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은 일종의 오해이다.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황작비비(黃雀飛飛)

 

송태조의 "배주석병권"의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조광윤이 천하를 얻은 이후, 공신들이 그가 했던 바를 배워서 모반작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하여, 술을 마실 때 무장들을 권하여 병권을 포기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강산을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배주석병권"사건은 확실히 일어났다. 그리고, 두 차례 일어난다. 다만, 만일 송태조가 이 두 변의 사건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군대로부터의 위협을 해결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송태조의 즉위초기, 국가에는 2가지 군사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금군(禁軍) 세력이다. 즉 중앙정부 직속의 주력부대이다(殿前司, 侍衛親軍司). 총병력은 20만이 좀 못된다. 다른 하나는 번진(藩鎭)세력이다. 즉 각지방에 있는 번진(절도사)이 지휘하는 군대이다. 인원수는 불확정적이다. 오대시기의 번진의 난을 거쳐, 군대에 의존하여 정권을 탈취한 조광윤은 군권을 잃었을 때의 잠재적인 위협을 잘 알았다. 건륭원년(960년) 사월과 구월, 조광윤이 등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실력파 번진 소의절도사(昭儀節度使) 이균(李筠)과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이중진(李重進)이 연이어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조광윤은 친히 정예병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십일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반란을 평정한다. 그후의 어느 날, 조광윤은 심복 조보(趙普)와 유명한 얘기를 나눈다.

 

조광윤이 묻는다: "당송이래 수십년, 제왕은 8번이나 성이 바뀌었다. 국가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것은 무슨 원인에서인가? 나는 천하의 병화를 종식시켜야 겠다. 국가를 위하여 장치구안이 계책을 마련해야 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조보가 대답한다: "폐하께서 이런 것까지 생각하시다니, 정말 천지인신(天地人神)의 복입니다. 그것은 다른 원인이 없습니다. 방진의 권력이 너무 크고, 군주가 약하고 신하가 강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현재 뿌리부터 다스리려면, 오로지 그들의 권한을 빼앗고, 돈과 양식을 통제하고, 정예병력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하는 자연히 태평해질 것입니다." 번진의 권력을 점차 박탈하고, 경제적 원천을 봉쇄하며, 정예병력을 거두어 버린다는 세 가지 방침이 송나라에서 번진문제를 해결하는 기본국책이 된다.

 

사실상, 조광윤이 즉위한 후, 즉시 무장세력을 억제하는 조치에 들어간다. 이것은 아주 복잡한 시스템적인 조치였다. 전후로 근 20여년간 진행된다. 송태종시기까지도 계속되었다. 대체로는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조치가 포함된다:

 

첫째, 이진(移鎭). 이진은 현대의 지방간인사교류 비슷하다. 번진을 옮기게 함으로써 원래의 지역에서 세력이 커지고 할거세력화 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조광윤은 금군장령의 지지를 받아 황제에 올랐다. 즉위초기 금군장령에 대하여는 관직과 작위를 올려줌으로서 그들에 의존하여 중앙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번진을 타격했다. 중앙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번진에 대하여 조광윤은 전통적인 이진조치를 취한다. 건륭원년(960년), 이균을 격파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은 이계훈, 원언, 양승신, 장영덕, 양정장등 6명의 절도사에게 이진을 명령한다. 다음 해, 다시 공훈이 탁월한 절도사 왕경, 모용연쇠, 한령곤등에게 이진을 명령한다. 동시에 모영연쇠, 한령곤의 전전사 시위친군사통수의 직무를 면직시킨다. 빈번한 이진을 통하여, 번진은 장기간 근거지를 경영하기 어렵게 되고, 병력을 이끌고 한 지역을 차지할 자본을 잃게 된다.

 

둘째, 문신대진(文臣代鎭). 문신으로 무장을 바꾼다. 주군(州郡)의 권한을 회수한다. 건륭원년 육월 이균을 평정한 후, 조정은 문신 귀거윤(晷居潤)을 권지진주(지금의 하북 정정, 원래 이균의 관할구역에 속함)로 파견한다. 주부문관으로 번진무관(절도사)의 권한을 대체하는 선례를 연다. 그후, 절도사가 물러나거나, 사망, 이주. 요령(遙領, 직위는 받지만 부임하지 않는 것)하게 되는 경우에는 모두 문신이 맡았고, 더 이상 절도사를 임명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비교적 큰 주부중진에는 황제의 심복이 파견되어 부임한다. 건륭4년(963년) 형남, 호남을 평정한 후, 호부시랑 여여경을 권지담주(지금의 장사)에 임명한다. 추밀원학사 겸 호부시랑 설거정을 권지랑주(지금의 상덕)에 임명한다; 봉상절도사 왕경이 죽은 후에는 추밀직학사, 상서좌승 고방을 권지봉상부(지금의 섬서 봉상)에 임명한다; 진국군절도사 이숭구가 면직된 후, 화주의 땅은 더 이상 절도사를 설치하지 안혹, 지주(知州)를 파견하여 관리한다.

 

중당이래, 절도사는 일반적으로 약간의 주,부를 관할했고, 여러 주의 정무를 통할했다. 그의 주둔지 바깥의 주군을 지군(支郡)이라고 불렀다. 번진의 대권을 혼자서 독점한다. 말에 타면 군대를 통솔하고, 말에서 내리면 백성을 다스렸다. 주, 부, 현급의 관리는 그의 심복이 맡는다. 마치 독립왕국과도 같았다. 북송이 개국하고, 점차 번진이 관할하는 주부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번진 관할구역내의 지군이 직접 중앙정부에 예속되도록 한다. 이렇게 번진의 세력범위를 축소시킨다. 절도사 부언경은 오랫동안 대명부에 있었고 정무는 아교(하급장교) 유사우에 위임하여 처리했다.그러나 불법을 마음대로 저지르고 폭정을 해서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관도현, 위현, 영제현, 임제현에 4명의 중앙정부관리를 파견하여 지현을 맡게 한다 그리고 행정권을 조정으로 회수한다. 송태종 태평흥국 2년에는 다시 명을 내려 절도사 산하의 모든 지군을 중앙정부 직속으로 한다. 번진관할구역은 본주부에 한하게 되었다. 동시에 조정신하를 주부의 장관으로 내보낸다. 절도사는 실제로 이미 지방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되었다.

 

번진이 각주부급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노력으로 건덕원년 사월, 조정은 주부에 통판이라는 관직을 설치한다. 이들은 주부관리의 감찰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다. 건덕원년 칠월, 조광윤은 조서를 내려 정부요원에게 통판인선을 추천하도록 명한다. 1차로 43명을 선발하여 번진의 치하에 있는 주부통판으로 내보낸다. 오대이래, 절도사는 대부분 자신의 심복을 현급 정부의 진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현령과 분정항례했다. 그들은 번진에 충성했다. 그리하여 조정은 현급정부에 현위를 회복시켜, 사법, 집도, 민병훈련등 사무를 담당하게 한다. 현령과 함께 주부장관에게 책임진다. 

 

이런 일련의 조치를 통하여, 조정의 문관계통은 금방 번진의 관리계통으로 삼투해 들어간다. 계속하여 번진의 세력범위를 잠식하고, 번진의 직권을 약화시킨다.

 

셋째, 병력을 정선하고, 병력을 금군으로 보낸다. 건륭원년 칠월, 조광윤은 명을 내려 경중금군을 검열한다. 그중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병사를 뽑아서 상군으로 승진시키고, 노약병약한 자를 '잉여인원'으로 잡역으로 돌리거나 점차 도태시켰다. 같은 해, 명을 내려 각주장관에게 정예병사를 선발하여 경성으로 보내라고 명한다. 금군의 병력을 보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장한 병졸을 '병양(兵樣)'으로 정선하여 그들을 각지로 보내어 그들를 샘플로 하여 각지에서 병력을 모집한다. 지방정부는 훈련후에 금군에 편입시켰다. 이것이 나중에는 통상적인 형태가 된다. 이렇게 하여 각지의 정예병사는 거의 모조리 금군에 편입된다. 이렇게 하여 대거 번진군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킨다. 정예병졸은 모조리 데려오는 효과를 거둔다. 대종조이 군대는 남방할거세력을 소탕하는 전투에서 거의 패배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예병을 금군에 모조리 거둬들인 것과 관계가 없을 수 없다.

 

넷째, 금군을 정돈하고, 권력을 황제에 귀속시킨다. 이것은 제1차 배주석병권이다. 조광윤은 등극전에 전전도점검(금군 전전사의 통수)이었다. 그의 정변성공은 완전히 금군장령의 지지에 의존해서이다. 정변성공과 동시에, 그는 금군장령들로부터의 위험을 감지한다. 등극부터, 논공생상에서 전 금군장령은 모조리 중용된다. 원래 조광윤과 직위가 비슷했던 전전사와 시위친군사의 두 최고장령 모용연쇠와 한령곤은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병력을 이끌고 가게 한다. 조정을 거친 후, 금군의 병권은 모조리 조광윤의 심복 수중에 들어간다. 석수신, 고회덕, 왕심기등이 그후 '이이(二李)'를 평정하는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조광윤은 생각하다. 자신의 심복이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 정권은 이미 안정되었따. 다만 조보는 깊이 우려한다. 여러번 그들을 외지로 내보내라고 말한다. 조광윤이 말한다: "그들은 분명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왜 의심하고 걱정하는가?" 조보가 대답한다: "나도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지휘관의 재목이 아닙니다. 수하들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그들의 부하가 난을 일으키면 사정은 그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건륭2년(962년) 칠월의 어느 날, 조광윤은 석수신등을 불러서 술을 마시면서 술이 한창 올랐을 때 말한다. "너희가 없으면 내가 황제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로 있는 것도 아주 어렵다. 절도사로 있는 것만큼 통쾌하지 못하다. 아침저녁으로 잠도 제대로 못잔다." 석수신등은 급히 연유를 묻는다. 조광윤이 대답한다. "그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황제라는 자리는 누구든 앉고 싶어하지 않는다." 석수신이 머리를 숙이며 묻는다. "폐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현재 천하는 이미 안정되고 누가 감히 두 마음을 품겠습니까?" 조광윤이 대답한다. "너희는 당연히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일 수하가 부귀를 탐해서, 일단 황포가신(黃袍加身) 한다면 너희는 비록 원하지 않아도 안될 것이다." 석수신등은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묻는다. 그래서 조광윤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왜 병권을 내놓지 않느냐. 큰 행정구로 가서 절도사를 해라, 그리고 좋은 전답을 사서, 자손들에게 영구히 재산을 물려줘라. 나는 너희들과 친척관계를 맺고, 그러면 군신간에 서로 의심하지 않으며 상하가 편안할 것이다. 이게 아주 좋지 않겠느냐." 다음 날, 석수신, 고회덕, 왕심기, 장력탁등 금군장령은 병을 이유로 군직을 사직한다. 조광윤은 그들을 절도사로 임명하고, 나중에 그들과 인척관계를 맺는다. 

 

제1차 배주석병권은 조광윤이 큰 번진절도사의 이익을 미끼로 삼아서 금군의 지휘권을 거둔다. 그후 금군을 개조하여, 시위친군사를 시위마군사와 시위보군사로 나눈다. 원래의 전전사와 합하여 '삼사'가 되게 한다. 삼사의 지휘관(도지휘사)는 지위가 같다. 서로 견제한다. 금군장령이 같이 공모하여 난을 일으킬 위협은 기본적으로 제거되었다.

 

다섯째, 사법권을 회수하고, 법을 관련 부서에서 담당하게 한다. 건륭3년(962년) 삼월, 조광윤은 재상에게 말한다: "오대시기 제후번진이 전횡발호하여 자주 법을 어기고 살인을 저질렀다. 조정이 이에 대하여 모른 척했다. 형부의 직권이 거의 포기된 것이다. 지금부터, 무릇 사형에 처할 사건은 모두 사건기록을 조정으로 보내라. 형부에서 재심하도록 하라." 이 규정은 현대의 사형재심제도이다. 번진이 자신을 반대하는 자를 제거하는 행위를 막아버린 것이다.

 

여섯째, 전운사사(轉運使司)를 설치하여 이익을 중앙으로 보낸다. 중당이래 번진할거로 재정수입은 모조리 번진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번진은 살찌고 조정은 가난했다. 번진에 경제력이 생기게 되자, 병력을 길러 조정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송나라초기 남방을 평정할 때, 군수물자 조달, 운송으로 군수조달을 보장하기 위하여 조정은 전운사사를 설치한다. 장관은 전운사라고 부른다. 조정은 요원을 파견하여 맡게 한다. 조보는 재상을 맡은 후, 각 주부가 계획내에서 남겨쓰는 외에 나머지 세금은 전부 경성으로 운송하도록 했다. 지방정부가 남겨서 쓸 수 없다. 그 후, 조정은 각 로, 도(성급 행정구획에 해당함)에 전운사사를 설치하다. 속칭 "조사(漕司)"라 한다. 지방재정을 전문적으로 처리하고, 물자의 조달과 운수를 책임졌다. 전운사사의 설립으로 중앙재정수입의 증가를 확보했다. 전진세력의 경제권을 장악했고, 이것이 바로 조보가 말한 "그 돈과 양식을 통제해야 한다."

 

일곱째, 번진을 취소하다. 이상의 조치를 점진적으로 실시하면서, 번진세력은 크게 억제된다. 이미 국가에 화를 끼칠 수 없게 되었다. 조광윤은 그 후에 제2차 "배주석병권"을 시작한다. 이번에 그가 빼앗으려는 것은 번진이다. 개보2년(969년) 십월, 조광윤은 후화원에서 연회를 베풀어 북경으로 온 절도사들을 청한다. 술이 한창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두 국가의 공신이다.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이 많다. 이것은 내가 공신을 우대하는 본 뜻이 아니다." 봉상절도사 왕언초는 조광윤의 뜻을 잘 이해했다. 그래서 즉시 말한다: "신은 원레 무슨 공로랄 것이 없습니다. 황상의 은총을 입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몸도 약하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말년을 지내겠습니다." 또 다른 몇몇 절도사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속속 자신의 전공과 이력을 얘기한다. 조광윤은 불만스럽게 말한다. "그건 모두 전왕조의 일이다. 언급할 가치가 없다." 다음 날 연회에 참가했던 절도사들은 모조리 직무가 면직되고 한직으로 발령이 난다. 이번 사건은 제1차 '배주석병권'으로부터 8년이 지난 후이다. 소위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번진은 이미 중앙정부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번의 '탈권'은 시원스러웠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중당이래 잘라도 잘리지 않던 번진세력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난다.

 

이상의 조치는 기본적으로 송태조의 재위기간동안 점차 추진했다. 송태종때 완성한다. 조광윤이 처한 시대는 중원지구에 만당 오대시기의 전란을 거쳐, 송초의 판도는 삼국시기 조위정권보다도 적었다. 북방의 요나라와 북한(北漢)정권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남방의 8개 지방정권도 장기간 할거하고 있었다. 신흥의 북송정권은 가위 앞뒤로 적을 맞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적극직이고 진취적인 결심이 없다면, 만일 정확한 책략이 없다면, 만일 영도자의 남다른 재지와 담량이 없다면, 화하대지는 사분오열의 혼란국면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도 모른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조광윤은 이 시대의 대영웅이다. 그는 정권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살인과 처벌을 아주 적게 하면서 화하대지의 통일을 실현했다. 천백년동안 사람들은 왕왕 대송왕조의 빈약한 원인을 송태조의 중문억무의 기본국책에 두어왔다. 그러나 대송조 근 300년기업을 무시하는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혁제폐정(革除弊政), 부국강병할 수 있었다. 만일 국가가 송휘종 조길처럼 사치음일한다면, 송고종 조구처럼 진취적인 생각을 한다면 아무리 강대한 국가와 군대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이드하에서는 몰락할 수 앆에 없다. 송나라의 멸망은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