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조광윤이 무장들에게 부패허가증을 준 것이다.

by 중은우시 2014. 5. 29.

글: 정수위(丁守衛)

 

언뜻 보면, 조광윤의 "배주석병권"은 아주 시원스럽고, 가벼우며, 사람들에게 "담소간(談笑間), 장로회비연멸(檣櫓滅飛煙灰)"한 것같은 느낌이고, 전혀 심을 들이지 않았으며, 수단이 뛰어난 조광윤은 원래 아주 골치아픈 이 일을 쉽게 처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조광윤은 이에 대하여 엄청난 댓가를 치렀다.

 

국가 혹은 민족이익의 각도에서 보자면, 조광윤은 '똑똑한 짓을 하다가 오히려 거기에 당한' 꼴이 되었다. '배주석병권'은 완전히 그의 정치적 실패작이다. 그리고 그가 일생동안 저지를 가장 큰 정치적 과오이다.

 

여기에서 '배주석병권'이 전쟁에 능한 무장의 수중에서 군권을 빼앗고, 그들을 주변으로 밀어냈다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 이것은 대송제국에 있어서 스스로 자신의 팔을 자른 꼴이다. 스스로 병신이 된 셈이고, 스스로 고치를 지어서 안에 들어간 셈이다. 송나라가 나중에 외족의 침입과 유린을 당한 것은 완전히 이것과 관련이 있다. 단순히 '배주석병권'이 열어제친 기풍을 보더라도, 그 결과는 정말 심각하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배주석병권'은 기실 송태조 조광윤과 전체 무장집단간의 정치적 타협이다. 타협이라면 타협의 쌍방중 어느 일방이 아무런 손실없이 이익을 보거나, 댓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다. 확실히 이번 정치적 타협에서 무장집단이 내놓은 댓가는 이때부터 '병권'을 수중에서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 이 '병권'은 당연히 그냥 내놓은 것이 아니다. 바꿔가진 것은 바로 황제 조광윤의 사치와 향락에 대한 구두약속과 하사였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배주석병권'때, 조광윤은 무장들에게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인생은 쓰고 짧다. 백말이 지나가는 것같다. 여러분들은 금은보화를 많이 모으고, 좋은 땅과 큰 집을 가지고, 말년을 춤추고 노래하는 여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면 군신간에 서로 의심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양전(兩全)의 방법이다." 이 말의 뜻은 더 이상 명확할 수 없다. 여러 장군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병권을 손에서 내주면, 더 이상 나 조광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다 해주겠다. 뭐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이것을 보면 조광윤이 '석병권'을 할 때, 아주 통크게 놀았던 것같다. 당연히 국가의 것, 국민의 것을 가지고서. <송사.석수신전>에 기록된 오리지날대로라면 "상뢰심후(賞賚甚厚)"했다. 무장들에게 아주 두터운 혜택을 내린 것이다.

 

현상을 뚫고 본질을 보면, 소위 '배주석병권'은 솔직히 말해서 송태조 조광윤이 '부패와 병권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배주석병권'은 조광윤이 전체 무장집단에게 한 장의 '부패허가증'을 발급해준 셈이다. 황제가 친히 발급한 이 '부패허가증'이 있으므로, 그 이후 무장들은 '기세등등하고 당당하게' 부패를 한다. 사료기록에 따르면, 태조의 무장들은 거의 하나같이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밝히는 무리였다.

 

여기에서 송태조시기의 일부 저명한 무장들의 부정부패상황을 열거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사서에서 석수신(石守愼)에 대하여는 "누임절진(累任節鎭), 전무취렴(專務聚斂), 적재거만(積財巨萬)"했다고 하고, 왕전빈(王全斌)은 "파촉일(破蜀日), 탈민가자녀옥백(奪民家子女玉帛)"했다고 적었다. 그는 병사들이 촉중을 대거 약탈하도록 놔두었다; 왕인섬(王仁贍)에 대하여는 촉을 무너뜨리는 날, "납이정규기녀(納李廷珪妓女), 개풍덕고취금보(開豊德庫取金寶)"했다고 한다. 초소보(楚昭輔)는 "아주 인색하여, 전후로 하사받은 것이 만을 헤아렸는데, 모조리 쌓아두었다. 그는 일찌기 손님들과 친구들을 데려가서 보관한 물건을 보여주면서, '나는 공로가 없는데 이렇게 많은 것을 받았다. 나는 국가를 위하여 이것을 지키는 것뿐이다. 나중에 황상에게 바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은퇴하고나서 이것을 모조리 시장에 팔아서 집과 전답을 샀다.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멸시했다." 최언진(崔彦進)은 "자주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재물을 긁어모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좋은 정사를 펼친 것은 없다." 조한(曹翰)은 "탐모화뢰(貪冒貨賂)"했다. 장탁(張鐸)은 "주관세시마(州官歲時馬), 장탁후증기직이사취지(張鐸厚增其直而私取之), 누지십육만관(累至十六萬貫), 급천차공탕전만여민(及擅借公帑錢萬餘緡), 침용관곡육천사백병(侵用官曲六千四百餠)" 전경함은 "성격이 비루하고 인색하여 긁어모으는데 힘썼다. 매번 사신이 명을 받아오면, 오로지 고기 1그릇만을 내서 손님과 주인이 같이 먹었다." 왕휘는 "성격이 역시 인색하고, 재산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처자식은 밥을 많이 주지도 않았고, 부곡에서 가렴주구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아주 고통스러워했다..." 

 

반드시 지적할 점은, 태조시기 일부 무장들의 마음 속에는 최소한 처음에는 그다지 부정부패하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청렴하게 하면 조광윤으로부터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고의로 스스로를 천박하게 보이게 하였고, 스스로 타락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예를 들어,석수신은 원래 어진 장수였다. 전투에서는 용맹하지만, 항상 의리를 중시하고 이익을 경시했다. 그러나, '배주석병권'사건이 일어난 후, 그는 돌연 깨닫는다. 이때부터 그는 성색견마를 추구하고, 미친듯이 재물을 긁어모은다. 그의 이런 '태도'에 대하여 <송사>에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기비역인이자회자야(豈非亦因以自晦者邪)". 그 말은 아주 정곡을 찌른다. 원래 그도 진나라때의 대장군 왕전이 출정하여 초나라를 멸망시키러 가기 전에 진시황의 우려를 없애기 위하여 고의로 '스스로를 더럽힌'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또 다른 무장 왕전빈은 사서에 그가 이전에 아주 태도가 좋았다고 되어 있다. 사람됨이 원래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선비를 중시하며, 명성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후덕하고 관용적이어서 군대에서 잘 기용했다" 그러나, 배주석병권이후에는 사람이 완전히 바뀐 것같았다. 촉을 함락시킬 때, 스스로 앞장서서 부하들이 대거 촉중을 약탈하게 놔둔다. "헌장(憲章)을 짓밟고, 항복한 병사를 죽이며, 공금을 마음대로 꺼내쓰고, 부녀를 빼앗았으며, 널리 재물을 긁어모았다. 만민의 원성을 샀으며, 여러 도적들마저도 그를 꺼려할 정도였다."

 

확실히 왕전빈의 이런 이상한 거동은 스스로를 더럽혀서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로 촉을 무너뜨린 공로는 너무나 컸다. 자신의 명망이 순식간에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지경에 이르니, 태조 조광윤은 더 이상 상을 줄래야 줄 것이 없었다. 만일 스스로를 더럽히는 조치를 빨리 취하지 않는다면 공고진주(功高震主)하게 되어 스스로 좋은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 무장은 비록 군인출신이고, 성격은 거칠지만, 정치적으로 예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머리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처음에는 태조의 회유와 협박때문에 많은 무장들이 어쩔 수 없이 그러했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이 어느 정도 쇼를 하는 측면이 있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인간성에 보편적으로 잠재하는 욕망향락등 열악한 근성이 나타나게 되어 습관화되어 버린다. 부정부패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있으므로, 무장들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조광윤은 최대한 '눈을 감고' 모르는 척했다.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면 말하지 않았고, 관여하지 않을 수 있는 한 관여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무장들이 너무 지나친 경우도 있었다. 반드시 처리해야할 때면 최대한 봐주면서 조치를 했다.

 

이런 사례가 그것을 방증한다. 왕계훈이라는 무장이 있었는데, 창덕군절도사 왕요의 아들이고, 왕황후의 남동생이다. <송사.왕계훈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이 황제의 외숙은 성격이 포악했고,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탐했다. '노비의 살을 하나하나 도려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하는 식인마왕이다. 하루는 왕계훈의 집에서 담장이 큰 비에 무너진다. 많은 노비들이 도망쳐서 송태조에게 달려가 고발한다. 왕계훈의 깜짝 놀랄 죄행이 모조리 드러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송태조는 '놀란' 나머지 왕계훈에 대하여 아주 심하게 판결한다: "관작을 박탈하고, 사저를 몰수하며, 갑사로 하여금 그를 지키게 하며, 등주로 유배보낸다." 그러나 최종처리는 소리만 요란했지 별 것이 없었다. 한편으로, 자신의 외숙인 왕계훈이 유배지로 출발하기 전에, 다른 한편으로 그에게 조광윤은 우감문솔부 부솔로 관직을 내린다. 이렇게 총애를 믿고 겁없이 날뛰다가 개보3년, 왕계훈은 서경 낙양의 행정장관에 임명된다. 부임한 후, 더욱 심하게 자신의 잔혹한 본성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사람을 먹는다: '억지로 백성의 자녀를 자신이 부렸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서 먹었다. 그리고 뼈를 관에 담아서 야외에 버렸다." 인신매매범과 관을 파는 상인이 밤낮으로 왕계훈의 집을 드나들어, 문전성시를 이룬다. 지난번에 조광윤에게 고발했던 교훈이 있어서, 낙양의 백성은 더 이상 황제에게 고발하는데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저 운명에 맡기는 법을 배우고, 그가 하는대로 당했다.

 

통계에 따르면, 송태종이 재위할 때 왕계훈을 처형할 때까지, 개보6년에서 태평흥국2년까지의 짧은 5년동안 왕계훈이 친히 죽여서 먹은 노비가 1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십악불사의 식인마왕을 만일 조광윤이 특별히 보호해주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소요자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관남을 지키는 대장 이한초(李漢楚)는 부녀자를 강제로 첩으로 삼고, 백성들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는 일이 있었다. 송태조는 교묘한 말로 변명해주며 이 무장을 극력 비호한다. 피해자 가족이 경성에 와서 고발하자, 송태조는 그를 불러서 묻는다: "너의 딸은 어떤 사람에게 시집갔는가?" 고발자가 대답한다: "농사꾼에게 시집갔습니다." 다시 묻는다: "이한초가 관남으로 오기 전에 거란은 너희를 어떻게 대했는가?" 대답하기를, "포악하여 힘들게 살았습니다." 다시 묻는다. "지금도 그러한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송태조는 그 농민에게 말한다: "이한초는 짐이 아끼는 신하이다. 너의 딸을 첩으로 삼은 것은 농민의 부인으로 있는 것만 못하단 말인가? 만일 이한초가 관남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너의 집안은 재물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고발자를 한바탕 훈계한 후,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짐이 아끼는 신하'인 이한초는 부녀자를 강제로 첩으로 삼고 백성들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았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지나간다. 그저 그를 불러서 이후 주의하라고 할 뿐이다. 마지막에는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상을 내렸다. 이한초에게 3000민의 백금을 내린 것이다.

 

'배주석병권'이라는 역사상 유명한 정치적 타협과 정치적 거래에서, 조광윤의 태도는 아주 시원스럽고 인자했다. 석수신등 무장을 다독거리기 위하여 그는 그들에게 대량의 재물을 내렸을 뿐아니라, 혼인을 통하여 서로간에 간격이 없다는 것을 보인다. 그렇게 하여 일부 무장들과 정략결혼을 시킨다. '배주석병권'후 금방 송태조는 자신의 청상과부가 된 여동생 연국장공주를 고회덕에게 시집보낸다. 딸 연경공주, 소경공주는 각각 석수신의 아들과 왕심기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확실히 이런 결혼은 정치적 색채가 농후하다. 병권을 잃은 무장들을 회유, 안위 및 보상하려는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조광윤의 이런 소은소혜(小恩小惠)의 잔머리를 굴린 방법이 정말 효과적일 줄은. 조광윤이 취한 '부패와 병권을 맞교환하는' 정책 혹은 책략은 입국초기에 연이어 발생한 후주의 구신 이균, 이중신이 일으킨 정변을 제외하고, 그후 대송제국의 내부에서 300여년간 다시는 '황포가신'에 유사한 정치적 사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왕왕 일리(一利)가 있으면 일폐(一弊)가 있다. '부패와 병권을 맞교환'한 조치는 대송제국에 있어서 스스로 자신의 장성을 무너뜨린 꼴이 되고 만성자살을 하는 꼴이 된다. 자세히 그 공과를 계산해보면 발견할 수 있다. 그 댓가는 실로 너무나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