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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19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은 일종의 오해이다. 글: 황작비비(黃雀飛飛) 송태조의 "배주석병권"의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조광윤이 천하를 얻은 이후, 공신들이 그가 했던 바를 배워서 모반작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하여, 술을 마실 때 무장들을 권하여 병권을 포기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강산을 .. 2013. 11. 10.
여단(呂端): 모택동이 제갈량과 나란히 언급한 송나라 재상 글: 안건회(晏建懷) 여단은 진사출신(進士出身, 즉, 과거급제자)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송태종, 송진종 시기의 재상이 되었다. 송나라는 문인의 천하이다. "만반개하품(萬般皆下品), 유유독서고(唯有讀書高)"의 시대에 '자격증'도 없는 늙은이가 관직에 온건하게 앉아있는 것만도 쉬운 일.. 2013. 11. 9.
조광윤: 전설상의 미복사방(微服私訪) 글: 허석림(許石林) 송나라의 재상 조보는 사는 것이 아주 곤혹스러웠다. 다른 관리들은 퇴조한 후, 편안한 사복으로 갈아입고, 혹은 연회를 베풀거나, 혹은 금을 연주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가족들과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그럴 수 없을 뿐아니라 만.. 2013. 4. 28.
송태조는 왜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황위를 넘겼는가 글: 역사상나사사(歷史上那些事) 태평흥국4년(979년)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趙光義)는 북한(北漢)을 평정한 후 친히 군대를 이끌고 요(遼)나라를 정벌하러 가지만 불행히도 대패하고 만다. 그래서 조정으로 돌아온 후 북한을 평정한 공신들은 모두 작위나 상을 받지 못한다. 송태조(宋太祖.. 2012. 8. 15.
송나라때는 황제의 권한을 어떻게 제약했는가? 글: 오구(吳鉤) 선진(先秦, 진나라이전)의 유가들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에 반대했다. 공자는 "올바른 도(道)로 군주를 모신다. 그럴 수 없으면 그만두고 물러난다(以道事君, 不可則止)"라고 말했고, 맹자는 "군주에게 큰 잘못이 있으면 간해야 하고, 반복해서 간해도 듣지 않으면 .. 2012. 4. 4.
송태조 조광윤은 급사한 것이 아니다. 글: 유병광(劉秉光)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죽음은 사학계를 괴롭혀온 천년의 미스테리이다. 역대이래로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설이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의 죽음을 후궁의 스캔들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보통사람들은 조광윤이 비명에 죽었다고 알고 있다. 즉, 하.. 2012. 1. 7.
황포가신(黃袍加身): 조광윤은 훌륭한 연기자이다 글: 왕위(王偉) “황포가신”이라는 고사성어는 북송의 개국황제 조광윤(趙匡胤)에게서 유래되었다. 내용인 즉슨 이렇다: 조광윤의 부하가 그에게 황제에 오르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조광윤은 황제가 되고싶어하지 않았다. 부하는 황제가 입는 황색의 곤룡포를 강제로 그에게 입혔따. 조광윤은 어.. 2011. 4. 2.
천고기원(千古奇寃) : 조광윤의 진교병변에서의 역할 글: 고천유운(高天流雲) 송나라역사에 관한 자료를 뒤적거리다보면, 북송(北宋)의 개국에 관한 장면에 예외없이 이런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후주(後周)의 공제(恭帝) 시종훈(柴宗訓) 현득7년(960년) 원단에 거란이 침범했다.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금군통수, 전전도점검인 조광윤이 병력을 이끌.. 2007. 12. 20.
조보(趙普) : 송태조 조광윤의 군사 조보(922-992) 자는 칙평(則平), 조적은 유주 계현, 나중에 부친을 따라 낙양으로 옮김. 조보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말은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 절반의 논어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다)"이다. 그는 말년에 논어 이십권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여 생긴 말이다. 어릴 때부터 관.. 2006.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