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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태종)

당태종은 왜 위징의 묘비를 부수었다가 다시 세웠는가?

by 중은우시 2008. 12. 6.

글: 유병광(劉秉光)

 

당태종(唐太宗)과 위징(魏徵)은 지금까지 현군직신(賢君直臣, 현명한 군주와 직언하는 신하)의 모범으로 얘기되었다. 위징이 살아있을 때에는 당태종이 그를 '거울'로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돈관계를 맺었다. 위징이 죽었을 때, 당태종은 5일간이나 조회를 열지 않고, 친필로 비문을 썼다. 그러나, 위징의 유골이 아직 식기도 전에, 당태종은 아무도 생각지 못하게 마음을 바꾸었다. 형산공주(衡山公主)와 위징의 장남 위숙옥(魏叔玉)의 혼약을 해제했을 뿐아니라, 화를 참지 못하고 친히 위징의 묘비를 깨트려버렸다.

 

당태종의 이같은 놀라운 이상행동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위징이 생전에 극력 추천한 두정륜(杜正倫), 후군집(侯君集)이 연이어 낙마하여 당태종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는데서 찾는다. 또 어떤 사람은 위징이 일찌기 자신과 당태종간의 일문일답의 간언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는데, 이를 기거록(起居錄)을 책임지고 있는 저수량(褚遂良)에게 주어 참고하도록 함으로써, 당태종의 금기를 범했다는 것을 든다. 이 두가지 주장에도 일정한 이치가 있다. 다만 그 근원을 따져보면 위징이 여러번 지나치게 직간을 하여 당태종의 마음을 상하게 함으로써 당태종으로 하여금 "역반심리(逆反心理)"가 생기게 하였다. 묘비를 깨버린 것은 당태종이 오랫동안 받았던 억압에서 나타난 히스테리적인 발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태종은 역사상 드물게 보는 개명한 군주이다. 대당성세를 개창하기 위하여, 천고일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위징에게 '무한한 발언권'을 부여했고, 위징으로 하여금 시시때때로 자신을 일깨우고 직언하게 하였다. 국가대사에 있어서, 위징은 원로와 같이 고사를 인용하고 방증을 들어 청산유수로 말했다. 마치 아무런 생각이 없는 어린 군주를 가르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황제의 사생활에 있어서도 위징은 나이많은 장자로서 눈물을 흘려가며, 고심을 다해서 말했다.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어린아이를 교육하는 것과 같았다. 사료에 따르면, 위징이 당태종을 위하여 일한 17년간, 사료에 근거가 남아있는 간언만 200여차례에 달하며, 그 내용은 정치, 경제, 문화, 외교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고, 심지어 황제의 사생활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많은 경우 당태종을 아주 난감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위징은 당태종보다 스무살이 많았다. 만일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60년대생과 80년대생의 관계와 같다. 연령의 차이로 세대차이가 있다. 의견이 불일치되어 두 사람이 충돌하는 경우가 당연히 많았다. 위징은 심혈을 기울여 간언하면서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그것은 바로 황제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황제에게도 자기의 주장, 이상, 애호와 사생활이 있다는 것이다. 당태종은 태어나면서 부터 가진 호기심, 뭔가 뛰어난 업적을 세우겠다는 개척정신, 그리고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은 경우 위징에게 간섭받고 교란받았다. 한번은 당태종이 장손황후에게 위징을 크게 욕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언젠가 짐이 이 시골늙은이를 죽여버리지 않으면 안되겠다" 진언을 하면 뭐든지 잘 들어주는 당태종을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을 보면 위징의 직언은 확실히 지나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이 너무 깊으면 쉽게 금이 갈라지게 된다. 위징의 이런 자애로운 부친같은 지나친 사랑은 당태종의 눈에는 털어버릴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황제가 하는 말이 어떤 때는 말발이 서지 않고, 오히려 대신의 얼굴을 살펴야 한다. 이처럼 장기적으로 적립된 억압은 언젠가 화산처럼 돌연 폭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징의 '추천과오'와 '간언누설'은 그저 당태종이 '혼약을 깨고 묘비를 깬' 사건의 도화선에 불과하다. 정관18년, 간언을 듣지 않고, 혼자서 하고 싶은대로 하던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다가 좌절한 후, 어쩔 수 없이, "위징이 있었다면 내가 이런 일은 하도록 하지 않았을텐데!"라고 장탄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즉시 명을 내려 비를 다시 세우고 위징의 처자들에게 하사품을 내리게 하였다. 사람은 좌절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양약은 입에 쓰나 몸에 좋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이롭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황제도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