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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변혁과 진작: 중국 역대왕조의 개국63년

by 중은우시 2012. 10. 1.

글: 설이(雪珥) 

 

곤곤장강동서수(滾滾長江東逝水) 도도한 장강은 동쪽으로 흘러가고

낭화도진영웅(浪花淘盡英雄) 물결처럼 일었다 사라지는 영웅들

시비성패전두공(是非成敗轉頭空) 시비와 성패는 모두 헛된 일이 되고

청산의구재(靑山依久在)  푸른 산은 옛 그대로인데

기도석양홍(幾度夕陽紅)  석양에 지는 해는 또 몇 번인가?

 

63년(중화인민공화국이 1848년 성립되어 2012년까지 63년이 되었다), 기나긴 중국역사에 있어서 실로 짧기 그지없는 기간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왕조에 있어서, 그것은 아마도 청춘의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중년의 발섭(跋涉)을 대표할 수도 있고, 혹은 사망의 도래를 표시할 수도 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래, 무창에서 포성이 울려 공화혁명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까지, 중국에는 모두 12개의 통일왕조가 나타났다(그중에 한, 진, 송은 각각 두 개의 왕조로 나뉜다. 삼국, 남북조, 오대십국등 분열된 시대는 포함하지 않는다).

 

이 12개의 왕조에 있어서 개국63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서한(西漢)

 

서한의 개국63년째 되는 해는 기원전138년 한무제 건원2년이다.

이 해에 서한은 제7대황제이자 나이 겨우 만17세인 한무제 유철이 즉위한지 2년이 되었다.

"건원(建元)"이라는 이 연호는 중국역사상 첫번째 연호이다. 이 자그마한 개혁은 이 소년천자의 황제로서의 생애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장안성의 황궁에서 한무제는 무수히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특사인 25세의 장건이 이 해에 농서를 통해 서역으로 들어갔고, 대월지와 연합해서 흉노를 치고자 했다. 그러나 한번 떠나자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원래, 장건은 흉노의 경내에서 포로로 잡혔고, 이때부터 흉노에 11년간이나 붙잡혀 있는다. 소년천자와 청년특사는 모두 생각지 못했다. 몇년후, 서역은 중화제국와 긴말히 연락하고, 대한제국은 서역에 도호부를 설치하여 주권을 행사하게 될 줄을.

외교와 군사에서의 혁신을 도모하는 외에, 소년천자의 가장 큰 개쳑조치는 내정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개혁의 칼끝을 직접 태황태후 두씨(竇氏)를 핵심으로 하는 외척가족에 겨누었다.

태황태후 두씨는 처음에 이 손자의 즉위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작은아들인 양왕(梁王) 유무(劉武)가 형인 한경제(한무제의 부친)의 황위를 승계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한무제가 승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고모인 유표(劉嫖)였다. 유표가 도와준 원인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무제가 그녀의 딸인 아교(阿嬌)를 처로 삼고 싶어하고, 아교에게 금옥(金屋)을 지어주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옥장교(金屋藏嬌)"의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한무제는 황위를 얻었고, 아교도 금옥을 얻었다. 그러나, 한무제가 얻은 제국은 그다지 안정되지 않았다. 개국63년동안, 비록 이전에 소위 "문경지치(文景之治)"가 있었지만, 많은 은환을 남겼다. 왕공귀족은 거대한 기득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제후번진의 세력은 여전히 거대했다. 중앙의 권위는 갈수록 떨어졌다. 그리고 관료체계는 관료자제들이 몇 대에 걸쳐 독점하고 있어 세습과 유사했다. 사회에는 배금주의가 횡행하고, 풍기가 호화사치스러웠으며, 빈부격차가 확대되었다. 가의, 조착등은 개혁조치를 제안했지만, 기득이익집단에 손해를 가하는 것이어서, 중앙이 감히 시행하지 못했다. 심지어, 조착이 제안한 삭번은 "칠국지란(七國之亂)"이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제후들은 "주조착, 청군측(誅晁錯, 淸君側)"(조착을 주살하고, 임금의 곁에 간신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킨다. 외환도 적지 않았다. 흉노는 매해 침입한다. 한문제때는 흉노가 직접 수도 장안으로 치고 들어오기도 했다. 한경제의 재위 16년간 흉노는 5번 침입하고, 당당한 중화제국은 그저 화친으로 응수할 수 밖에 없었다.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도광양회(韜光養晦)했다.

 

이런 제국은 개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해에 한무제는 개혁의 신정을 선포한다. 주로 유학을 존중하고 폐해를 혁파하며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었다.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이익을 조정하는 폐해혁파이다. 그는 "영열후귀취국(令列侯歸就國)"하도록 하여, 자주 경성에 머무르고 있던 제후들을 자신이 영지로 돌려보낸다. 동시에 각국은 반드시 성문을 개방하고, 사사로이 관문을 설치하여 출입을 제한할 수 없도록 한다. 또한 두씨외척들을 유배보내고 귀족지위를 박탈한다.

 

이같은 맹렬한 개혁을 기득이익집단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속속 태황태후에게 일러바친다. 어사대부 조관은 상소를 올린다. 그의 상소는 이 짧은 개혁을 무너뜨린 마지막 도초(稻草)가 된다. 그는 한무제에게 건의한다. "정무에 관한 여러가지를 동궁(東宮, 즉 태황태후의 거소)에 보고하지 말자"고 한다. 태황태후는 그 말을 듣고는 대노한다. 조관, 왕장을 체포하게 하여 감옥에 집어넣고, 둘은 모두 자살한다. 태황태후의 관여로 한무제의 곁에 있던 혁명파들은 모조리 관직을 떠나고, '건원신정'은 실패로 끝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유씨성이건 두씨성이건 귀족들이 속속 다른 황제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때, 고모 겸 장모인 유표가 다시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태황태후도 굳이 이 손자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한무제의 황위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 해는 한무제에 있어서 아무런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에서 그는 아름다운 미녀를 하나 구하는데, 이름이 위자부(衛子夫)이다. 나중에 위자부는 중화제국의 황후가 되고, 그녀의 동생인 위청(衛靑)은 제국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 된다.

 

개국63년의 실패는 젊은 한무제로 하여금 도광양회를 익히게 했다. 그후 4년, 그는 조정을 내팽개치고, 매일 놀이만 즐긴다. 건원6년(기원전135년) 태황태후가 사망하자, 21세의 한무제는 연호를 "원광(元光)"으로 고치고 전력을 다하여 개혁을 추진한다.

 

동한(東漢)

 

동한의 개국63년은 기원후88년, 장화(章和)2년이다.

이 해에, 한장제가 사망하고, 나이 겨우 10살된 아들 유조(劉肇)가 즉위한다. 그가 바로 한화제(漢和帝)로 동한의 제4대황제이다. 신황제는 다음해(89년)에 연호를 "영원(永元)"으로 고친다.

황제의 나이가 어리다보니, 태후가 자연히 수렴청정을 한다. 이 때의 태후는 서한개국63년과 마찬가지로 역시 두씨(竇氏)였다. 두태후는 소황제의 생모가 아니다. 소황제의 생모는 양귀인(梁貴人)인데, 이 아들을 낳아서, 당시 두황후의 질투를 받았다. 두황후는 양귀인의 부친을 감옥에 집어넣어 살해하고, 양귀인도 두려움에 죽는다. 두씨는 이리하여 한화제의 양모가 된다. 외척간의 피비린내나는 투쟁은 동한 궁정의 메인스토리였다.

 

어린황제의 부친인 한장제는 그에게 괜찮은 강산을 물려주었다. 한장제 본인은 저명한 서예가이다. 그이 초서는 후세에 "장초(章草)"라 불린다. 이 대서예가는 부친 한명제의 치국스타일을 물려받아서, 제국의 정치는 청명하고 경제는 번영하고 사회는 안정되었다. 반초는 두 번에 걸쳐 서역에 사신으로 가서 서역은 다시 한나라에 칭번한다. 이 시기를 역사에서는 "명장지치(明章之治)"라고 부른다. 동한의 보기드문 태평성대였다.

한장제의 가장 큰 문제는 외척을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동한은 외척전권의 신국면을 맞이한다. 두황후의 가족은 세력이 아주 컸다. 그의 오빠인 두헌(竇憲), 두독(竇篤)은 하사품을 많이 받고 총애가 날로 더해갔다. 어린 황제가 즉위한 후, 두태후는 실권을 장악하고, 두헌은 시중의 신분으로 조정을 장악했다.

 

두헌이 권력을 독단하면서, 이 해에 두태후의 애인으로 의심되던 도향후(都鄕侯) 유창(劉暢)을 암살한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나눠가지게 될까봐 우려해서이다. 이 일이 발각되는 그는 체포되고 두태후는 진노한다. 그리하여 이 오빠를 내궁에 구금한다. 이때 한나라에 복속한 남흉노가 병력을 청한다. 북흉노의 기근을 틈타서 북벌을 하자는 것이다. 두헌은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군대를 이끌겠다고 하고, 두태후도 받아들인다. 그를 거기장군에 임명하여 부대를 이끌고 대막에 들어가게 한다. 그는 연전연승하며 북흉노를 대파하고 연연산에 비석을 세운다. 삼년의 북벌전쟁에서, 중화제국의 군대는 대막을 5천리나 들어가고, 북흉노는 철저히 궤멸된다. 잔여부족은 서쪽으로 도망간다. 이리하여 유럽에 일대 소동이 벌어지고, 불가일세의 로마제국이 무너져서, 세계의 국면이 뒤바뀐다.

 

다만, 북흉노가 떠난 공간을 동호의 선비족이 메우게 된다. 선비족의 압력하에, 남흉노등은 속속 중원으로 이주한다. 나중에 동진시기에 "오호난화"의 화근이 된다.

 

탁월한 전공을 세운 두헌은 권력이 천하를 뒤흔든다. 어린황제를 아예 눈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하게, 영원4년(92년), 어린 황제는 환관들의 도움하에, 성공적으로 두헌의 대장군 인수를 박탈한다. 이어 두씨의 몇 형제는 모조리 사사된다. <한서>의 작자인 반고를 포함하여, 두헌의 부하들은 대부분 척결된다. 이때의 어린 황제는 나이 겨우 14살이었다. 그의 운주유악(運籌帷幄)의 조숙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나중의 강희제에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한화제는 환관들을 제국의 권력투쟁에 끌어들인 것이다. 외척-환관이 순서대로 돌아가며 괴롭히면서 결국 이 제국이 멸망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한화제의 묘로는 비록 "화"이지만, 이 왕조는 한번도 '화"합과 가까워져본 적이 없다.

 

두헌은 비록 권신 내지는 간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동한황조에 평화의 외부환경을 조성해주었다. 동한개국 63년의 이 해에, 두태후는 "염철전매를 해제"하는 경제개혁을 단행한다. 민간에서도 자유롭게 소금과 철을 생산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세금만 납부하면 된다. 이는 민간의 활력을 대거 불러왔다. 이것이 아마도 동한왕조는 상층부가 계속하여 싸우면서도 병세완연한 상태로 오랫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원인일 것이다.

 

동진(東晋)

 

동진의 개국63년은 기원381년으로 진효무제 태원(太元) 6년이다.

개국으로부터 겨우 63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진효무제 사마요는 이미 제9대황제이다. 동진정권의 불안정은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마요는 나이가 겨우 만19세였지만, 이때 이미 즉위한지 9년째였다.

이 해에, 사안(謝安)이 주도하는 대북방어전을 진행한지 이미 2년째였다. 그리고 점차 전략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3년전(378년) 전진(前秦)의 17만대군이 양양을 공격하고, 1년의 격전끝에 성이 함락된다. 전진군대는 곧이어 팽성(彭城)을 포위공격했고, 진진(秦晋)간의 회남지전(淮南之戰)이 발발한 것이다. 사안은 곧이어 건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사현(謝玄)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광릉(廣陵)에서 응전하게 한다. 그는 4전4승을 하며 전국을 뒤집는데 성공한다.

이해 이후, 전쟁은 제2단계에 접어든다. 2년후(383년), 쌍방간에는 "비수지전(淝水之戰)"이 발발한다. 인원수 겨우 7만의 진(晋)나라군대가 전진의 15만대군을 물리치고 전승을 거둔다. 여기에서는 "풍성학려(風聲鶴唳)" "초목개병(草木皆兵)"의 고사성어가 나온다.

 

동진은 반쪽짜리 국가였다. 제국의 북방은 일찌감치 유실되었고, 건강에 도읍을 정했을 뿐이고, 남북간의 전투도 끊이지 않았다. 제국의 최강의 적은 부견이 이끄는 전진이었다. 젊은 진효무제는 동진에서 성취를 거둔 임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4살때(376년) 친정한 후, 세금개혁을 실시하여 전답의 다소에 따라 세금을 거두던 것을 사람수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것으로 바꾼다. 현역군인은 납부의무를 면제해주어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외환외에 제국이 내우도 만만치 않았다. 몇몇 대가족이 제국을 거의 분할하고 있었다. 정치, 경제는 물론 군사까지도, 황제의 권위는 전국을 호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5년전(태원원년, 376년), 황제가 친정을 시작했지만, 장강의 상류는 권신 환씨(桓氏)의 수중에 놓여 있었고, 하류는 또 다른 권신 사씨(謝氏)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권신들의 세력균점은 과두정치를 형성했고, 이런 균형은 이 해의 제국의 희망이었다.

환씨의 핵심인물은 환온(桓溫)인데, 이미 사망한지 몇년이 되었다. 당시 가장 저명한 군사가이자 정치가로 환온은 제3차북벌때 대패한다.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 세운다. 당시이 황제 사마혁을 폐위시키는데, 그가 진폐제(晋廢帝)이다. 그리고 사마욱을 황제로 올리는데 그가 진간문제(晋簡文帝)이다. 조정대권은 모조리 환온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조리 제거한다. 진군은씨(陳郡殷氏), 영천유씨(潁川庾氏)는 이때 거의 멸족당한다. 환온의 세력은 언제든지 황제위를 찬탈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른다.

 

사씨의 대표인물은 사안이다. 그는 명문재자이고, 강좌(江左)의 풍류제일로 일컬어진다. 왕희지, 왕헌지 부자등과 관계가 밀접했고, 함께 난정(蘭亭)의 시회에 참가한다. 거기서 천고에 읊어지는 <난정집서>를 남긴다. 다만, 사안은 한번의 전투실패후 서인으로 되어, 환온의 막부에 들어가서 재기를 꿈꾼다. 환온, 사안 두 사람은 나중에 정적이 되지만, 서로를 아꼈다.

사씨가족은 환온을 견제하는 주요역량이 된다. 환온은 병세가 깊은 진간문제를 압박하여 유조를 작성하게 하여, 대권을 환온에게 선양하도록 한다. 그러나, 사씨, 왕씨 두 가족이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환온이 죽을 때까지 그는 황제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환온은 죽었지만 환씨세력이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안은 여러 측의 이해를 조정하여, 내부의 세력균현을 이룬다. 환씨가 계속 형주의 지배권을 보유하는 동시에, 환씨는 양주를 사씨에게 내놓는다. 이리하여 "형양상형(荊揚相衡), 즉천하평(則天下平)"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동진왕조는 과두정치의 단계로 접어든다.

사안이 정권을 좌지우지할 때, 조정국면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제국의 부흥을 이끈다. 다만, 이 부흥은 너무나 짧았다. 사안이 죽은 후, 제국이 내정은 다시 망가진다. 결국 권신들이 황제위를 찬탈하는 남조시대로 접어든다.

 

당(唐)

 

당나라의 개국63년은 8\681년, 당고종 영륭(永隆)2년 겸 개요(開耀)원년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강성하고 가장 장수한 왕조로서 당나라의 개국63년은 청춘이 기운이 넘치는 좋은 시기였다.

이때의 당고종은 53세이고, 재위한지 32년째이다. 그러나 이미 허수아비가 되었다. 진정 권력을 장악한 것은 57세의 황후 무측천이다. 황제와 황후는 각각 "천황" "천후"로 "쌍성(雙聖)"이라 불리웠다. 이는 중국역사상 공전절후의 것이다.

당고종은 부친 당태종으로부터 강산을 물려받았을 때는 일찌감치 "정관지치"의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당태종은 고구려정벌에 실패하고, 대내적으로 권문세족은 토지를 점거하고, 빈부격차가 확대되었다. 당고종이 등극한 후, 정관지치의 치국이념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요동의 전투 및 토목공사를 중단시키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쉬도록 하고, 이적(서제적), 장손무기, 저수량등의 보좌하에, 당나라의 국력은 신속히 회복된다. 군사적으로 서돌궐을 격파하여 변방의 안정을 되찾고, 내정에서도 정치가 청명하고 백성들은 평안했다. 이 시기는 역사에서 "영휘지치(永徽之治)"라고 불린다.(영휘는 당고종의 전6년간의 연호임).

 

"영휘지치"에서 당고종은 하나의 수확을 거둔다. 즉 그보다 나이가 4살많은 무측천을 궁안으로 불러들이고, 신속히 황후까지 끌어올린다. 그후 당고종은 풍현병(風眩病)이 심해져서 거의 실명한다. 조정은 황후 무측천의 손에 들어간다. 무측천은 그의 정치적 재능을 발휘한다. 19년후(674년), 황제와 황후는 나란히 "쌍성"으로 불리고, 무측천은 12개의 개혁안을 내놓는다. "농경과 잠업을 권장하고(勸農桑), 부역과 요역을 경감시키며(薄賦徭), 경박하고 교묘한 것을 금지하며(禁浮巧), 일과 비용을 줄여주며(省功費), 언로를 널리 확대하고(廣言路), 참언을 막고(杜讒口), 인재를 등용한다(用人才)"등이다. 이는 그녀의 시정강령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해, 당고종은 풍현병이 심해져서 무측천이 섭정을 하며 연호를 의봉(儀鳳)으로 바꾼다. 중화제국은 여주당국(女主當國)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개국63년이 된 이 해에 대당제국의 군대는 동돌궐 아사덕온부(阿史德溫傅)등의 부락을 격파하고, 토번을 격파한다. 동돌궐 설연타부는 오주(고연주, 보흘약주, 계탄주, 흘주, 저속주)를 이끌고 투항한다. 이는 중화제국의 변경전쟁에서 휘황한 한 해이다. 그러므로 무후는 연호를 "개요"로 고쳐서 이를 기념한다.  이때의 제국판도는 동으로는 한반도에서, 서로는 함해(咸海, 아랄해, 일설에는 里海 즉 카스피해)에 미치며, 북으로는 바이칼호, 남으로는 월남 횡산(橫山)에 이르러 당나라시기에 가장 광활했다.

이 해에, 조야를 뒤흔든 이슈는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를 설소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커다한 혼수물품을 실은 수레가 잘 다니도록 하기 위하여, 제국정부는 만년현의 성문누각을 헐어버리기까지 한다. 혼례당일, 횃불이 하늘을 뒤덮고, 길가의 나무들은 이로 인하여 말라죽는다. 여기에서 "요거고괴(燎炬枯槐)"라는 고사성어를 남긴다.

 

이 제국은 "요거고괴"의 흥성기로 접어든 것이다.

 

북송(北宋)

 

북송의 개국63년은 1023년, 송인종 천성(天聖)원년이다.

이 해에, 나이 겨우 13살인 대송의 제4대황제 송인종 조정이 집권한 둘째해이다. 유태후(劉太后)가 수렴청정하고 있었고, 10년후(1033년) 유태후가 병사하고나서야 비로소 송인종이 친정을 시작한다.

여자가 정치를 한다고 하여 국가의 발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유태후는 이 일년간 송태종시기의 "첩사법(貼射法)"을 부활시킨다. 이는 염차(鹽茶) 세수의 중대한 개혁이다. 정부가 차호(茶戶)의 본전을 선지급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상인들이 차를 생산하는 농가와 자유롭게 차를 매매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만 관청의 시장내에서 진행하여야 했고, 정부는 차상으로부터 "식전(息錢)"(세)을 거두었고, 권(卷)을 주어 확인용으로 삼았다. 이 개혁은 공급자와 수요자가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해주었고, 원래 대형차상인들이 독점하던 차거래이익을 국고로 되돌렸다';정부는 앉아서 식전을 거두었고, 상인과 차농의 이윤도 크게 증가했다.

 

이 해에 유태후는 경제에 깊은 영향을 주는 개혁을 비준한다. 그것은 익주(益州)에 "교자무(交子務)"를 설치하여 지폐를 발행하게 했다. 1년에 125만의 "교자"를 발행한 것이다.

"교자"는 지폐이고, 사천의 상인, 백성들이 철전이 너무 무거워 휴대하기 불편해서 생각해낸 대책이다. 이들 민간지폐는 성도(成都)의 16명 부자들이 주재했다. 그러나 이들 부자들이 쇠락하면서, 신용위기가 발생하여, 지폐를 가진 사람들에게 상환할 수 없게 되어 쟁송이 일어난다. 유태후는 섭정을 한 후, 재삼 연구한 후, 결국 관청이 지폐발행을 책임지기로 결정한다.

 

이 해에, 태주(泰州)의 상풍언(常豊堰)이 여름홍수에 붕괴된다. 한 염창(鹽倉)의 감관이 옛날의 동창이자 강회제체발운부사인 장륜(張綸)에게 서신을 써서 한해언(捍海堰)공사를 건의한다. 장륜은 즉시 중앙에 보고하고, 자신의 동창을 극력 추천한다. 2년후, 그 하급간부는 흥화현령(興化縣令)에 임명되어 한해언공사를 주재한다. 그의 이름이 범중엄(范仲淹)이다.

몇년후 범중엄이 제출한 십대정책은 송인종의 "경력신정(慶歷新政)"의 서막을 연다. 그것은 바로, "명출척(明黜陟), 억요행(抑僥幸), 정공거(精貢擧), 택관장(擇官長), 균공전(均公田), 후농상(厚農桑), 수무비(修武備), 추은신(推恩信), 중명령(重命令), 감요역(減徭役)"이다.

 

송나라황제중 송인종은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모두 42년이다. 그는 아마도 역대황제중 가장 묘호의 "인(仁)"자에 부끄럽지 않은 인물일 것이다. 몇년후 그가 서거할 때, "경사에서는 시장을 닫고 골목에서는 곡을 하여 여러 날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거지와 아이들까지도 종이돈을 불사르며 대내의 앞에서 곡을 했다." 설사 적대적인 요나라까지도, "원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곡을 했다" 요도종 야율홍기는 부고를 받고는 "놀라서 숙연하게 재배하고는 좌우에 말하기를, '내가 만일 중국에 태어났다면 채찍과 양산을 들고 있는 도우후에 불과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700년후, 청나라때의 건륭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평생 단지 3명의 황제만을 인정하는데, 첫째는 조부인 강희제이고, 둘째는 당태종 이세민이며, 셋째는 송인종이라고 한다.

송인종 시대는 후세인들중 진정한 태평성대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문학예술분야에서 당송팔대가중 당나라때의 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6명인 구양수, 증공, 소순, 소식, 소철, 왕안석이 모두 송인종시대에 나왔다. 후인 임어당은 이때를 중국문인들에게 가장 좋은 시대였다고 말한다.

 

남송(南宋)

 

남송의 개국63년은 1190년, 송광종 소희(紹熙)원년이다.

당시 43살인 남송의 제3대황제인 송광종 조돈(趙惇)은 이때 집권한지 둘째해였다.

전해, 송효종은 황위를 송광종에게 선양한다. 송광종이 즉위한 후, 그를 "공주왕(恭州王)"으로 봉했던 영지인 "공주"를 "중경(重慶)"으로 개칭한다. 그 뜻은 자신이 먼저 왕에 봉해지고, 나중에 황제위에 올랐으니, 이중의 경사라는 뜻이다. 지금의 중경은 이렇게 해서 이름을 얻은 것이다.

기실, 이 해는 송광종은 물론이고 대송왕조에게도 뭐 경하할 일은 없었다.

이 황위를 위하여, 송광종은 기나긴 기다림을 이어왔다. 그리고 부친에 대하여 경계와 원망이 있었다. 황위를 손에 넣은 후, 송광종은 더 이상 자신이 태자로 있을 때처럼 황제위를 물려받기 위하여 부친에게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신속히 부친을 멀리하고, 노인이 병이 들어도 살펴보지도 않는다. 노인이 세상을 떠나도 상복을 입지 않는다.

경사는 송광종을 멀리 떠난다. 부자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뿐아니라, 부부관계도 우울했다. 송광종의 황후인 이봉낭(李鳳娘)은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부(妬婦)이자 독부(毒婦)이다. 이 황후의 가장 유명한 일은 송광종이 한 궁녀의 손이 아름답다고 칭찬하자, 바로 그 두 손을 잘라서, 접시에 담아 송광종에게 보낸 일이다. 총애를 받은 몇몇 비빈은 황후의 독수에 목숨을 잃는다. 그리하여 송광종은 애통해 했다. 황후의 문제로 태상황인 송효종은 송광종의 유일한 아들이자, 황후소생인 가왕(嘉王) 조확(趙擴)을 태자로 봉하는데 계속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송광종이후 황위를 송광종의 형의 아들에게 물려주려고까지 계획한다. 이는 송광종이 매우 겁나게 만들었다.

 

여러가지 압력하에 송광종은 즉위한 후 3년째 되던 해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는다. 대권은 황후의 손에 떨어진다. 태상황 송효종이 사망한 후, 권신 한택주, 조여우등은 태황태후(남송개국황제인 송고종의 황후)의 동의하에, 송광종을 퇴위시키고, 태자 조확에게 선양하게 한다. 그가 송녕종이다.

남송왕조의 개국63년은 송광종과 이황후의 부부의 통치하에, 아무런 볼 것이 없었다. 송효종이 쌓아놓았던 청명한 정치는 신속히 부패한다.

이 해에 대송의 경내에서 유일하게 주목할만한 사건은 바로 주희(朱熹)라는 유생이 <대학> <중용>을 <예서>에서 분리시키고, 다시 <맹자>를 '경부(經部)'로 승격시켜, <논어>와 함께 모아서 통일적으로 주해를 붙여서 한 세트로 출간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사서(四書)"이다. 이때부터 4서5경이 중국선비들의 경전이 된다.

이 해애 저명한 천문학자인 황상(黃裳)은 대송황제에 천문,지리팔도를 진헌한다. 지금까지 황상이 진헌한 천문도는 세계에 현존하는 별 수가 가장 많고, 별자리가 가장 정확하며, 시간이 가장 이른 고대의 석각성도(石刻星圖)이다. 천상(天象)마저 꿰뚫어 보았던 황상은 이 제국의 비참한 일생을 꿰뚫어 보았을까?

 

원(元)

 

원나라의 개국63년은 1334년으로 원순제 원통(元統) 2년이다.

원나라의 개국은 일반적으로 1206년 징기스칸의 건국으로부터 기산하지 않고, 1271년 쿠빌라이가 국호를 원(元)으로 한 때부터 계산한다. 이때부터 원나라가 멸망하여 초원으로 돌아가기까지 모두 97년이다. 그러므로, 주원장은 "자고이래 호인은 백년을 넘기지 못할 국운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원나라의 개국 63년은 14살된 원순제 토환테무르가 집권한 둘째 해이다.

이 해에, 옹립한 공으로 권신 바얀이 여전히 중서우승상을 맡으며 국정을 독단했다. 이 몽골승상은 보기 드문 보수분자이다. 그는 유생을 배척했을 뿐아니라, 과거제를 폐지했고, 한인, 남인이 사사롭게 병기를 보관하거나 마필을 기르는 것을 엄금했다. 황제에 대하여 그는 눈에 두지 않았다. 감히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황후를 궁중에서 수색해서 끄집어내서 처결한다. 원인은 황후의 가족에 그와 적대했기 때문이다.

 

권신에 대하여 젊은 황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원순제가 아주 어렸을 때, 모친은 고위층의 권력투쟁에 피살당한다. 그 본인은 평양(平壤)과 광서(廣西)로 차례로 유배당하며 온갖 고난을 겪는다. 살아남은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황위를 얻은 것은 바얀을 대표로 하는 귀족무리들이 추대해주었기 대문이다.

바얀의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는 6년간 지속된 후(1340년) 끝이 난다. 어린 황제가 운주유악하여 바얀의 조카인 톡토(脫脫)가 바얀을 쫓아내는 것을 지지한다. 톡토가 중서우승상을 맡는다. 이 신승상은 일련의 정치, 경제개혁을 시작하고, 과거제를 회복시키며, 말을 기르는 것을 금지하던 것을 풀어주고, 소금의 세금을 감해준다. 그리고 요, 금, 송의 역사를 편찬하고, <지정조격(至正條格)>을 반포한다. 역사에서는 이를 "톡토경화(脫脫更化)"라 부른다.

다만, 개혁은 너무 늦었다. 하늘은 원나라에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은 것같다. "톡토경화"가 4년도 시행되지 못하고, 황하의 둑이 대거 무너진다. 정부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부득이 음짐지갈(飮鴆止渴)하는 방법을 택하여 금융기혁을 추진한다. "초법(鈔法)"을 통하여 민간을 수탈한다. 이러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치는 마침내 안정을 파괴한다. 대규모의 민중폭동이 결국은 이 불가일세의 정권을 무너뜨린다. 주원장의 대군이 대도(북경)으로 몰려요자, 원순제는 후비를 이끌고 대막으로 도망친다. 원나라는 이렇게 무너진다.

이 마지막 황제는 손재주가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적지 않은 기물을 만들어낸다. 일찌기 금인옥녀의 자동시간통보기기를 만든 바 있다. 자동으로 방향을 바꾸는 용주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반천자(魯班天子)"라 불렀다. 다만 뒤늦은 노반은 이미 나라를 구할 수 없었다. 그의 최대성과는 대막에서 다시 '북원'이라 불리는 소조정을 지속시켰다는 것이다.

 

명(明)

 

명나라의 개국63년은 1431년, 명선종 선덕(宣德)6년이다.

대명제국의 제5대황제인 명선종 주첨기는 이 때 나이 33세이고 등극한지 이미 6년이 되었다.

이 해에 수도 북경에서 구금되어 있던 황숙 조왕(趙王) 주고수(朱高燧)가 사망한다. 이는 대명제국을 반세기동안 괴롭혔던 번왕문제가 철저히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6년전, 명선종이 즉위과정에, 숙부들의 암살 심지어 무장반란으로 아주 흉험했었다.

이 해에 제국의 남방에 명선종은 정식으로 여리(黎利)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책봉한다. 명성조(영락제)이래, 중화제국은 이미 안남에 군현을 두어, 판도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이 지역은 계속 불안했다. 명나라의 대량의 군력, 재력과 물력을 소비해야 했다. 황제가 안남을 포기하자 조정에서는 적지 않은 논쟁이 붙는다. 어쨌든 이는 수십만대군이 수십년간 분전한 전과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중화제국은 이때부터 동남아로 확장할 기점을 잃는다. 이 해에 조야의 상하에서는 확실히 보게 된다. 안남을 포기하자 재정의 부담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 해에 제국의 북방에서 명선종은 동북이 올량합타안(兀良哈朵顔)등 삼위(三衛)를 비준하고, 명나라와 시장을 열어 교역하게 허가한다. 이 삼위는 명선종 즉위초기 변방지구를 대거 약탈하다가, 명선종의 친정을 두려워하여 사죄하고 공물로 바친 것이다.

이 해에 대양에서는 이미 육순이 된 정화(鄭和)가 제7차항해를 진행하여 멀리 아라비아반도와 북동아프리카연안까지 간다.

이 해뿐아니라 명선종의 재위기간동안 명나라는 여러가지 중흥의 기상을 보였다.

이 해에, 명선종은 관리, 특히 어사의 영래송왕(迎來送往)을 금지하여 관료사회의 기풍을 정돈한다.

이 해에 명선종은 환관 원기와 완거대등을 주살한다. 원기는 어려서부터 명선종을 모셨고, 탐욕스러웠다. 마음대로 환관 완거인등을 광동에 보내어 군대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았다. 동시에 명선종은 도찰원에게 명하여 공고를 낸다. 내관 내사가 총애를 믿고 설치는 경우에는 모조리 사형에 처하도록 한 것이다. 당연히 명선종때 제국에는 "내서당(內書堂)"을 두어 환관들에게 교육을 시킨다. 나중에 사례감병필대감등을 설치한다. 환관을 국가의 관리체계로 끌어들인 것이나, 이는 나중에 환관이 전권을 행하는 단초가 된다.

이 해에 그 어떤 사료도 설명하지 않는다. 33살된 명선종이 어떻게 자신의 최대 취미 귀뚜라미싸움을 계속 발전시켰는지. 이 황제의 이 취미로 사람들은 그를 "촉직천자(促織天子, 촉직은 귀꾸라미를 말함)"라고 부른다. <요재지이>의 <촉직>을 통하여 이 이미지는 널리 알려진다. 역사는 증명한다. 황제가 큰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약간의 괴이한 기호를 가지고 있더라도 영명한 군주의 이미지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청나라는 작자 사정으로 추후 보완예정]

 

개국63년 천하통일한 12개의 왕조중에서 3개는 이미 요절했다(진, 서진, 수), 3개는 한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동진, 남송, 원), 나머지 6개왕조는 모두 공통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변혁이다. 이런 변혁은 최고지도자 자신에게서 나오기도 하고(서한, 명, 청), 섭정한 황태후에게서 나오기도 했다(동한, 북송). 어떤 경우는 황후에게서 나오기도 했다(당). 그러나 누가 이러한 변혁을 주도했든지간에, 역사는 이미 결론을 냈다: 이들 왕조는 이(변혁)로 인하여 장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