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여단(呂端): 모택동이 제갈량과 나란히 언급한 송나라 재상

중은우시 2013. 11. 9. 23:29

글: 안건회(晏建懷) 

 

여단은 진사출신(進士出身, 즉, 과거급제자)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송태종, 송진종 시기의 재상이 되었다. 송나라는 문인의 천하이다. "만반개하품(萬般皆下品), 유유독서고(唯有讀書高)"의 시대에 '자격증'도 없는 늙은이가 관직에 온건하게 앉아있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닌데, 계속 승진하여 재상이 되고, 장원, 진사출신의 문인사대부를 거느린다는 것은 정말로 지난한 일이다. 통계에 따르면, 북송의 168년간 모두 71명의 재상이 임명되었는데, 그중 진사출신이 64명이고, 비진사출신은 겨우 7명이다. 여단은 비진사출신으로 두 황제의 재상을 역임했는데, 그에게는 어떤 남다른 점이 있었을까?

 

1. 족지다모(足智多謀), 온타근신(穩妥謹愼)

 

송태조 조광윤에게는 5명의 형제가 있었다. 두 명은 요절하고, 남은 것은 조광의(趙光義)와 조정미(趙廷美)의 두 동생이다. 송태조가 죽은 후, 송태종이 황위에 오른다. 조정미는 이 황형과의 관계가 돌연 미묘해진다. 한편으로, 황태후가 임종전에 확정한 "금궤지맹"에 따르면 조정미가 다음번 후계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정명한 황형은 동생인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했고, 동생에게는 시기심을 품었다. 이런 내심의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책이나 죽어라 읽은 사대부들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여단은 분명히 알아차렸다.

 

태평흥국4년(979년), 송태종이 태원(太原)으로 친정(親征)을 간다. 북한(北漢)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조정미를 경성에 남겨서 업무를 주재하게 하려 했는데, 조정미는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바깥으로 나가는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후원기화(後院起火, 뒷마당에 불이 나는 것), 화기소장(禍起蕭墻)하는 것이다. 황제가 정말로 그를 경성에 남겨두고 싶어했을까? 그저 시험해보려는 것일 뿐이었다. 당시 조정미는 제왕(齊王)으로 개봉부윤(開封府尹)을 맡고 있었다. 여단은 그의 수하에 있던 판관(判官)이었다. 그래서 여단은 급히 제왕 조정미에게 그가 경성에 남아서 유수(留守)하는 것을사양하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따라가겠다고 말하라고 건한다. 조정미는 그의 말대로 출정을 청한다. 송태조는 과연 동의했고 아주 기뻐한다. 여단의 건의는 송태조의 바램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왕 조정미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참모가 일을 잘하니 모두가 기뻐하게 되었다.

 

그후 한동안 여단은 태상승(太常丞), 사부원외랑(祠部員外郞),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겸 어사지잡사(御史知雜事)를 맡는다. 단공원년(988년), 송태종은 여단에게 중요한 업무를 맡긴다.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대국의 사절로서 여단은 겸화우호(謙和友好)하며 불비불항(不卑不亢)해야 했다. 대담하게 교섭하면서도 아주 조심스러워야 했다. 고려왕으로부터의 정상적인 예절을 웃도는 선물은 모두 거절한다. 여단의 이번 사신행은 임무를 완벽하게 완성하고, 대국의 사신이미지를 유지했다. 나중의 사신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송신종 원풍연간에 전협(錢勰)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데, 시종 여단의 선례에 맞추어 집행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여단일행이 바닷길을 거쳐 귀국하는 길이 날씨가 급변하여 해상에서 거대한 파도를 만났고, 바람이 미친듯이 불었으며, 심지어 돛까지도 부러졌다.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보스인 여단만은 얼굴색이 바뀌지 않고 편안하게 배에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다. 평상시에 집의 서재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침착하고 안정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여단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자, 송태종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여단이 귀국한 후, 송태종은 그자리에서 그에게 호부랑중, 판태상시겸예원의 직위를 내리고, 얼마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중용한다.

 

2. 지자일실(智者一失), 인고폄관(因故貶官)

 

송태종은 아들이 9명이 있었다. 장남은 조원좌(趙元佐)이고, 차남은 조원희(趙元僖)이다. 삼남이 바로 나중의 송진종 조항(趙恒)이다. 송태종은 처음에 조원좌를 태자에 앉힌다. 부친과 숙부 조정미의 권력투쟁때 숙부를 편드는 말을 했다가, 숙부 조정미가 부릉(涪陵)으로 귀양간 후, 다시 그를 변명하는 말을 하다가, 부친으로부터 욕을 먹는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혼이 난 것에 우려하고 두려워하다가 병이 되어 어느 날 미쳐버린다. 태자의 지위는 다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차남인 허왕(許王) 조원희가 배양대상이 된다. 송태종은 그에게 개봉부윤을 맡겨 그를 단련시키고자 한다. 송왕조 미래의 군주를 잘 배양하기 위하여, 그리고 조원좌의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하여, 송태종은 믿을만하고 온건한 사람을 골라서 보좌시킨다. 그는 여단을 선택한다. 여단이 우간의대부겸 개봉부판관이 된다. 이렇게 하여 여단은 허왕 조원희의 막료가 된다.

 

그러나, 조원희도 운명이 좋지 않았다. 순화3년(992년), 조원희는 돌연 괴이한 병에 걸린다. 짧은 기간내에 돌연 병이 발작하여 죽고 만다. 송태종은 비통해 한다. 나중에, 누군가 조원희의 급사를 그의 애첩 장씨가 방자한 것에 있다고 얘기한다. 분노한 나머지 송태종은 특별조사팀을 구성하여, 태자의 죽음에 대하여 관련자들을 문책한다. 장씨는 사형에 처해지고, 좌우의 관리들은 장형을 받는다. 여단도 막료였다. 송태종이 아꼈기 때문에 중한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직위를 강등되어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된다. 다음 해, 조정은 새로 고과원(考課院, 관청이름, 지방관리의 승진강등을 책임짐)을 두고 간부를 다시 배치하는데, 송태종은 일부 관리들과 얘기를 나눈다. 일부 지방에 막 부임할 관리들은 조건이 열악하다는 것을 이유로 눈물을 흘리며 원망한다. 여단이 대답할 차례가 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이전에 진왕(조원좌)를 보좌했는데 부내의 관리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여 상주로 좌천되었습니다. 황상께서 그래도 버리지 않고 발탁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허왕이 급병으로 죽어 실로 신의 죄를 피하기 어려운데도, 폐하께서는 또 처벌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신이 경성에 머무르며 일하게 해주었습니다. 신에게 있어서 실로 죄는 큰데 행운이 따랐던 것입니다. 이제 신은 그저 구석진 지방의 부직(副職)만 맡으면 만죽하겠습니다." 송태종은 그러나 친절하게 말한다: "짐은 너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즉시 여단을 원직에 복직시킨다. 그리고 곧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를 맡긴다. 1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 부재상)로 발탁한다. 이제 조정의 핵심의사결정권층에 들어간 것이다. 이를 보면, 송태종은 조원희의 일로 여단을 책망하지 않았고, 일찌감치 그를 조정의 고굉대신으로 배양할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대사불호도(大事不糊塗)

 

어느 정도의 단련과 시험을 거쳐, 송태종은 마침내 재상의 중임을 여단에게 맡긴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자, 누군가 여단은 희노애락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여단은 사람됨이 멍청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송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여단은 작은 일에는 멍청하지만 큰 일에는 멍청하지 않다." 지도원년(995년), 송태종은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고 여단을 재상에 앉힌다.

 

여단에 대하여, 송태종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았다. 불구소절(不拘小節, 자잘한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대지약우(大智若愚, 큰 지헤를 가진 자는 멍청해 보인다)하다는 것이다. 그는 권한을 맡길 수 있고, 일을 맡길 수 있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능력있는 신하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여단은 권력을 중시한 적이 없고, 자리에 연연한 적이 없다. 그가 부재상이 된 후, 그보다 스물이상이 어린 구준(寇準)이 부재상에 임명되었다. 여단은 경력을 따지지 않고 함께 국가대사를 처리했다. 여단이 재상에 오르고, 구준은 여전히 참지정사였다. 그는 다시 송태종에게 요청해서, 부재상 구준이 그와 함께 돌아가며 관인을 맡아 함께 국가대사를 처리하게 해달라고 한다. 송태종은 여단의 이 건의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큰 일은 여단이 먼저 결정한 후에 다시 보고하라고 하여, 여단의 최고권력을 명확히 한다. 여단은 그러나 항상 겸양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여단은 수십년간 재직하면서,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집안에 재산을 쌓아놓지 않았다. 자조 가난하고 병들고 늙고 약한 자들을 도와준다. 그가 사망한 후, 3명의 아들은 결혼식을 할 돈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집을 담보로 맡기고, 혼사를 끝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인품, 관품의 어떤 면이든 여단은 그 시대에 보기 드문 모범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름도 없은 하급관리에서 한걸음 한걸음 발탁되어 우간의대부, 추밀직학사, 참지정사까지 될 수 있었던 근본원인이다. 전재상 조보(趙普)가 말한 것처럼: 내가 여공(여단)이 일을 아뢰는 것을 보니, 칭찬을 받아도 기뻐하지 않고, 좌절당해도 겁내지 않았으며 그리고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정말 재상의 그릇이다." 조보는 개국원로이고, 양조재상이다. 일리만기(日理萬機)하며 수많은 사람을 보았다. 그조차도 여단은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한 것이다. 이를 보면 여단이 조정내에서 어떤 이미지와 영향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4. 황위승계를 안정적으로 마무리짓다

 

여단이 재상을 맡은 후 역시 중망에 위배되지 않게 일처리가 온건하고 타당했으며 협조가 잘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중요한때 가장 합리적인 건의를 하여 위기를 막아냈다는 점이다.

 

서하(西夏)는 원래 송나라의 번국이었다. 나중에 이계천(李繼遷)이 서하왕이 되면서 송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뿐아니라 변방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송과 서하의 전투가 계속되게 된다. 한번은 전투중에, 전선의 장병이 이계천의 모친을 예상밖에 포로로 잡는다. 변방의 장수들은 급히 송태종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그의 모친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하여 지시를 바란다. 당시 구준이 추밀부사를 맡고, 군사일을 담당했다. 송태종은 구준과 이를 상의한다. 최종적으로 이계천의 모친을 그 자리에서 처결하여 변방을 괴롭힌 원수를 갚는 것으로 결정한다. 구준은 상의를 마치고 명령을 반포할 준비를 한다. 여단의 사무실을 지나갈 때, 여단은 구준의 행색이 황급한 것을 보고, 항상 조심스러웠던 그였으므로 전선에 분명히 무슨 큰 일이 있는가보다 생각한다. 그래서 급히 구준을 불러, 상세한 내용을 묻는다. 이계천의 모친을 참수하려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는 급히 구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잠시만 늦춰달라고 부탁하고, 그가 송태종과 얘기해본 후에 다시 논의하자고 한다. 그는 입궁하여 송태종에게 말한다. 옛날 항우가 유방의 부친을 포로로 잡았을 때, 항우가 유태공을 죽이겠다고 말했을 때, 유방은 "나에게도 한 그릇 나눠달라"고 말했다. 이것은 큰 일을 하는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는 자주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돌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물며 이계천과 같이 패역한 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늘 그의 모친을 죽이면, 내일 이계천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의 모친을 죽이는 것은 그저 상대방에 대한 원한만 가중시킬 뿐이고, 반란의 마음만 더욱 강하게 할 뿐이다. 송태종은 그의 말을 듣자, 놀라서 등에 식은 땀을 흘린다. 급히 어찌하면 좋겠는지 물어본다. 여단은 이렇게 건의한다. 이계천의 모친을 전선의 연주(延州, 지금의 섬서성 연안시)로 옮겨놓고 잘 보살피며, 이계찬에게 투항하라고 권한다. 송태종은 그제서야 깨닫고는 좋은 방안이라고 연신 칭찬한다. 그리고, 만일 여승상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 일을 망칠 뻔했다. 나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다. 나중에 이계천의 모친은 연주에서 늙어죽는다. 얼마후 이계천도 사망한다. 그의 아들은 송나라가 자신의 조모를 잘 보살펴준 것으로 인하여 송나라에 귀순한다. 이 사건의 시말과 결과는 다시 한번 여단의 심모원려와 침온근신함을 보여준다.

 

여단의 뛰어난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그가 앞장서서 처리한 개조환대(改朝換代)의 대사이다. 황제가 죽자, 조정의 국면을 변수가 생기고,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이것은 권력교체의 종합증세이고 자주 있는 일이다. 송태종이 선택한 황위계승자는 장남 조원좌가 미치고, 차남 조원희는 요절하여, 삼남 조항이 된다. 이것은 궁중투쟁에 복선을 깐 것이 된다. 송태종이 죽자마자, 조원좌는 여전히 살아 있었으므로, 조정대신은 각각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위하여 칼을 갈기 시작한다. 태감 왕계은(王繼恩)이 앞장서서, 참지정사 이창령(李昌齡), 전전도지휘사 이계훈(李繼勛), 지제고(知制誥) 호단(胡旦)등의 실력파들을 조직하여, 이미 송태종에 의하여 서인으로 강등된 조원좌를 후임황제로 모시고자 한다. 이유는 그가 송태종의 장남이므로, 그가 황제에 오르는 것이 명분에 맞는다는 것이다.

 

서로같에 부닥쳐 유혈사태가 벌어질 상황이 가까워졌다. 황후 이씨는 급히 왕계은에게 여단을 불러와서 아이디어를 듣자고 한다. 여단은 송태종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황후가 청하자, 상황에 변수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결정한다. 주변인들에게 급히 왕계은을 구금하고, 감시하도록 명한다. 동시에 급히 궁에 들어간다. 황후는 눈물을 흘리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여단에게 말한다. 지금 황제가 죽었는데, 대신들은 장남을 후임황제로 세우겠다고 하니 어떡하면 좋겠는가? 여단은 진정하고 담담하게 말한다. 당시 황제는 태자를 확정했는데, 바로 오늘을 위한 것입니다. 어찌 선제의 유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한편으로 참을 성있게 다른 대신들을 설득하고, 한편으로 태자 조항을 모셔와서 송태종의 관 앞에 세운다. 이렇게 하여 그가 후계자임을 분명히 한다.

 

조항이 등극한 후, 대전에 앉아 여러 대신을 접견할 때, 수렴(垂簾)이 쳐져 있었으므로, 여단은 환관들이 조원좌를 데려다가 조항이라고 사칭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여전히 대전아래에 서서 절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게 발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한다. 황제가 발을 걷은 후, 여단이 앞으로 나아가서 자세히 확인해보니 확실히 조항이었다. 그제서야 계단을 내려와서,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신황제에게 절을 한다. 조항은 침착하고 노련한 재상 여단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황위에 오른다. 그리하여 그는 송나라의 세번째 황제 송진종이 된다. 황위계승다투은 마침내 형제간에 칼을 겨누는 일이 없이 이렇게 끝났다. 그것은 여단의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송진종이 즉위한 후, 매번 대신들을 접견할 때마다, 여단에 대하여 공손하게 대했고,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다. 궁앞의 계단은 높았고, 여단은 몸이 뚱뚱하고 키가 커서 행동이 불편했다. 그리하여 특별히 사람을 시켜 납계(納階)를 준비시킨다. 즉 궁앞에 낮은 목제계단을 하나 놓아두게 한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우대와 보살핌이다. 여단이 계속 재상을 맡았을 뿐아니라, 관직과 작위는 계속 올라갔다. 우복야, 감수국사, 태자태보등의 직위를 계속 받는다. 여단이 은퇴한 후, 송진종은 사람을 보내어 문안을 하고 하사품을 내린다.그가 사망한 후에는 처와 아들에게 관직과 직위를 주어 선종하게 한다. 대신에 대하 최고의 예우를 해준다.

 

경험은 어떤 때는 실로 간단하다. 여단의 일생은 도광검영의 오대난국에서 시작하여, 황포가신의 개조환대도 목격했고, 송나라초기의 너죽고나살기식의 권력쟁탈전도 경험한다. 항상 기복이 따른 격류에 몸을 맡기면서, 위기도 많았고, 놀라운 일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겪으면서 여단은 담당하게 대하고 적절하게 해결했다. 그의 일생에서 정말 무슨 경험을 얻는다면, 그 정도일 뿐이다. 당연히 한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서서, 진정 영욕을 누리면서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득의하면서도 모습을 흐트리지 않으며, 위기에 처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며 어지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모주석은 시를 지어 찬탄한 것이다.

 

제갈일생유근신(諸葛一生唯謹愼)

여단대사불호도(呂端大事不糊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