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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종합)

중국역사상 10군데 낚시터(釣魚臺)

by 중은우시 2006. 11. 29.

 

첫째, 강태공조어처(姜太公釣魚處)

 

장소: 하북성 남피현 성서쪽 5킬로미터지점

        혹은 섬서성 보계현 번계하변 벌어보 남쪽

 

내력: 상(商)나라 말년 주왕(紂王)이 황음무도하여, 호화로운 녹대(鹿臺)를 건축하고자 하였다. 공사가 방대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하대부였던 강태공 여상(呂尙)은 직언하여 그만두도록 말했다가 주왕의 분노를 샀다. 그래서 명을 내려 강태공을 체포하라고 하자, 강태공은 도망쳐서 이 곳에 은거하였다. 여기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갈대가 촘촘히 들어서 있으며, 새들이 살고 있는 것이었다. 강태공은 이 곳에서 낚시를 하며 세월을 보냈다. 나중에 주문왕(周文王)이 불러서 나가서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제후(齊侯)에 봉해졌다. 백거이의 시중에 <<위상우조>>가 있는데, "조인불조어, 칠십득문왕(釣人不釣魚, 七十得文王, 사람을 낚고 물고기를 낚지 않네/ 나이 70에 문왕을 얻었다네)"이라고 읊은 바 있다.

 

둘째, 장자조어대(莊子釣魚臺)

 

장소: 산동성 견성현 임복향 장자묘 북쪽 500미터지점

 

내력: 전국시대에 도교의 창시자인 장주(莊周, 장자)는 일찌기 이 곳에서 낚시를 한 바 있다. 그래서 장자조어대라고 불렀다. 후세에 이곳에 묘를 지어 장자를 제사지냈으니, 동네이름도 장자묘촌이라고 불렀다. 당현종 천보원년(742년)에 장자를 남화진인으로 봉하여, 장자묘는 남화관(南華觀)으로 불리웠고, <<장자>>는 <<남화진경>>으로 불리웠다. 황하의 둑이 무너지면서 조어대는 물에 잠겼다. 청나라 말기에 약간의 고지대가 있기는 하였으나 나중에 흙이 쌓여 평지가 되었고, 흔적만 남았다.

 

1985년이래로 견성현정부, 임복향정부와 하택시 백호향정부는 장자조어대를 개축하기로 하고, 남화관을 새로 지었다. 면적이 20여무에 달한다.

 

셋째, 한신수조처(韓信垂釣處)

 

위치: 강소성 회음현 성서쪽

 

내력: 서한의 개국공신 회음후 한신이 낚시하던 곳

 

넷째, 조룡대(釣龍臺)

 

위치 : 복건성 민후현 남쪽 4.5킼로미터지점

 

내력: 동월왕(東越王) 여선(余善)이 백룡(白龍)을 낚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 여선조룡대, 월왕대등으로 불린다.

 

다섯째, 엄자릉수조처(嚴子陵垂釣處)

 

위치: 절강성 동로현 부춘산

 

내력: 동한의 엄자릉이 낚시하던 곳. 조어대는 동, 서 두 곳이 있다. 그중 동대는 엄자릉이 낚시하던 곳이며, 서대는 남송때 사고가 문천상이 몽고군에 패배한 후 제문을 지어 곡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여섯째, 조대이류(釣臺移柳)

 

위치: 호북성 무창 서북쪽 강가

 

내력: 손권이 술을 마시면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낚시하던 곳이다. 역사상 조대이류라고 칭한다. 진나라때의 도간이 병사를 보내 왕천을 핍박할 때, 이 곳에서 병사를 훈련시킨 바 있다.

 

일곱째, 남조양소명태자조대(南朝梁昭明太子釣臺)

 

위치: 안휘성 귀지현 서북쪽의 옥경담

 

내력: 남조의 양나라 소명태자가 낚시하던 곳이다. 주변 즉, 귀지현 성남쪽 약 10킬로미터 지점에는 태백조어대(太白釣魚臺)가 있는데, 이 곳은 당나라 천보13년(754년)에 이태백이 와서 머물면서 낚시하던 곳이다.

 

여덟째, 양인임방조어대(梁人任訪釣魚臺)

 

위치: 강소성 의흥현

 

내력: 양나라때 사람 임방이 낚시하던 곳이다.

 

아홉째, 당대고사 장지화수조처(唐代高士張志和垂釣處)

 

위치: 호북성 대야현 동도사복

 

내력: 당나라때의 시인 장지화가 낚시하던 곳이다. 장지화는 스스로 "연파조도(烟波釣徒)"라고 칭했다.

 

열째, 북경조어대(北京釣魚臺)

 

위치: 북경시 부성문외 삼리하, 현재 국빈관

 

내력: 북경조어대는 금나라의 장종(章宗) 완안경(完顔璟)이 낚시하던 곳이며 예로부터 망해루(望海樓)라고 불리웠다. 금나라때의 문인 왕욱이 이 곳에 은거하여 낚시를 하기도 했다. 청나라때 건륭28년(1763년)에 건륭제는 이 곳을 유람한 후 친히 "조어대(釣魚臺)"라는 세 글자를 써주었다. 지금은 중국의 국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