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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지치16

당태종은 왜 위징의 묘비를 부수었다가 다시 세웠는가? 글: 유병광(劉秉光) 당태종(唐太宗)과 위징(魏徵)은 지금까지 현군직신(賢君直臣, 현명한 군주와 직언하는 신하)의 모범으로 얘기되었다. 위징이 살아있을 때에는 당태종이 그를 '거울'로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돈관계를 맺었다. 위징이 죽었을 때, 당태종은 5일간이나 조회를 열지 않고, 친필.. 2008. 12. 6.
중국역사상의 태평성세 중국역사상 태평성세라고 일컬어지는 경우를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강지치(成康之治) (기원전1017년-기원전961년) 왕조: 주(周) 대표인물: 주성왕(周成王) 희송(姬誦), 주강왕(周康王) 희소(姬釗) 서주때의 주성왕, 주강왕이 앞뒤로 40여년간 형성한 안정되고 강성한 정치국면을 가리킨다. 보정대신 .. 2008. 3. 25.
장손황후: 당태종이 가장 신뢰한 정치고문 글: 맹헌실(孟憲實) 장손황후가 자기가 관리하는 일만 잘 처리했더라면, 그녀의 지위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오늘날 그녀를 평가하는 것처럼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든 당태종의 인식이든. 장손황후는 절대 단순히 우수한 후궁관리인이 아니었다. 실제로 장손황후는 이.. 2007. 11. 7.
당태종의 후계자 선정 배경 만년의 당태종에게 가장 골치아픈 문제는 태자문제였다. 정관17년 4월, 이승건(李承乾)이 태자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태자가 될 자격을 지닌 사람은 장손황후의 또 다른 두 아들이었다. 바로 위왕(魏王) 이태(李泰)와 진왕(晋王) 이치(李治)였다. 두 사람을 비교하자면, 이태의 조건이 훨씬 뛰어났다. .. 2007. 5. 23.
"현무문의 변"에서 감추어진 중요한 부분 글: 맹헌실(孟憲實)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현무문사건의 많은 구체적인 내용은 나중에 가려졌는데, 왜 위지경덕(尉遲敬德)이 황제(당고조 이연)를 연금한 내용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는가? 처음에는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발견한 것은 이 글은 모두 위지경덕전에 기재.. 2007. 5. 17.
당태종(唐太宗)과 위징(魏徵) 위징(580-643)은 수당시대의 걸출한 인재이다. 자는 현성(玄成)이고, 거록하곡양(지금의 진주)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매우 빈곤하게 자랐고, 출가해서 도사가 되었었다. 수나라 말에 와강(瓦岡) 반란군에 참여한다. 이밀(李密)이 패한 후, 당(唐)에 귀순하였다. 그 후에 다시 두건덕(竇建德)이 실.. 2005.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