그의 자살을 아깝게 생각한다. 그가 왜 자살을 하였는가? 왜냐하면 그는 출로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절망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지경에 이르면 정신이 완전히 붕괴된다. 머리는 텅 비어버리고, 무슨 일이든 저지른다. 그래서 그는 자살의 방법을 취하여, 일생을 마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너무 아쉽다. 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내 생각에 자살의 방법은 취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사례들이 있지만 하나하나 열거하지는 않겠다.
이상의 사례를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다. 강청은 겁이 많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겁이 많고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왜 자살을 택했을까?
사람이 자살하는데는 여러가지 상황이 있다: 고문을 당해서 신체적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고, 모함을 받아서 분함을 참지 못해서 자살한 경우도 있고, 죄를 짓고 겁이 나서 자살한 경우도 있다. 확실히 강청의 자살은 이상의 세 가지 상황에 속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절망으로 자살한 경우이다. 그녀는 격리조사(후에 판결을 받음)를 받은 후, 꼬박 15년의 기간동안 국내외의 형세가 안정되고, 인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한다. 이전의 휘황을 회복하는 것은 이미 희망이 없다고 여긴다. 게다가, 인후암을 앓아서, 심리적 생리적으로 모두 고통이 있었다. 그녀는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의 생명을 끊은 것이다.
1991년 3월 15일, 강청은 북경 주선교(酒仙橋)의 거주지에서 고열이 내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공안의원(公安醫院)으로 보내진다. 3월 18일, 고열은 내려간다. 5월 10일 그녀는 주선교의 거주지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다.
5월 14일, 새벽 3시경, 강청은 손수건(일설에는 침대보를 길게 찢었다고 한다)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자신을 화장실 욕조 위의 쇠막대에 걸어서 자살한다. 향년 76세이다. 관련 글을 보면, 강청은 임종전에 5월13일의 <인민일보>에 급히 이렇게 썼다고 한다: "역사상 기념할 만한 하루" 필자는 적지 않은 글에서 강청이 쓴 이 문구를 "이날, 1966년 5월 13일, 정치국이 회의를 개최하여 강청을 중앙문혁소조의 책임자로 임명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나는 그런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적지 않은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이런 주장의 근거는 찾지 못했다. 다만, 나는 1966년 5월 28일 "중공중앙은 중앙문화혁명소조를 설립하는데 관한 통지를 발송했다. 조장 진백달, 고문 강생, 부조장 강청, 왕임중, 유지견, 장춘교, 조원 사당충, 윤달, 왕력, 관봉, 척본우, 목흔, 요문원" 이렇게 보면, 강청이 중앙문혁소조의 책임자로 임명된 날도 5월 13일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강청의 각도에서 보면, '문혁'기간동안 그녀에게 기념비적 의미가 있는 것은 두 사건이다:
첫째, '문화대혁명'중 유소기를 타도한 것이다. 1967년 1월 13일, 유소기는 모택동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9월 13일, 유소기의 부인 왕광미(王光美)가 감옥에 갇힌다. 1968년 10월 13일에서 31일까지 중공 제8기의 확대12중전회가 북경에서 개최된다. 전회는 유소기사건의 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유소기를 영원히 당에서 제명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기로 결정한다. 회의기간, 강청은 마치 금방 승리를 거둔 장군이 개선한 듯한 모양이었다. 기세가 대단했다. 1980년 2월 중공11기 5중전회에서 전 국가주석 유소기의 명예회복을 결정한다. 강청은 진성감옥(秦城監獄)에서 라디오를 통하여 이 사실을 듣는다. 하루는 전국에서 반기를 게양하고, 하룻동안 문예활동을 정지하고 유소기를 추도했다. 그러나 강청은 감옥에서 경극을 불렀다. 손동작을 하면서 노래를 했다.
둘째, 1971년 9월 13일 임표등이 256호전용기를 타고 도망친 일이다. 13일 새벽3시경, 비행기는 몽골 원두얼칸에서 추락하고, 임표 일당은 멸망한다. 이후, 강청은 자주 우리에게 말하곤 해다: "그는 나를 적지 않게 해쳤다. 나는 일찌감치 임표의 음모를 발견했다. 그들의 실패는 내가 오랫동안 그들과 투쟁한 결과이다."
강청은 아주 강해보이고, 체면을 중시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성격이 강렬하고 고집세며, 절대로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살을 선택하고, 이 세계를 떠나려고 결심하고, 가족을 떠나려고 결심했을 때, 마음 속의 갈등이 아주 격렬했을 것이고 아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녀를 동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성격으로 봐서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며, 오랫동안 마음의 갈등을 거쳐서 비로소 결심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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