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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태종)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진상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역사상나사사(歷史上那些事) 

 

"정관지치"는 중국인들이 영원히 잊지 못하는 위대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 인민들은 자신의 생업에 편안하게 종사하고,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황제는 자상하였으며, 백관들은 자신의 직분을 잘 지켰다. 쌀독 안에는 다 먹을 수 없을 만큼이 쌀을 담아두고, 밭에서는 푸픗푸릇한 야채가 자랐다....한마디로, 이같이 전설에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시대는 당태종 이세민이 창조해냈다. 그래서 그는 중국황제랭킹에서 당당하게 첫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기극에 불과했다.

 

수문제(隋文帝)가 등극했을 때 전국인구는 400만호이다. 수양제(隋煬帝)가 등극했을 때는 이미 890만호에 달한다. 1호에 6명으로 치면, 전국인구는 5000만가량이다. 이 숫자는 개략 당현종때에 이르러 달성한다. 수나라 개황9년에 개간된 전답은 1944만경이고, 대업중기에는 개간전답이 5585만경에 달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천보14년이 되어 비로소 개간된 전답이 1430만경에 이른다. 수양제가 등극할 때 890만호인데, 당태종이 사망할 때 겨우 380만호였다. 국력의 차이는 생각해보면 분명할 것이다.

 

수왕조때 정부는 각지에 많은 양식창고를 지었다. 그중 유명한 것은 흥락창, 회락창, 상평창, 여양창, 광통창등이다. 저장된 양식은 모두 백만석 이상이었다. 정관11년, 감찰어사 마주(馬周)가 당태종 이세민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경의 창고도 국가에서 쓰는데 지금까지 다 쓰지 못했다." 수나라가 망한지 이미 20년이 되었고, 수문제가 죽은지 33년이 되었는데, 그때의 양식과 옷감을 아직도 다 못썼다는 것이다. 1969년 낙양에서 수나라때의 양식창고가 발견된다. 함가창(含嘉倉)유적지이다. 면적은 45만평방미터에 이르고, 안에는 259개의 양교(糧窖)가 있었다. 그중 하나의 양교에는 이미 탄화된 곡식 50만근이 있었다. 이를 보면 수나라가 얼마나 부유하고 강성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수나라와 당나라의 교체기에 전쟁으로 인구는 약 2000만명이상이 격감한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은 작고 땅은 넓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고자 했다. 이것이 "정관지치"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둘째, 수나라는 대운하 및 과거제도를 만들었다. 대운하로 백성을 힘들게 하여 왕조는 멸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관지치를 만들어낸다. 대운하를 만든 것은 당시에도 이익을 가져다 주었고, 공로는 천추에 남았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말하면, 정말 무슨 "정관지치"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수나라의 공로이다.

 

당고종 이치에 이르러, 돌연 어느날 이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호부상서 고이행(高履行)에게 묻는다: "작년 전국에 인구가 얼마나 증가했는가?" 고이행이 답한다: "작년의 인구증가는 예전과 같습니다. 여전히 15만호입니다."

 

이치가 다시 묻는다: "그럼 우리 나라는 현재 인구가 얼마인가?" 고이행이 대답한다: "380만호입니다". 이치는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본다: "흠...현재 380만호. 정관지치가 모두 23년이니 매년 인구가 15만호씩 증가하면 23년간 증가한 인구수가 바로 360만호이다. 안맞는다. 설마 정관지치를 막 시작했을 때 인구총수가 20만호밖에 되지 않았단 말인가?" 고이행이 답한다: "어쨌든 비슷할 겁니다."

 

이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수나라 개황연간에 인구가 얼마였는가?" 고이행이 회답한다: "그 당시의 호구총수는 870만호입니다." 이치가 깜짝 놀란다. "네 말은 수당교체기에 전국의 인구가 거의 다 죽었단 말인가?" 이치는 한참을 생각하고는 다시 묻는다: "그럼 수나라 개황때 생산한 양식은 얼마였는가?" 고이행이 대답한다: "당시의 양식은 870만호가 50년은 충분히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치가 깜짝 놀란다: "당시에 생산력이 그렇게 높았단 말인가? 알겠다. 정관지치는 바로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로 50년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식을 미친듯이 먹어치운 것이었구나..."

 

이 대화는 <자치통감>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이 말을 상당히 감해서 듣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수당의 전투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공포의 극한까지 같 것이다. 하늘 아래의 모든 백성이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인구는 대황 개황연간의 10분의 1도 안된다. 수나라때 혁명을 하고, 생산을 촉진하여 생산해낸 양식은 천하의 사람들이 50년은 충분히 먹을 양이었다. 이렇게 하여 이세민 정관지치의 경제기반을 마련한다.

 

양보하여, 대당 정관연간의 인구가 이같은 공포스러운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수나라 개황연간의 50%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수나라시대에 이미 그들이 100년은 먹을 양식을 충분히 준비했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런 비밀을 알려주었다: "정관지치"는 이세민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 누구든지, 설사 수양제를 다시 불러오더라도, 마찬가지로 이처럼 적은 인구기초위에서 "00지치"의 사회복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