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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청)

장옥봉(張玉鳳)의 눈으로 본 강청(江靑)

by 중은우시 2009. 3. 3.

글: 섭영렬(葉永烈)

 

1972년, 모택동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의 곁에서 돌봐주는 사람은 수간호사(護士長) 오욱군(吳旭君)을 제외하고는 바로 장옥봉이었다.

 

장옥봉은 원래 모택동 전용열차의 승무원이었다. 1968년, 24살된 그녀는 철도부에서 일하던 유애민(劉愛民)과 결혼하고, 얼마후, 딸을 낳는다.

 

홍콩 <<문회보>>의기자인 완기굉의 <<장옥봉의 모택동 곁에 있던 때를 회고함>>이라는 글에서, 장옥봉이 중남해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1970년 7월의 어느 날, 장옥봉은 북경전용열처차에서 평소처럼 열차칸을 청소하며 출발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장 및 부서기가 그의 앞으로 와서 장옥봉에게 언제 일이 끝나는지 물어보고는, 그녀에게 중남해를 한번 가보라고 통지한다. 아침 11시, 장옥봉은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중남해에 도착한다. 중앙판공청 제1부주임이자 중앙경위단단장인 장요사(張耀祠)와 수간호사 오욱군이 장옥봉을 맞이했고, 그녀에게 중남해로 와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봤다.

 

문혁이라는 미친 듯한 시기에, 일반인의 마음 속에, 모택동 주석의 곁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숭고한 영예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던 일인가? 이런 신념하에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갖추고 있지 못하던 장옥봉은 그 자리에서 승락해버린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당시 27세된 장옥봉으로서는 이 일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후 일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도.

 

이렇게 하여, 장옥봉은 모택동 전용열차의 승무원에서 중남해로 옮겨와서 모택동의 곁에서 일하게 된다. 그때, 모택동은 이미 풍택원(豊澤園)에 살고 있지 않았다. 1966년 상반기에 모택동은 거의 북경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7월 18일, 한번 풍택원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풍택원의 모든 건물을 새로 단장해서 정방의 태양을 향한 쪽으로는 주랑을 만들어놓고 2중유리를 설치한 것을 보았다. 모택동은 아주 언짢아 하였다. 왜냐하며 이렇게 고치는데 그의 동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중남해의 회인당(懷仁堂)의 동쪽방으로 옮겨서 거주했다. 1976년 당산대지진때까지 10년을 이 곳에서 살았다. 강청은 조어대(釣魚臺)에 별도로 살았다.

 

모택동의 거처를, 사람들를 '수영장(遊泳池)'이라고 통칭한다. 왜냐하면 그는 수영장의 곁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 수영장은 모택동이 <<모택동선집>>의 원고료로 만든 것이다. 수영을 좋아하던 그는 이렇게하여 중남해를 나서지 않고도 수영을 할 수 있었다. 수영장은 실내, 실외의 2개가 있다. 모택동은 실내수영장의 곁에서 거주했다. 거의 거처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실이 있고, 거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서재 겸 거실이었다. 영화, 텔레비전, 뉴스사진에 자주 나오는 것은 바로 그 거실이다.

 

장옥봉이 중남해에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택동은 병을 앓게 된다. 모택동의 생활은 그녀가 세심하게 보살폈다.

 

강청은 공공장소에서 항상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나는 모주석을 대표하여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동지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겠다. 모주석의 신체는 아주 건강하다." 실제로, 강청은 이미 중남해에 잘 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어대에 그녀의 '독립왕국'을 만들었다. 그저 '모택동부인'이라는 것이 그녀의 정치적 호신부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항상 모택동부인의 신분으로 공중에 연설을 했다. 그녀에 있어서 '모택동부인'의 신분은 중공중앙정치국위원이라는 직위보다 훨씬 중요했다.

 

사실, 강청은 당시 모택동을 언제나 만나볼 수도 없었다. 모택동은 그의 동의가 없으면, 강청을 중남해 수영장곁에 있는 그의 거처로 들이지 말라고 분부했다.

 

당시 모택동의 경위전사였던 진강장(陳江長)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강청이 주석을 뵈려면 반드시 비준을 거쳐야 했다.

 

한번은, 강청이 여러번 전화를 해서 주석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주석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나(진강장)는수영장 남대의 검사소와 북대문의 초병들에게 알렸다. 명령을 듣기 전에는 절대 대문을 열지 말도록.

 

그러나, 이번에 강청은 그냥 뚫고 들어왔다. 분위기가 아주 긴장되었다. 초병들은 작은 문밖으로 그녀가 걸어오는 것을 보자, 얼굴이 굳어졌다. 강청은 초병에게 말했다: "통지할 것없다. 나는 주석의 거처로 가지 않는다. 나는 안에 들어가서 화장실을 가겠다."

 

당시 젊은 초병은 그녀를 손으로 막기가 거북했다. 그녀는 실외수영장을 한바퀴 둘러본 후, 실내수영장의 북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실내의 화장실을 사용하겠다고 우겼다.

 

당시 나(진강장)와 판공실 부주임 장요사가 있었는데, 강청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폭풍우가 밀려올 것을 예감했다. 과연 그녀는 장요사를 보자마자 욕을 퍼부었다: "너, 이 멍청한 놈, 나를 무시하다니.", "초병이 왜 나를 못들어오게 하느냐?" 그녀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바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는 저지하기가 거북했다. 눈을 버젓이 뜨고 그녀가 남쪽의 작은 문으로 주석의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아주 긴장했다. 주석이 그의 비준없이는 강청을 들여보내지 말라고 분부하였었기 때문이다.

 

주석은 화를 냈고, 왕동흥 주임이 불려들어갔다. "왜 강청을 막지 않느냐. 그녀는 다른 사람과 같이, 내 허가없이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왕주임은 바로 장요사, 나 그리고 또 다른 동지를 불러서, 같이 연구했다. 그리고 방안을 마련했다: 여하한 사람도 주석의 동의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 강청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당시 반성했다: 초병과 당직자에게 죽어도 지켜야하는 명령으로 내리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강청이 빈틈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어쨌든 강청은 주석의 부인이므로, 감히 막지를 못했다. 그러다보니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 임무를 확실히 집행하고 책임감을 강화하겠으며, 주석의 절대안전을 보증하겠다.

 

강청은 장옥봉이 모택동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장옥봉은 강청이 그녀에게 어떻게 대해주었는지를 이렇게 회고한다:

 

모택동이 병을 앓는 동안, 간호업무는 왕동흥, 장요사 동지가 지휘하였으며, 동시에 주은래총리도 도와주었다. 의무간호인원의 세심한 치료와 모주석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그의 병은 나날이 좋아졌다.

 

처음에, 강청은 많은 당시의 지도자간부들과 마찬가지로, 주석의 병세를 몰랐다. 나중에 그녀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주석의 체질은 좋다.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병이 든단 말인가. 너희가 상황을 허위보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모주석의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중앙판공청, 경위국의 지도자동지들을 "반혁명" "특무집단"이라고 욕했다.

 

이치대로라면, 강청은 모주석부인이고, 당시 정치국위원이므로, 모주석의 건강에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이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격려하거나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사지로 몰아넣을 죄명을 갖다 부쳤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그 당시 강청의 이 말은 정말 듣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긴장하게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였다. 나중에, 중앙판공청의 한 책임자는 이 일을 모주석에게 보고한다.

 

하루는, 주은래총리가 강청을 데리고 건강에서 회복된지 얼마되지 않은 모주석을 찾았다. 함께 간 사람은 왕동흥 동지이다.

 

모주석은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잘 알았다. 그는 총리, 왕동흥을 앞에 두고 강청에게 말했다: "네가 이들(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반혁명, 특무집단이라고 했다면서. 너는 이 집단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아느냐. 그건 바로 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모주석의 이 말을 우리들 무명지배를 보호했을 뿐아니라, 총리인 주은래 동지의 짐도 벗겨주었다.

 

강청은 주석의 비판을 받은 후, 마음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풀 길이 없었다. 그는 문을 나서자 마자 나를 향해서 화를 냈다: "너는 의료도 모르고, 간호사도 아닌데, 걸음걸이도 소리나게 걸어서 나한테까지 바람이 느껴진다."

 

나는 급히 말했다: "여기에 주석이 규칙을 만들었는데, 길을 걸을 때는 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가 누가 오는지 알 수 있고, 놀라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강청은 총리, 왕동흥, 그리고 대여섯명의 직원들 앞에서 나에게 큰 소리로 질책했다: "교활하게 말을 잘한다"

 

주은래 총리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나에게 걸어와서 말했다: "잘못했다고 해라" 아마도, 나는 당시에 보통의 직원이어서, 겁도없이 윗사람의 말에 말대답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했다. 나의 머리는 당시 그렇게 간단하고 진솔하고, 이해관계를 잘 몰랐다.

 

나중에 모택동 쇼크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강청에게 알리지 않았다. 모택동이 깨어난 후, 장옥봉은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주은래총리, 왕동흥을 주석의 앞으로 불렀다. 주석은 말했다: "너희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을 쇼파에 앉으라고 했다. 그들은 주석에게 물었다: "지금 일어난 일을 강청에게 얘기할까요?"

 

주석은 사람들을 보고, 총리를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녀에게 얘기할 필요없다. 얘기하면 골치만 더 아프게 된다" 강청은 모주석의 마음 속에서 그저 이런 정도의 이미지였다. 이것은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사람의 가정이라면 이런 상황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옥봉의 회고는 생동감있게 당시 모택동과 강청 사이의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설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